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경주시, 황룡사지 공사 독촉이 빚은 통일신라 유구 훼손 사건 전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3일 03시 00분


코멘트

3월 설계 변경하면서 “6월에 끝내라”

22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역사문화관’ 공사 현장. 앞쪽 구덩이에 묻혀 있던 신라시대 추정 유구가 최근 공사 과정에서 훼손됐다.
 최근 내린 비로 구덩이에 물이 차 추가 훼손이 우려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2일 경북 경주시 ‘황룡사 역사문화관’ 공사 현장. 앞쪽 구덩이에 묻혀 있던 신라시대 추정 유구가 최근 공사 과정에서 훼손됐다. 최근 내린 비로 구덩이에 물이 차 추가 훼손이 우려된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국가사적 6호로 지정된 신라시대 최대 사찰 터인 황룡사지를 둘러싼 훼손의 전말이 드러났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부대시설 공사가 진행되면서 통일신라 유구(遺構·옛 건물의 흔적)가 훼손된 과정에는 무리한 공사 기간 단축과 전문성이 없는 관리 인력, 법을 무시한 행정 등의 문제점이 겹쳐졌다. 22일 문화재청과 경주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해 3월 역사문화관 내 경계 석축 공사와 관련해 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했다. 그러나 인사로 담당 주무관이 바뀌면서 한동안 잊혀졌다가 올 초 새로 부임한 담당자가 자문 서류를 찾아내 3월 경계 석축 공사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경주시는 올해 3월 설계변경을 추진하며 “공신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공기(工期) 연장은 안 된다. 올 6월 개관 예정에 맞춰 공사를 진행하라”고 시공업체에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경계 석축이 포함된 설계 변경이 급하게 추진돼 최근 바뀐 도면이 시에 제출됐다.

문제는 경주시가 이 변경안을 신라왕경추진단이나 문화재위원회에 보고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결국 11일부터 굴착기로 깊이 1.5m의 구덩이를 파다가 신라시대 유구를 훼손하게 됐다.

경주시 담당 공무원들의 잦은 인사로 황룡사지 복원 공사가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룡사 역사문화관 담당자(주무관)의 경우 공사 기간 중 8번이나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올 초 담당 공무원이 새로 오면서 문화재 관련 규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주시 관계자 역시 “실무자와 책임자 모두 공사 마무리 단계에 인사 발령을 받아 업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문화재 전문 감리업체가 현장 사무실에 상주해 있었는데도 문화재보호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공사가 벌어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발주처인 경주시의 독촉에 감리업체가 사실상 불법을 묵인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온다.

한편 경주시는 이번에 유구를 훼손한 공사의 진행 사실을 몰랐다는 입장이다. 시공 업체가 자의로 터 파기 공사를 진행했다는 주장이다. 이상일 경주시 신라왕경2팀장은 “설계 변경을 추진했지만 공사가 시작된 것을 몰랐다”며 “공기를 연장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시공 업체가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이어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은 느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문화재계에서는 황룡사지뿐 아니라 경주 일원의 여러 복원 정비 과정이 ‘속도전’ 양상이라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월성, 동궁, 월지 등 ‘신라 왕경 8대 핵심유적 복원 정비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올해 3월부터 월정교 문루 복원 공사에 들어갔고, 12월부터는 월성 해자 복원 공사에 착수한다.

문화재계의 한 관계자는 “경주 복원 정비 사업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 분야에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며 “현 정부 임기 안에 예산을 최대한 따내기 위해 경주시가 속도를 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경주는 온통 공사판이나 다름없고, 이번처럼 어이없는 사고도 벌어졌다”고 말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경주시#황룡사지#유구훼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