“도로서 놀아도 된다”… 정원 품은 지그재그 차도서 공놀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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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좋은 도시가 미래다]<3>네덜란드 델프트市의 보행혁명

‘보너르프’ 표지판
‘보너르프’ 표지판
《 네덜란드 남서부의 델프트 시는 1075년 조성된 유서 깊은 도시다. 현재 인구가 1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곳이지만 16세기 무렵 왕이 거주하는 수도(首都) 역할도 했다. 여느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지붕이 낮은 주택들이 모여 있는 주거지역과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성당과 관공서, 상점들이 들어선 중심가로 나뉘어 있다. 델프트 시의 시민단체 ‘멘센스트라트(사람의 거리)’ 소속 활동가인 에디 킵스 매니저는 “델프트에서는 어머니들이 집 앞 도로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에게 ‘차 조심 하라’고 당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의 어린이들은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마음껏 뛰논다. 지나가던 차량은 경적 한 번 울리지 않고 어린이들이 비켜줄 때까지 기다린다. 》

○ ‘도로에서 놀아도 된다’는 도로교통법


 
네덜란드 델프트 시가 세계 최초로 조성한 보행자우선도로 ‘보너르프’의 모습. 차량의 속도를 낮추기 위한 지그재그형 도로, 과속방지턱 등을 갖추고 있다. 보너르프에서는 보행자가 모든 도로 사용의 우선권을 가진다.
네덜란드 델프트 시가 세계 최초로 조성한 보행자우선도로 ‘보너르프’의 모습. 차량의 속도를 낮추기 위한 지그재그형 도로, 과속방지턱 등을 갖추고 있다. 보너르프에서는 보행자가 모든 도로 사용의 우선권을 가진다.
델프트 시의 안전한 일상은 네덜란드의 도로교통법 덕분이다. 이 법 88조에는 ‘보행자는 보너르프(woonerf)로 정해진 도로 내에서 도로 전체를 사용할 수 있으며 놀아도 상관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보너르프에서 운전자는 보행 속도보다 빨리 운전해서는 안 되며 보행자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보행자의 의무는 ‘불필요하게 운전자의 운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보너르프는 ‘생활의 터전’이라는 뜻의 네덜란드어다. 그 역사는 약 50년 전인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델프트 시에서는 화학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했다. 차량 통행량도 폭증하면서 주거지역에서 어린이 교통 사망 사고가 늘어났다. 피해 부모들이 ‘어린이 살인을 멈추라’는 재단까지 만들 정도였다.

 이런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델프트공대의 전문가 그룹을 중심으로 추진한 실험이 세계 최초의 ‘보행자 우선 도로’인 보너르프다. 보너르프는 주거지역의 도로만이라도 어린이를 포함한 보행자가 안전하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개념이다. 과속방지턱과 조경 식재 등을 이용한 지그재그식 도로 등이 이때 처음으로 개발됐다.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보너르프 지역에서 차량 속도를 줄였다.

 보너르프의 핵심은 단순히 보행자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도로의 전부를 자동차가 아닌 보행자에게 돌려준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 맞도록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연석이나 안전 펜스 따위가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통행을 아예 막지는 않는다. 델프트 시의 얀키스 베러스트 도시교통 수석고문은 “보너르프는 차량의 움직임에 면죄부를 주는 보도와 차도 간의 구분이 없고, 사람들이 도로의 전부를 사용해 친목 도모나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며 “차량도 물론 통행할 수 있지만 시속 15km의 엄격한 속도 제한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시속 15km는 성인이 일반 도로에서 자전거를 탈 때 내는 평균 속도다. 이마저도 보행자가 있을 때는 보행 속도 이상 주행 금지로 더 엄격하게 바뀐다.

 델프트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보너르프는 1976년 네덜란드 정부에 의해 법적인 지위를 갖게 됐다. ‘보너르프 지역 도로에서 놀아도 된다’는 도로교통법 개정안도 이때 나왔다. 현재 네덜란드 내에 6000곳 이상의 보너르프가 지정돼 있다. 전체 인구의 20%가 보너르프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 전 세계로 확산된 보너르프

 
보행자와 공놀이를 하는 어린이가 전면에 있고 뒤로는 자동차가 그려진 보너르프 지역 안내 표지판은 네덜란드뿐 아니라 세계 대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자동차 통행 폭증이라는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던 선진국 대도시에 속속 전파됐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한국과 이웃한 일본의 ‘커뮤니티(Community) 도로’다. 일본 역시 1970년대 들어서면서 자동차로 인한 보행자 사망 사고가 빠르게 늘어났다. 이를 줄이기 위해 육교와 안전 펜스 등을 정비했다. 하지만 주거지역의 좁은 도로에서는 적용이 어려웠다. 보도와 차도를 분리해도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는 좁은 보도만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보너르프가 해법으로 소개되면서 보행자가 우선하는 보행자-차량 공존 도로인 커뮤니티 도로가 1982년 오사카(大阪) 시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영국의 ‘홈 존(Home zone)’도 보너르프의 영향을 받았다. 주거지역 가로를 보행자가 우선 사용하고 자동차 통행은 다음 순위로 두는 보너르프의 원칙을 그대로 수용했다. 홈 존의 설계 지침에는 “도로에서 운전자들이 스스로 ‘방문객’으로 느끼도록 하고, 시속 10마일(약 16km) 이상의 속도로 운전하기 어렵도록 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밖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템포30존(Tempo 30 zone)’, 호주의 ‘셰어드 스페이스(Shared space)’ 등도 보너르프를 본떠 만든 주거지역의 보행자 우선 도로다.

 킵스 매니저는 “보너르프가 주거지역뿐만 아니라 상점가나 학교 근처에서도 성공적으로 운영되면서 보행자 우선 도로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며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시작하면 점점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델프트=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도시#네덜란드#보행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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