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김상운 동아일보 경제부 김상운 기자 공유하기

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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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 어떻게 볼 것인가[김상운의 빽투더퓨처]최근 ‘홍범도 장군 논란’을 계기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국방부가 육사 충무관 앞에 설치된 홍 장군의 흉상을 이전하겠다고 밝히자, 이종찬 광복회장이 장관 사퇴를 요구하며 거세게 반발했죠.6·25 전쟁 이후 반공(反共)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참으로 미묘할 수밖에 없는데요. 하지만 이들의 항일활동에만 주목하고 공산주의 경력은 못본 채 하는 것도 온전한 역사적 평가는 아닐 겁니다. 앞서 ()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다뤘다면 6회에서는 그 대척점에 있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좌익 독립운동가들 그들은 누구였나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지금 북한의 주체사상 신봉자들과는 달리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본 유학생, 기자, 러시아·만주 이주민 등 공산주의를 처음 접한 경로가 다양했던데다 ‘민족 해방’이 우선이냐, ‘노동계급 해방’이 우선이냐를 놓고도 각자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후자는 1980년대 운동권의 이른바 NL-PD 논쟁을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이처럼 다양한 배경은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서울청년회’ ‘화요회’ ‘북성회’ 등 숱한 공산주의 파벌을 낳은 원인이 되죠. 사실 분단 이후 북한에서 공산주의 패권을 차지한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항일운동 세력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홍범도·김좌진 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죠. 따라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현재의 관점으로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를 평가한다면 편견이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흥미로운 건 북한이 김일성을 제외한 나머지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운동가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 역사학계는 “1920년대 후반 들어 노동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이 급속히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제약성과 결함들로 인해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을 통일적으로 지도하지 못했다. 이런 결함과 약점들이 생긴 기본적 원인은 바로 공산당의 무원칙한 파벌투쟁 때문”이라는 비판을 내놓고 있습니다(김인걸 <1920년대 맑스〮레닌주의의 보급과 로동운동의 발전> 1964년, 조선로동당출판사)한마디로 공산주의 세력간 파벌투쟁으로 인해 민족해방 및 노동해방 전선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겁니다. 김일성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거치며 소련파,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숙청하고 유일 지배체제를 수립한 뒤에야 이런 평가가 북한에서 나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남한 역사학계는 북한의 지적이 사실에 부합하는 측면(파벌 투쟁에 따른 운동 역량 약화)도 있지만, 이보다는 만주에서 활동한 김일성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국내 공산주의 운동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하 심지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인식과 논리> 2015년, 백산서당 참조) 이는 항일 무장투쟁의 적통을 김일성으로 단일화함으로서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죠.이들은 왜 공산주의에 빠졌나좌익 독립운동가들은 왜 공산주의 사상에 몰두하게 되었을까요. 20세기 초반 당시 조선뿐 아니라 반식민지 상태에 놓인 중국,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등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민족 상당수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민족 해방, 노동 해방을 기치로 내건 공산주의가 제국주의 타파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여기에는 세계 공산화를 추구한 소련의 지원도 한몫했습니다.일례로 1922년 1월 소련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극동 민족대회’를 열고 서구 제국주의를 성토하며 아시아 민족 해방을 지지합니다. 이 대회에는 총 136명의 아시아 각국 대표가 참석했는데, 이 중 조선이 52명으로 중국(37명), 일본(16명), 몽골(14명), 부리야트(4명), 자바(1명) 칼미크(1명) 등을 제치고 가장 많은 인원을 파견했습니다.조선이 이처럼 극동민족대회에 높은 관심을 쏟은 건 직전 미국에서 열린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에 대한 실망감이 작용한 영향도 있었습니다() 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죠.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소련의 지원을 얻고자 공산주의에 접근하는 결과를 낳게 되죠.소련도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당초 1921년 11월로 예정돼 있던 극동민족대회 일정을 일부러 이듬해 1월로 연기하죠. 아시아인들에게 실망스런 결과를 안길 미국 워싱턴회의를 지켜본 뒤 이를 비난할 기회를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셈이죠. 이후 소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모스크바 유학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운동 지침까지 내리게 됩니다.소련 추종이 낳은 비극여러 지원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소련은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해악을 끼쳤다는 게 학계의 평가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신간회 해체와 자유시 참변입니다.1927년 2월 창립된 신간회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민족 유일당’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 조직이었습니다. 일제에 대한 투쟁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양 진영이 대립하기보다 힘을 합쳐야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죠. 조선일보 계열 신석우와 사회주의 계열 신채호 등 34명이 모여 조선 민족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신간회를 발족합니다.이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민족차별을 성토하며 법률 지원에 나서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쟁취, 여성 형평운동, 동양척식회사 반대 등 다양한 활동을 벌입니다. 이에 1930년 무렵 전국 약 140개 지회에 걸쳐 4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을 확보하면서 일제의 본격적인 감시와 탄압에 직면하게 되죠.결정적인 위기는 1929년 12월에 찾아옵니다.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한다는 걸 눈치 챈 일제가 허헌, 홍명희, 조병옥 등 지도부 44명을 한꺼번에 잡아들인 겁니다. 이에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의 민족주의자들로 새로운 지도부가 꾸려졌는데, 이때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이들을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신간회 해체를 주장하죠. 그런데 이때 이들이 해체의 근거로 삼은 게 소련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국제 노동조합)의 지침이었습니다.코민테른은 1928년 12월 테제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분파주의를 비판하면서 조선공산당 해체와 민족주의자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폭로를 지시합니다. 이어 프로핀테른도 1930년 9월 테제를 통해 광주학생운동 등의 대중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자치를 약속하며 민족개량주의 부르주아를 매수하고 있다고 주장하죠.이에 코민테른 노선을 추종한 신간회 내 공산주의자들은 일제에 타협적인 개량주의자들이 지도부를 장악해 투쟁 의욕이 사라졌다면서 해체론을 제기합니다. 결국 신간회는 1931년 5월 본부 대의원회의 투표를 거쳐 창립 4년 만에 전격 해체되는 비운을 맞습니다.일제 타도를 외치던 코민테른이 일제가 그토록 집요하게 탄압한 신간회 해체에 일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거죠. 일제와 코민테른 모두 조선인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행동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신간회와 같은 좌우 합작의 독립운동 단체는 출현하지 못합니다. 좌우 분열로 독립운동 역량이 약화되는 결과를 빚은 거죠.소련의 이런 일방주의적 행태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에서도 드러납니다. 러시아화 된 고려인들 위주로 구성돼 소련의 지지를 확보한 고려혁명군정의회가 통합 부대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기를 든 독립군을 공격한 사건입니다. 당시 일본군에 쫒기던 간도 독립군 부대들은 무기와 식량을 공급받고,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부대와 힘을 합치기 위해 러시아 땅으로 들어온 상황이었죠(이하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2017년 한국사연구 178집 참조)참변 직후 소련은 홍범도 장군을 재판위원으로 끌어들여 생존한 독립군 부대원들을 처벌합니다. 홍 장군은 공정한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에 참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생존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당시 그의 결정을 간도 독립군부대에 대한 배신으로 여긴 조선인 2명이 1923년 8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홍 장군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홍 장군은 레닌에게 하사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한 뒤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를 받고 석방됩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는 독립군 부대를 이끌지 못하죠.사실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소련 추종은 이웃 중국 공산주의자들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주의자들도 초기에는 모스크바 유학파를 중심으로 코민테른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행태를 보입니다. 하지만 1935년 1월 ‘쭌이(遵義)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토종파가 소련파를 제압하고 당권을 쥐면서 독자 노선을 걷게 되죠(이하 박노자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2021년, 나무연필 참조)마오쩌둥은 당시 당권을 쥔 왕밍 등 소련파의 노선이 중국 실정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비대중적인 방침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후 마오쩌둥은 국민당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라는 스탈린의 요구를 거부하고 내전을 벌이게 되죠.결국 중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소련 추종은 독자 노선이나 방침이 없었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조선 공산주의자로서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한 한위건의 발언에서도 확인됩니다. 한위건은 “조선의 마르크스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외국의 선진 이론을 재빨리 수입한 것이지,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습니다.소련 ‘패권주의’에 이용된 측면사실 소련은 조선 공산주의자들을 자신들의 패권 추구에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게 학계의 시각입니다. 12월 테제로 신간회 해산을 지시한 코민테른이 불과 7년 뒤 1935년 7차 대회에서 민족 부르주아와의 협력으로 노선을 다시 변경한 게 대표적입니다.이에 대해 소련이 극동지역에서 일제와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자국 이익을 중심에 놓고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 접근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이하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2015년, 돌베개 참조)실제로 1922년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등 극동지역에서 안보 위협이 해소되자, 소련은 고려공산당과 독립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본이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극동에서 팽창주의를 추구하자, 위협을 느낀 소련은 기존 노선을 바꿔 조선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 부르주아와의 통일전선 구축을 지시하죠.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 핵심이던 ‘좌우 합작’ 노선을 조선의 내부 사정보다는 소련의 국익을 앞세워 결정한 겁니다.이처럼 소련의 자국 이기주의와, 이런 소련의 방침을 추종한 행태로 인해 일제강점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난관에 부닥친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네 차례에 걸친 일제의 대대적인 지도부 검거 등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조선공산당은 해방 전까지 재건되지 못하죠.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투쟁을 벌인 데 대해선 김일성과는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9-18 11:00
‘에너지정책 탈정치화’ 국가 미래 보장한다[광화문에서/김상운]“요즘 신재생에너지 행사에서 정부 관계자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최근 기업계 인사가 “신재생이 현 정부의 ‘적폐’로 낙인찍힌 사실이 실감난다”며 건넨 말이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강경성 2차관은 지난달에만 ‘원전 수출 일감 설명회’ 등 원전 관련 행사 3곳을 직접 방문했다.하지만 이 기간 강 차관은 신재생에너지 관련 행사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비현실적인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태양광 보조금 비리 등 신재생에너지 거품을 제거하겠다는 정책 방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그러나 에너지 주무 부처인 산업부 고위 당국자의 신재생에너지 행사 참여가 뜸할 정도로 관련 정책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은 것은 우려되는 대목이다. 폭염 등 세계적 기후 위기로 ‘탄소중립’이 각국 에너지 정책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어서다.당장 다음 달부터 유럽연합(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시행됨에 따라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품목을 유럽에 수출하려면 분기별로 탄소배출량을 당국에 보고해야 한다. 원전과 신재생은 국가 에너지 정책의 쌍두마차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에너지 정책의 정치화가 낳은 폐단은 이명박 정부의 ‘자원 외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등을 동원해 해외 주요 유전, 광산 등에 대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장기 투자가 필수인 광물자원 특성상 조기에 수익을 거두지 못하자, 문 정부는 자원 외교를 ‘적폐’로 규정하고 광물자원공사의 11개 해외 자산을 한꺼번에 매각했다. 2012년 219개였던 해외 광물 개발사업은 2021년 94개로 급감했다. 이 과정에서 우량 광산이 헐값에 팔렸다는 지적이 나왔다.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해외 자원개발은 최근 효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가스공사가 약 2조 원을 투자한 호주 프렐류드 가스전은 2019년 생산 개시 이후 2020년까지 적자였지만 이듬해 흑자로 바뀌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값이 급등해 이 가스전의 가치는 크게 올랐다.2009년 확보해 총 8500억 원이 투입된 파나마 코브레파나마 구리 광산도 최근 자원무기화 흐름과 맞물려 매년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이 광산 역시 문 정부가 매각을 추진했지만 2021년부터 수익이 나자 이를 철회했다. 미중 갈등과 맞물려 공급망 안정화가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해외 광물자원 개발은 이제 필수가 됐다.에너지 정책의 정치화는 전기요금 책정에까지 마수를 뻗고 있다. 문 정부 내내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에도 여론을 의식해 전기료 인상을 억제한 결과, 한전은 부채만 201조4000억 원(올 6월 말 기준)에 이르는 부실 덩어리가 됐다. 전문가들은 원가를 반영한 요금 인상 외에는 한전 부실을 털어낼 묘안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내년 총선을 앞둔 정부와 여당이 올 4분기 전기요금을 올리기 힘들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문 정부가 넘어간 포퓰리즘이라는 ‘악마의 유혹’이 현 정부의 전기요금 정책에도 넘실거리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정책만은 정권의 부침(浮沈)과 상관없이 ‘탈(脫)정치’의 영역에 속해야 국가 미래가 보장될 수 있다.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2023-09-14 23:42
‘벼랑 끝 전술’로 한미동맹 쟁취한 이승만… 왜?[김상운의 빽투더퓨처]“철통같은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으로 이어진 우리 각각의 양자관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며, 우리의 3자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우리는 한미동맹과 미일동맹 간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고, 3국 안보 협력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굵은 글씨는 기자가 표시)지난달 18일(현지 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3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성명(The Spirit of Camp David: Joint Statement)의 일부입니다. 한미일의 첫 정상회의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이번 회의에서 3국 협력의 핵심 기반은 한미·미일동맹임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78년 동안 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역외 패권국인 미국이 한국, 일본, 필리핀, 호주 등 지역국들과 개별적으로 맺은 양자조약을 중심으로 구축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미동맹은 1953년 6.25 전쟁 휴전 이후 70년간 한반도에 장기 평화를 가져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또 미국의 안보 보장을 바탕으로 국방비에 투입되어야 할 재원을 경제개발로 돌려 1970년대 고도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죠. 실제로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197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 비중은 남한(3.7%)이 북한(11%)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북한의 대규모 군비 지출은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수십 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그렇다면 한미동맹의 실체인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어떤 과정을 거쳐 체결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반공투사로 나아가는 과정을 다룬 에 이어 5회는 예고해 드린 대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한국 경시, 일본 중시의 美 동아시아 전략관역사를 들여다보면 한국 입장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쟁취했다’는 표현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부터 6.25 전쟁 직전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과의 동맹은 우리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웠습니다. 미국 정부는 고종과 이승만의 동맹 요청을 거듭 뿌리치며 한사코 거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이는 미국이 19세기 개항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시한 반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낮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기 위해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交通商條約)을 맺습니다. 고종은 이 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 조항(‘만일 각국이 일방 정부에 대해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함으로서 우의를 표해야 한다’)을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받을 경우 미국이 군사·외교적으로 도와준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합니다(이하 유영익 <한미동맹 성립의 역사적 의의: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휘보 제128호, 2005 참고)이에 따라 고종은 1885년 영국 해군의 거문도 점령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미국 정부에 거중조정을 거듭 요청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존 셔먼 미 국무장관은 1897년 11월 19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앨런에게 “우리 정부는 한국의 국가 운명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한 상담역이 될 수 없다. 또 한국과 어떠한 종류의 ‘보호 동맹’도 맺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합니다. 고종이 미국을 동맹으로 여기지 않도록 철저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지시한 거죠.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배신’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이듬해인 1905년 8월 4일 이승만은 고종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납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입각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죠.이에 루스벨트는 “정식 외교 경로로 문서를 제출하면 러일 강화회의 때 이를 내놓겠다”며 우호적으로 답하지만 그건 한낱 외교적 수사에 불과했습니다. 이승만이 루스벨트와 만나기 5일 전 미국은 이미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를 인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으로 인해 이후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불이행을 틈날 때마다 언급해 도덕 외교에 호소하는 전략을 취합니다.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본 미국의 태도는 해방 이후에도 유지됩니다. 6.25 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미군의 남한 철수가 대표적입니다. 이미 1947년 후반부터 미 군부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서 주둔비용 부담을 들어 조기 철군을 주장한 데 따른 겁니다(이하 김일영 <이승만 정부에서의 외교정책과 국내정치: 북진 반일정책과 국내 정치경제와의 연계성> 국제정치논총, 2000 참고) 당시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들어 미군 철수를 강하게 반대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대안으로 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요구하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죠.6.25 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된 1950년 1월의 ‘애치슨 라인’ 발표도 같은 맥락입니다. 미국은 태평양 방위구역선에 일본과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은 제외합니다. 이는 김일성과 스탈린이 전쟁을 계획하면서 남침 시 미국의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오판한 근거가 됩니다.미국이 상호방위조약 체결 꺼린 이유미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비대칭 동맹조약’의 속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큽니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에 체결되는 비대칭 동맹조약은 이른바 ‘방기(abandonment)와 연루(entrapment)의 딜레마’를 겪기 마련입니다. 동맹을 맺고도 안보위기 시 도움을 받지 못할 수 있는 위험이 방기라면, 연루는 동맹으로 인해 원치 않는 갈등(전쟁 등)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양자 동맹에서 상대적 약소국이 방기의 위험을 두려워한다면, 상대적 강대국은 연루의 위험을 두려워하죠. 미국은 약소국 조선(해방 이후 대한민국)과의 동맹조약 체결에 따른 비용(연루의 위험)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한 겁니다.대외관계에서 개입과 고립을 오간 미국의 외교 전통도 한몫했습니다. 1823년 먼로 독트린으로 유럽에 대해 고립주의 외교를 천명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개입으로 급선회합니다. 하지만 늘 실리를 따지는 미국답게 과도한 개입을 통한 군비 확장 등의 비용은 경계하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처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체코 등 중부 유럽을 점령한 미군을 철수시킨 게 대표적입니다(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 까치, 2016 참고) 당시 처칠 영국 총리는 얄타 회담 이후 노골화된 스탈린의 팽창주의에 맞서려면 미군의 유럽 철수를 최대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과의 갈등을 피하고 국민들의 철군 여론을 충족시키기 위해 철수를 단행합니다.양자동맹의 근간인 현실주의 외교에 대한 미국의 혐오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사국 누구도 예상치 못한(그리고 누구도 원하지 않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많은 인명 피해를 입은 미국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현실주의 외교를 혐오하게 됩니다(이하 헨리 키신저 <Diplomacy> 2013 참고)대신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평화를 추구하면서 집단안보를 통해 공동의 적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접근을 선호하게 되죠. 이에 따라 미국은 양자동맹을 통한 세력균형이라는 유럽 대륙의 전통적인 안보 보장을 기피하게 됩니다. “내가 아는 한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대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는 1949년 5월 초대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의 발언이 나온 배경입니다.승부사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자 그럼 대한제국 시절부터 미국에 줄기차게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한 동맹조약이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71년 만에 체결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미소 냉전이 주변부에서 최초의 열전 형태로 발화한 6.25 전쟁과 더불어 이승만의 집요한 외교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계를 6.25 전쟁 발발 전후로 돌려보겠습니다.이승만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부터 북진통일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당시 북한과 상대가 되지 않은 남한의 군사력에 비춰보면 허황된 발상이라는 반발을 사죠. 하지만 그의 북진통일론은 국내 정치 목적과 대미 외교용의 두 가지 포석을 노린 전략이었다는 게 최근 학계의 평가입니다. 국내 정치 측면에서는 당시 한독당 등이 주장한 남북협상론에 대응해 국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겁니다. 동시에 미국에 대해서는 미군 철수를 늦추거나, 철수에 따른 안전보장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긴장을 높였다는 거죠.무엇보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이 미국을 움직이는 데 크게 이바지합니다. 그의 승부사 기질은 북중 연합군과 유엔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3월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당시 그는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만이 한국인들에게 휴전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만약 미국이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한국군은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에 나서겠다고 위협합니다. 중공군 참전에 따른 전사자 급증으로 반전 여론이 강해진 미국은 휴전 등 출구전략을 모색 중이었는데, 이승만의 발언에 적지 않은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아이젠하워 집권 직후인 이듬해 5월 브리그스 주한 미국대사가 상호방위조약 대신 한국군 증강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이승만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유엔군을 철수시켜도 좋다.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며 재차 미국을 압박합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그해 6월 6일 휴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필리핀과 맺은 조약에 준하는 방위조약 체결 협상 개시를 통보합니다. 아이젠하워의 양보에도 이승만은 더 강하게 밀어붙이죠. ‘미군 주둔’을 규정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강력한 방위조약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이에 그는 아이젠하워의 서한을 받고 열흘 뒤인 1953년 6월 16일 미국과 아무런 상의도 없이 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강수를 둡니다. 한국이 원하는 수준의 안보 보장 없이는 휴전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당시 치열한 이데올로기 선전의 각축장이었던 반공포로 이슈에서 이승만의 독단적인 결정에 직면한 미국 정부는 극도의 분노에 휩싸입니다.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는 작전계획(Plan Ever-ready) 실행까지 검토할 정도였죠. 하지만 결국 미국은 다시 한번 물러섭니다.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를 서울로 급파해 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겁니다.당시 로버트슨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shrewd) 지략이 뛰어난(resourceful)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국가적 자살행위(national suicide)로 몰고 갈 수 있는 광적인 인물(fanatic)이지만 회유와 압력을 통해 협력을 얻어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고했습니다.하지만 이승만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버트슨이 제시한 조약 초안에 한국이 무력 공격을 당할 경우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조항이 빠진 사실을 지적하면서 다시 한번 미군 주둔을 허용한 미일 안보조약 수준의 안보 공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비대칭 동맹조약에서 약소국의 ‘방기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죠.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로버트슨은 본국 훈령을 받아 한국 내 미군 주둔 조건을 수용하기로 하고, 대신 한국군의 단독 행동 포기와 휴전 협조를 이승만에게 요구합니다. 이와 함께 전후 복구를 위한 경제 원조와 한국군 전력 증강 등을 약속하죠. 이승만이 그토록 원한, 대한제국 시절부터 숙원이었던 미국과의 동맹조약이 사실상 이뤄진 순간입니다.이승만이 줄기차게 강조한 미국의 자동 개입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제4조의 미군 주둔 조항(‘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을 통해 사실상 달성됩니다. 주한미군의 ‘인계철선(引繫鐵線)’ 기능을 통해 유사시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죠.미군 주둔 조항이 독립국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침해했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도 있지만, 사회주의 양대 강국이던 소련,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의 침략에 맞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요.“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9-04 11:00
중국 경제위기 본질은 사회주의 독재 리스크[광화문에서/김상운]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일당 독재국가 오세아니아에서 과거의 신문기사를 수정, 조작하는 일을 한다. 당과 수령(빅브러더)의 ‘무오류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웰은 기록 조작, 문서 검열, 감시의 일상화 등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 사실 사회주의 독재국가들에서 최고 지도자의 무오류성에 대한 집착은 공통된 현상이다. 북한에서는 2013년 장성택이 반역 혐의로 처형된 후 신문, 방송 등에서 그의 사진과 기록이 삭제됐다. 당과 군을 주무르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2인자가 하루아침에 존재하지도 않은 인물이 된 것이다. 후계체제 구축의 일등공신인 장성택에게 권력을 몰아준 김정은이 입장을 180도 바꿔 그를 제거한 통치 모순을 해소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3연임을 확정하며 장기 집권의 길을 연 시진핑의 중국도 최고 지도자의 무오류성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이 대표적이다. 상하이 등 중국 주요 도시 봉쇄로 지난해 2분기 경제성장률이 0.4%로 급락하는 등 위기에 직면했지만 시진핑은 기존 방역 정책을 고수했다. 방역 완화가 필요하다는 중국 내 전문가들의 의견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시진핑은 올 초 연설에서 “3년간 코로나에 대한 관리를 엄격히 시행한 것은 ‘정확한 선택’이었다”고 못 박았다. ‘시 황제의 무오류성’은 이제 대가를 치르고 있다. 3년의 팬데믹 기간에 과도하게 위축된 소비와 생산이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 이후에도 살아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지난달 소매판매와 산업생산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5%, 2.7% 증가에 그쳐 시장 기대치를 크게 밑돌았다. 이에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3%로 2년 5개월 만에 마이너스 전환하는 등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문제는 경기 부양에 나서야 하는 중국 정부의 ‘거버넌스 리스크’다. 중국 정부는 올 6월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인 21.3%에 달하자 지난달부터 해당 통계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가경제에서 가장 기본인 고용통계조차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단한 것이다. 앞서 팬데믹 기간 중국의 코로나 확진자 및 사망자 통계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해 12월부터 관련 통계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해 논란이 됐다. 지배집단의 무오류성을 위해 기록(통계)마저 은폐, 왜곡하는 사회에서 건전한 정책 비판을 통한 환류(feedback)는 불가능하며, 이는 정책 실패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최근 중국 부동산발 경제위기도 같은 맥락이다. 국제금융센터의 보고서(중국 부동산시장 전망 및 리스크 평가)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발표한 은행 부실채권(NPL) 비율은 2018년 3분기 1.9%에서 올 1분기 1.6%로 낮아졌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실제 부실 규모가 정부 통계의 약 5배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외신들은 부동산 대출이나 지방정부 채무에 숨겨진 리스크가 상당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은 만큼 사회주의 독재체제의 무오류성에 감춰진 리스크를 직시하고 더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2023-08-25 23:36
이승만은 왜 ‘반공 투사’가 되었는가[김상운의 빽투더퓨처]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싼 재평가 논란이 뜨겁습니다. 9일에는 백범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죠. 이날 독립유공자 오찬에서 김미 김구재단 이사장(백범 손녀)이 “이승만 전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힘을 합쳤었는데 후세 일부가 이간질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자, 윤 대통령이 “백범은 공산주의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신 분이다. 어떻게 이 전 대통령의 적이 될 수가 있었겠느냐”고 답했다는 겁니다.지난달에는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 동상 제막식을 놓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일부 단체들이 “4.19 혁명으로 쫓겨난 독재자를 기리는 건 역사 부정”이라고 반발한 거죠.이명박 정부 당시 건국절 논란과도 이어지는 이승만 재평가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입니다. 1960년대 그의 장기 독재와 하야는 교과서에도 자세히 수록된 만큼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그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이후 6.25 전쟁 시기까지의 행적을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유라시아 공산화와 이승만의 반공주의“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 동안 인민군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동안 남쪽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공산군의 현재 수준에 대응할 만한 병력을 (남한이) 건설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아주 손쉽게 그 병력을 남한으로 투입시키고 한순간에 여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백범-류위완(劉馭萬) 대화록)1948년 7월 11일 김구가 자택을 찾아온 류위완 유엔한국위원회 중국 대표공사에게 건넨 대화입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유라시아 대륙에서 급속하게 진행된 공산화의 파고가 한반도에도 들이닥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 백범의 시각이 담겨있습니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그해 백범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김일성을 만나러 38선을 넘은 것도 이 같은 정세 판단에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죠. 이런 백범의 현실 판단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두고 영미 연합국과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 소련은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인민전선 전술’을 동시다발로 구사합니다(이하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북한체제의 수립과정> (1991) 참조)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쳤죠.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잇달아 수립한 겁니다.이 같은 소련의 적화 방식은 북한에도 적용됩니다. 소련 군정이 초창기 조만식 선생 등 민족주의 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한 시도(소련군은 건준 대신 세운 임시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조만식을 추대)가 대표적입니다.이에 대해 이미 해방 전부터 확고한 반공 노선을 견지한 이승만은 김일성과의 타협을 일절 거부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벌일 당시인 1923년 에 기고한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공산당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사유재산 부정, 자본가 부정, 지식계급 부정, 종교 부정, 국가 부정은 부당한 것”이라고 못 박습니다.해방 직후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주한 가운데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상황에서 이승만은 꿋꿋이 반공을 고수하죠. 그의 이런 확고한 반공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반공 투사’ 이승만의 탄생이승만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딱 두 가지만 고른다면 아마도 ‘미국’과 ‘기독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양녕대군 16대손으로 유학(儒學)을 신봉하는 양반가 자제였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기 때문이죠. 사실 반공주의 원칙은 이 두 요소에서 비롯됐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미국’, ‘기독교’와의 첫 조우는 1895년 그의 나이 스물에 입학한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이하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2019, 청미디어) 참고) 연이은 과거 낙방으로 잠시 방향을 잃은 그에게 1894년 청일전쟁은 커다란 충격을 안깁니다.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데다 일본이 대국 청나라를 꺾는 모습을 보고 유학 공부를 중단한 뒤 서양 신학문 학습에 나서죠.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한양에 설립한 배재학당은 각국 외교관, 무역회사 자제들이 공부하는 일종의 미국식 국제학교였습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영어학습에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입학 6개월 만에 영어반 보조교사로 발탁됩니다.특히 당시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면허증을 따고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맡았던 서재필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죠.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개신교 선교사들, 서재필 등과 교유하면서 미국식 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평생에 걸친 미국과의 깊은 인연이 여기에서 시작되죠.배재학당 졸업 후 1899~1904년까지 5년 7개월 동안 대한제국 한성감옥에 수감된 경험도 이승만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됩니다. 당시 중추원 의관이던 그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이강을 새로운 군주로 옹립하려는 급진 개화파 박영효의 정치개혁에 가담했다가 종신형을 선고 받습니다.목에 10kg에 달하는 무거운 칼을 쓰고 사형의 위기를 맞은 한계 상황에서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동료 죄수들과 성경 공부를 하면서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데 이어 옥중학교를 세우고 죄수와 간수들을 대상으로 한글, 한문, 영어, 수학, 국사, 지리 등을 가르치죠. 평생 정치인이자 기독교 교육가로 활동한 그의 이력이 이 감옥에서 처음 시작된 겁니다.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옥중 도서실을 만들어 영어, 한문으로 쓰인 많은 책들을 탐독하고 400쪽에 이르는 책(<독립정신>)을 저술하기도 합니다. 그는 훗날 영문 자서전에 “나는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 영원히 감사한다”고 썼습니다.당시 극동지역으로 팽창하던 러시아에 대한 지정학적 위기감도 그를 반공투사로 만든 요인 중 하나입니다(이하 김명섭 등 <20세기초 동북아 반일(反日) 민족지도자의 반공(反共):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권 2호(2013) 참고)그는 <독립정신>에서 “1859년 러시아-터키 전쟁에 서양 열강들이 간섭해 서쪽으로 길목이 막히자 러시아가 동쪽으로 눈을 돌려 우리의 위급함이 조석에 달렸다. 속히 러시아의 무도함을 꺾어 동양으로 뻗어 나오는 세력을 막아야 동양 각국도 안전함을 얻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한 위기감은 조선뿐 아니라 청, 일본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을 잇는 소련 공산당의 팽창주의도 이승만의 시각에선 ‘제국주의 침탈’로 해석됐고, 이는 2차 대전 이후 동유럽 각국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이승만은 무장항쟁 이상으로 외교전이 독립 쟁취에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태평양전쟁 직전까지 세계 3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강대국 일본에 소규모 무장항쟁으로 맞서는 건 한계가 있다고 보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국에 설득하기로 한 거죠.이는 일찍이 1920년대부터 일본이 반드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거라고 내다본 그의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딴 그의 식견은 약 20년 뒤 역사적 사실로 나타납니다.그는 특히 대미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미국이 여론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언론, 시민사회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꾸준히 설득하면 미국 정부의 정책도 바뀔 수 있다고 본 거죠(이하 김명섭 등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한국정치학회보 51집 2호, 2017) 참고)이 과정에서 배재학당 때부터 구축된 기독교 네트워크는 그의 민간, 공공외교에서 큰 자산이 됩니다. 청교도 정신으로 건국된 기독교 국가답게 미국 정치권은 기독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죠.그렇다면 한국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보장한 1943년 카이로선언이 나오기까지 일제강점기 이승만의 독립 외교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1920, 30년대 이승만의 외교전은 1921~22년 워싱턴회의와 1933년 만주사변에 대한 국제연맹 특별회의를 핵심 축으로 전개됩니다. 그럼 시계를 당시로 돌려보겠습니다.워싱턴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국제질서를 규정하는 중요한 국제회의였습니다.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억제하고 동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한 미국의 의도가 반영된 회의였던 만큼, 이승만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독립 외교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이에 따라 이승만은 먼저 1921년 3월~1922년 1월까지 약 1년간 267개 미국 신문에 게재된 1009개의 한국 관련 기사들을 수집합니다. 미국 정부의 외교 방침을 명확히 이해하고 현지 언론을 외교전에 활용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또 한국 독립문제를 미 의회에서 다룬 바 있는 토마스 찰스 전 상원의원 같은 정계 인사를 특별고문으로 영입합니다.그러나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목표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미 정부가 1차대전 승전국이던 일본을 의식한 탓에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한국 문제가 공식 의제로 다뤄지지도 않은 겁니다.하지만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일병합이 한국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고, 일본의 식민 지배는 한국에 혜택을 주었다’는 일본 주장에 맞서 “한일병합은 강제로 이뤄졌고, 한국인들은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임정의 입장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신문의 대중 영향력이 매우 컸기에 독립 외교에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것으로 평가됩니다.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열린 1933년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이승만의 외교전은 워싱턴회의 때보다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미국과의 대립 구도가 확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미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일본 대륙 침략의 교두보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재평가될 수 있었죠.이승만은 이 같은 미일 간 균열을 독립 외교에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이하 김정민 등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 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2019) 참고) 그의 이런 의도는 국제연맹 회의가 열린 제네바로 출국하기 직전에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잘 드러납니다.“극동 문제는 한국인의 권리와 요구를 다루지 않고는 결정적 해답을 찾을 수 없다. 한국은 일본이 대륙으로 가는 교두보(stepping stone)이므로 일본은 극동에서의 전략적 거점을 차지한 것이다. 한국 문제는 현재 극동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결정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일본의 완전한 통치하에 있으며 만주 문제의 현안 범위에 속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대륙 침략 문제는 열강들의 보장 하에 완충국 한국이 정상적인 위치로 회귀 되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1933년 2월 ‘The Korean Student Bulletin’의 이승만 인터뷰)당시 이승만에 대한 임정의 태도가 바뀐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앞서 임정은 워싱턴회의 외교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한 뒤 1925년 3월 11일 그를 대통령직에서 탄핵합니다.그랬던 임정이 국제연맹 회의 직전, 이승만을 특명전권 수석대표로 임명하고 그를 지원하게 됩니다. 미일갈등 구도 등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안해 그를 재신임한 겁니다. 여기에는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를 계기로 한국 문제가 장개석의국민당 정부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이승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중화민국)와 접촉해 한국 독립에 대한 협조를 약속받습니다. 국제연맹 회의 당사국으로 참여한 중화민국을 통해 한국의 독립 의지를 각국에 알리겠다는 의도였죠.흥미로운 건 10여년 전 워싱턴회의 때만 해도 이승만을 푸대접한 미국 정부의 태도가 이때는 180도 바뀐 사실입니다. 미국 체류 당시 무국적 신분이던 그에게 외교 여권을 발급해준 데 이어 제네바 주재 미국 영사(길버트 프렌티스)가 각국 대표들을 소개해주고 국제연맹 사무국의 정보도 알려줍니다.이뿐 아니라 이승만이 만든 외교 문건을 검토해주고, 그의 편지를 미 국무장관 및 소련 대표단에 전달해주기도 하죠.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서 말한 미일 대립 구도가 본격화된 데 따른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결국 이승만과 임정은 만주 거주 한인들의 피해를 호소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1933년 2월 22일 국제연맹 특별회의에서 공식 회람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6.25 전쟁 전후 이승만의 행적은 다음 편에서 다룹니다)“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8-14 10:00
‘중국 특수’ 달콤한 중독 벗어나야 미래 있다[광화문에서/김상운]“이번 기회에 우리 기업들의 탈중(脫中)이 적당히 이뤄지는 건 오히려 잘된 거라고 본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 시행을 계기로 기업들의 중국 투자가 제약을 받고 있는 데 대해 최근 만난 고위 경제관료는 이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동안 대외경제에서 대중(對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이제는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기업들이 알아서 중국 리스크를 줄일 것”이라고 했다. 사실 중국 경제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위험하다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야 미국의 중국 견제에 기대 리스크를 해소하려는 건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행태 아닌가. 사실 그동안 정부와 산업계는 이른바 ‘중국 특수(特需)’에 취해 그 이면의 위험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14일 대한상의 포럼에서 “국내 산업이 지난 10년 동안 중국 특수에 중독돼 구조조정 기간을 놓쳤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저임금 특수를 누리면서 국내 제조업 비중이 유지되는 등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가 늦어졌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최근 대중 수출이 줄어드는 것도 단순히 미중 갈등 때문이 아니라 이 같은 구조적 원인이 숨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중국 특수 중독은 이미 우리 경제에 작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올 상반기(1∼6월) 대중 수출이 26% 급감하면서 올 들어 지난달 20일까지 무역적자가 약 278억 달러(약 35조4172억 원)나 쌓였다. 중국의 경기침체가 심화되면서 주력 품목인 반도체 등의 대중 수출이 급감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한은 보고서(‘최근 우리 수출의 특징 및 시사점’)에 따르면 올 1∼4월 각국의 수출 증가율을 비교한 결과 한국, 대만, 베트남 등 대중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수출이 부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대중 수출 의존은 앞으로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다. 국가 간 안보 갈등이 커지는 국면에서 경제적 상호 의존은 도리어 상대국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중국의 사드 경제 보복이 대표적이다. 7년째 중국을 최대 교역국으로 두고 있는 독일은 올 6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하면서 원자재나 에너지 공급 등에서 대중 의존을 줄이고, 공급처를 다변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물며 중국과 영공·영해를 맞대고 있고 73년 전 전쟁까지 치른 한국의 대중 리스크는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크다. 그럼에도 한국의 높은 대중 의존도는 여전하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국산 요소 수입 비율은 2021년 71.2%에서 지난해 66.5%로 떨어졌으나 올 상반기 89.3%로 도리어 높아졌다. 2021년 10월 중국이 요소 수출을 막아 차량용 요소수 품귀로 ‘물류 대란’이 벌어졌는데도 중국 수입 의존은 오히려 확대된 것이다. 중국산 요소수의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는 게 이유다. 이제 중국은 희토류에 이어 갈륨, 게르마늄 등 여타 희소금속에 대한 수출 통제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의 일방적인 핵심광물 통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관련국과의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건 눈앞의 이익에만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인 차원에서 중국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국가적 의지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2023-08-04 00:00
‘바그너 반란’으로 본 푸틴-김정일의 측근정치[김상운의 빽투더퓨처]“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임천일 외무성 부상은 이번에 로씨야(러시아의 북한식 표기)에서 발생한 무장반란 사건이 로씨야 인민의 지향과 의지에 맞게 순조롭게 평정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로씨야 지도부가 내리는 임의의 선택과 결정도 강력히 지지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6월 25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전날(6월 24일) 오전 6시 59분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로스토프나노두 군사령부 점령 발표로 러시아 연방에 대한 첫 쿠데타 시도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로부터 3시간 후인 오전 10시 “반역자를 처벌하겠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발표된 바로 다음 날 북한은 신속히 푸틴 지지를 선언했죠.세계 자유진영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가운데 북한은 친러 국가들 중 처음으로 이 같은 성명을 냈습니다. 이를 두고 바그너그룹을 푸틴의 친위 세력으로 보고 무기를 지원한 북한이 미묘한 상황에 봉착하자 푸틴 지지를 재빨리 밝힌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일각에서는 일인 독재체제인 양국을 비교하면서 북한의 무장 반란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역사를 돌이켜보면 북한은 건국 초기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이식하면서 군 지휘체계도 모방했습니다. 더구나 이번 러시아 반란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푸틴과 북한 수령들(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군 운영방식이나 용인술에서 흡사한 요소들이 발견됩니다.푸틴 반란 이면에는 ‘분할통치’와 ‘충성경쟁’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6월 24일자 ‘푸틴의 요리사가 반역을 서빙했다(‘He went nuts’: howPutin’s caterer served a dish of high treason)’ 제목의 기사에서 “푸틴이 정규군 대신 사병 조직을 만드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다”는 러시아군 관계자의 코멘트를 실었습니다. 푸틴이 총리 재직 시절 즐겨 찾던 요리점 주인 출신으로 이른바 올리가르히(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거액을 모은 신흥 재벌집단)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2014년 바그너그룹을 세웠습니다. 그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에서 국제여론 등을 의식해 사병 집단을 대리로 내세우기 위한 목적이었죠. 이후 바그너그룹은 시리아와 모잠비크에서도 러시아군 대신 활동을 벌입니다.바그너그룹은 푸틴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막대한 국방예산을 지원 받으면서 점차 러시아 군부와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수익성 높은 군수 계약을 놓고도 양측이 신경전을 벌였다는 게 서방 정보기관의 전언입니다.전차부터 헬기까지 사병조직치고는 정규군 이상의 강력한 무기를 확보한 바그너그룹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둡니다. 이로 인해 전공(戰功)을 두고 러시아 군부와 한층 치열한 갈등을 벌이게 되죠.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반격에 맞서 하나로 똘똘 뭉쳐도 모자란 판국에 아군끼리 적전 분열에 이른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전하게 된 원인을 정규군-용병 부대의 이원적 전투 체제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그렇다면 푸틴은 이런 비효율에도 불구하고 바그너그룹을 만들고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결과적으로 강력해진 바그너그룹의 반란에 직면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서방 분석가들에 따르면 푸틴은 바그너그룹을 통해 막강한 러시아 군부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국방예산의 상당 부분을 바그너그룹에 몰아줘 군부와 경쟁시키고, 자신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권력의 누수를 막으려고 한 것이죠. 군부에 대해 일종의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전략을 구사한 겁니다.푸틴은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높지만 혼자서는 권력을 추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프리고진을 바그너그룹 수장에 앉힙니다. 9년간 옥살이를 한 전과자 출신의 요식업자가 감히 자신 만의 권력을 추구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본 거죠. 하지만 이것은 푸틴의 오판이었습니다.푸틴은 프리고진에 대해 두 가지의 결정적 오판을 저지른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프리고진은 푸틴의 꽁무니만 조용히 쫓는 캐릭터가 아니었죠.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한국의 합참의장)을 대놓고 비난하며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행태를 보입니다.그리고 두번째는 텔레그램 등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여론을 주도한 프리고진의 정치력입니다. 우크라이나 격전지를 촬영한 동영상에 자신의 메시지를 담은 그의 SNS 홍보는 큰 위력을 발휘해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팬덤을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프리고진이 모스크바로 진군하면서 세를 키우면 승산이 있다고 잘못 판단한 밑바탕이 되었죠.푸틴과 닮은 북한의 군 지휘체계북한은 김일성 집권 이래 군령기관(작전권 행사)인 총참모부(한국의 합참에 해당)와 군정기관(인사, 군수 등의 조직권 행사)인 총정치국(조선로동당의 지도를 군에 관철하는 기관)의 이원적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습니다(이하 장달중 등 <현대 북한학 강의> (사회평론, 2013) 참고)국방부가 군령 및 군정권을 일괄적으로 갖고 이를 합참 등에 위임하는 우리와 다른 시스템이죠. 이는 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일인 수령 독재를 실시하는 북한의 통치구조에서 기인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군령, 군정권이 나뉜 게 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실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군정 기능을 담당한 총정치국이 당의 입장을 내세워 군령권에도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북한 군부에서 군사 간부와 정치 간부 사이의 갈등은 일종의 고질병이 된지 오래죠.그 역사적 연원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봐야합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1차적으로 연안파(해방 이전 중국에서 활동한 공산주의자)와 소련파를 제거한 김일성은 일인 독재체제의 정점을 찍기 위해 유일하게 남은 갑산파 숙청에 나섭니다(1967년 조선로동당 제15차 전원회의 갑산파 숙청 사건)이듬해인 1968년에는 민족보위상, 총참모장 등 군 수뇌부도 대거 숙청합니다. 그러곤 1969년 각급 부대의 작전명령서에 군 지휘관과 함께 정치위원의 서명을 받도록 제도를 바꿉니다. 야전 지휘관의 판단만으로 군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정점으로 한 조선로동당의 군부 통제를 대폭 강화한 겁니다. 김일성은 “중대장이 맏형이라면 정치 지도원은 맏누이와 같다”고 했죠.이에 따라 북한군은 김정일 시절에는 무력부(한국의 국방부 격)와 총정치국, 총참모부가 김정일과 국방위원회에 각자 보고하는 ‘3중 통제체제’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보위사령부(한국의 기무사 격)와 국가안전보위부(국가정보원 격), 인민보안성(경찰 격)에 의한 군부 통제도 이뤄졌죠.마치 푸틴이 바그너그룹으로 군부를 견제한 것처럼, 북한도 수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반란을 막을 수 있도록 인민군을 분할 통치한 겁니다. 선군(先軍) 정치 등을 통해 거대한 병영 국가가 돼 버린 북한에서 정권 안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군부를 틀어쥐려는 의도입니다. 푸틴이 요식업자 프리고진을 군부 견제세력으로 활용한 것처럼, 김정일도 군내 서열을 무시하고 충성도에 따라 측근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의 용인술을 구사했습니다.김정은 세습 과정에서 충성경쟁과 장성택 숙청사실 러시아나 북한과 같은 독재체제에서 충성경쟁은 정권교체기(북한의 경우 권력세습기)에 한층 격화됩니다(이하 북한연구학회 <김정은 시대의 정치와 외교> (한울아카데미, 2014) 참고) 독재국가에서 권력승계는 기존 통치연합 내 엘리트간 권력과 이권이 대규모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이를 둘러싼 경쟁과 갈등이 치열해지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경우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권력이 세습될 당시 군부에 속한 막대한 이권, 특히 와크(무역 특권)를 놓고 장성택 세력과 군부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입니다.시계를 김정일 생전인 2008년로 돌려볼까요. 그해 8월 김정일은 뇌경색에 빠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이전에 군부에서 제기했으나 김정일에 의해 중단된 후계 논의가 재개되고, 이듬해 1월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됩니다.김정일은 자신이 죽고 나서 후계체제를 안착시킬 측근으로 매제인 장성택을 선택하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 선군 체제로 위기를 돌파하면서 몸집이 커진 군부를 장성택을 세워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후 선군시대를 이끈 3인방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총참모장이 배제되고 리영호 총참모장, 김영철 총정치국장 등으로 대체됩니다. 이어 군부의 대표적인 외화벌이 업체인 승리무역합영회사를 장성택 휘하의 조선로동당 행정부로 편입합니다. 그 외에도 군부의 각종 이권사업을 빼앗죠.하지만 군부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수령에 오른 김정은은 크게 확대된 장성택 세력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지배연합 내 엘리트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하는 수령 독재체제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거죠.이런 흐름을 군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군부와 당 조직지도부 인사들이 연합한 반(反) 장성택 세력이 2013년 12월 8일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을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자’로 낙인 찍고 닷새 뒤 그를 처형합니다. 장성택 처형 이후 행정부는 조직지도부에 흡수되고, 군부의 무역사업 제한 조치는 폐기됩니다. 북한에서 반란 일어날 가능성은앞에서 살펴본 대로 북한 군부를 둘러싼 3중, 6중의 내·외부 감시체제는 전쟁 시 전투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지만 쿠데타를 막는 데는 효율적인 구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 수령 독재에서는 정권안보(regime security)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 우선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군부 이외 다른 엘리트 계층의 반발도 지배연합에서 이권과 권력을 조정해 경쟁을 유발하는 북한의 통치구조상 어려워 보입니다. 김정일~김정은 권력세습기 군부와 장성택 세력 간의 갈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그렇다면 아래로부터의 반발이나 외부세력의 음모 정도가 남을텐데 주체사상의 유일 지배체제에 세뇌된 북한 인민들이 조직적 저항을 벌이기는 힘든 게 현실입니다. 또 외부에 대해 극도로 폐쇄적인 북한 여건상 외부세력이 침투하기도 어렵습니다.결국 군 지휘체계나 엘리트층에 대한 용인술에서 푸틴과 북한의 수령들은 독재체제 속성상 유사한 점이 많지만, 구성원들을 틀어쥐는 장악력 측면에선 북한이 한 수 위라고 봐야할까요.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7-13 10:12
싱하이밍-티베트 논란에 감춰진 ‘중국 패권주의’ 역사[김상운의 빽투더퓨처]“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최근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논란과 관련해 사망한 지 100년이 넘는 근대 중국인이 느닷없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오만 방자한 청나라 말기 외교관의 상징,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입니다. 싱 대사가 “중국의 패배에 베팅하는 이들은 나중에 반드시 후회한다”며 우리 정부에 사실상 협박성 발언을 한 데 대해 윤 대통령은 비공개 국무회의에서 “싱 대사의 언행이 1880년대 (조선의) 국정을 농단한 위안스카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일갈했죠.싱하이밍 대사 발언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티베트 관제 행사 참석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도종환 의원 등이 티베트 라싸에서 열린 ‘티베트 관광문화 국제박람회’에 참석했는데, 이것이 중국 정부의 티베트 점령 정당화에 이용당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싱하이밍 대사 발언과 티베트 박람회 참석 논란은 개별적인 해프닝이라기보다는 중국 ‘패권주의’ 흐름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하나씩 역사를 통해 그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위안스카이 ‘갑질’ 이면에 도사린 ‘중국 패권주의’자 그럼 위안스카이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고, 그가 활동할 당시 중국은 조선에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을까요. 시계를 19세기 말 조선으로 돌려보죠.청의 군기대신(軍機大臣)을 거쳐 훗날 중화민국 대총통, 중화제국 황제에까지 오른 위안스카이는 소싯적 학문에는 별 소질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하 구선희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 했던 중국인, 위안스카이>(역사비평·2009) 참고)수차례 과거에 낙방한 끝에 아버지 지인(우장칭 조선파견군 사령관) 찬스로 어렵사리 관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장칭의 막료에 불과했던 그에게 출세 길을 열어준 건 실각했던 대원군을 복귀시킨 1882년 임오군란이었습니다.청나라가 군대를 급파해 반란 세력을 제거하는데 참여한 위안스카이는 정5품의 관직을 얻습니다. 이후 그는 조선 주둔군 3000명을 뒷배경으로 온갖 세도를 부렸죠. 본래 조선 궁궐에서는 왕을 제외하곤 누구도 가마를 탈 수 없지만 그는 예외였습니다.정부 주최 연회에선 각국 외교사절과 달리 조선 외아문독판(현 외교부 장관)과 나란히 상석에 앉아 각국 외교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싱하이밍 대사가 외교 관례에 맞지 않게 주재국 정부를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과 겹쳐 보입니다)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위안스카이 개인의 오만함에서만 비롯된 행태가 아니라 그 이면에 청 당국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이 전통적으로 청의 조공국이었음을 내세워 국가주권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국제사회를 향해 조선이 자신의 속국임을 주입시키고자 한 겁니다(2017년 4월 시진핑 주석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양자회담에서 “사실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을 일으킨 게 연상됩니다)아편전쟁을 계기로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에 놓였던 청이 도리어 조선을 근대 식민지로 만들고자 한 겁니다. 실제로 1882년 8월 23일 청은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청의 속방(屬邦)’이라는 조항을 넣었죠. 또 조선의 각국 주재 외교관이 청나라 현지 외교관의 지시를 받도록 하는 등 외교권 침탈까지 벌입니다.이런 청 정부의 전략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조선 당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기 위한 책략을 획책합니다. 고종 주변 중신들을 친청파로 채우는 동시에 궁궐 내 동정을 자신에게 몰래 알려주는 환관까지 심어 놓았습니다(최근 국가정보원이 중국 정부와 내통한 혐의로 내부 직원을 감찰 중인 사실이 알려졌습니다)이 중 민비 외척세력으로 위안스카이의 비호를 받은 민영준은 1894년 동학란 당시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안스카이의 뜻에 따라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자충수를 두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청과 위안스카이의 자충수이기도 했습니다.당시 위안스카이는 청군을 조선에 보내더라도 일본은 병력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습니다. 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한 빌미를 찾고 있던 일본에 청군의 한반도 진입은 일종의 호재가 된 겁니다.위안스카이의 판단과는 달리 일본은 즉시 군대를 한반도에 상륙시키고 경복궁에 침입합니다. 그러고선 1894년 6월 23일 오전 7시 일본 군함이 아산만 앞바다에서 청나라 순양함을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합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및 식민지배가 본격화되는 서막이 열린 겁니다. 이로서 조선을 자신의 근대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 청의 계획은 물거품이 됩니다. 중국은 언제부터 패권주의로 돌변했는가많은 이들이 중국의 패권 추구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부상하며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운 시진핑 집권 이후 본격화됐다고 말합니다. 그전까지는 덩사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전략에 따라 이런 속내를 감췄다는 것이지요.국제정치학자인 데이비드 강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교수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과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영됐으며, 부상하는 중국과 주변국의 협력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김기혁 전 UC데이비스대 교수는 중국은 이미 19세기 후반 청나라때부터 동아시아에서 팽창주의로 돌변했다고 말합니다(이하 김기혁 <동아시아세계질서의 종막> (글항아리·2022) 참고) 당시 청은 종주국으로서 의례적인 권한만 행사할 뿐, 조공국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의 조공체제 전통을 어기고 팽창주의를 추구했다는 겁니다(정치·외교적으로 독립한 조공국은 속국과는 다른 개념입니다)앞서 언급했듯 중국이 일본, 러시아에 맞서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 내정에 깊이 개입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리훙장(李鴻章)은 대원군이 재집권할 경우 청의 가교로 조선이 서양 열강과 체결한 조약을 폐기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습니다.이렇게 되면 서구 열강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고 한반도에서 청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본 겁니다. 리훙장은 임오군란 직후 청군 파병과 대원군 납치를 주도하며 수도 베이징과 가까운 한반도는 자국 안보에서 ‘핵심 완충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이로부터 68년 후 6·25전쟁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에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전을 결정한 이유와 정확히 같습니다.)티베트는 중국 패권주의의 압축판민주당 의원들의 방문으로 도마에 오른 티베트는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이자, 안보위협 요소로 꼽힙니다(이하 이동률 <중국 정부의 티베트에 대한 중국화 전략: 현황과 함의> (동북아역사논총 13호·2006) 참고)티베트는 1950년 중국의 침공 이전까지 오랜 독립의 역사를 영위한 데다, 한족(漢族)화 된 나머지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종교, 언어 독립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의 항거는 이미 1959년 3월부터 본격화 돼 중심지인 라싸에서 벌어진 반중 시위로 8만7000명의 사망자(중국 정부 통계 기준)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티베트 불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가 1000여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인도로 넘어가 1960년 망명정부를 수립하게 되죠.이뿐이 아닙니다. 극좌 공산주의 운동이 극에 달한 1960, 70년대 문화대혁명 때는 티베트 전통문화와 종교에 대한 파괴가 절정에 이릅니다. 한때 6259곳에 달하던 불교 사원이 8곳으로 줄고, 승려 59만 명 중 11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티베트의 비극은 중국의 개혁, 개방이 본격화 된 1980년대에도 이어져 1989년 라싸 사건 30주기 때는 티베트인 4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명이 체포되는 유혈참사가 벌어져서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당황한 중국 정부는 티베트 일대에 경제개발(서부개발)을 통해 티베트인들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정부에 대한 티베트들의 깊은 불신은 여전합니다. 예컨대 정부가 경제개발 명목으로 한족 이주를 적극 장려한데 대해 티베트인들은 내몽골처럼 한족화를 통해 티베트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압살하려는 의도로 보고 있습니다.실제로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근간인 ‘중화민족다원일체론(中華民族多元一體論)’은 다민족 국가의 일체화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의 한화(漢化)를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족이 중국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다 공산당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티베트는 단순히 중국 내정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코소보 사태와 9.11 테러를 거치면서 중국 정부가 서방 세력이 자신들을 흔드는데 티베트 이슈를 이용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1999년 한 회의석상에서 티베트 문제와 관련해 “서방의 일부 적대세력이 국내 분열주의 세력과 긴밀히 연계해 민족, 종교문제로 중국의 빈틈을 파고 들어 분열시키려는 정치적 음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티베트인을 비롯한 55개 중국 내 소수민족 중 하나가 조선족이라는 점에서 티베트 독립은 우리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조선족은 티베트와 같은 분리독립 움직임은 없지만,이들이 사는 중국 동북지역은 티베트처럼 상대적으로 낙후된 변경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티베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정책은 동포인 조선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민주당 일부 인사의 주장처럼 70년 전의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죠.싱하이밍-티베트 논란 이면엔 중국의 ‘갈라치기’ 전술?싱하이밍 대사의 전랑 외교성 발언과 티베트 참석 논란은 그 1차 대상이 공교롭게도 민주당 인사들이었습니다. 미중갈등에서 비롯된 탈중국이 화두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요.민주당은 현 정부의 외교정책이 ‘친미 반중’이며 이것이 도리어 국익을 훼손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한-미-일 삼각동맹 강화에 불만을 품은 중국으로서는 이런 주장을 펴는 민주당을 끌어들여 일종의 ‘갈라치기’ 전술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야로 나뉘어 지지자들이 극렬히 대립하는 한국의 정치환경을 이용해 탈중 노선을 둘러싼 여론전을 벌이고 있는 거죠.‘하나의 중국’에 집착하는 중국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민주당 의원들을 초청한 것도 갈라치기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중국은 티베트 이슈가 국제화되면서 이를 미국 등 서구세력이 이용하려고 든다는 의심을 갖고 있는데, 미국의 혈맹인 한국 정치인들을 여기에 끌어들인 겁니다.미국 입장에서는 한국 정치인들이 티베트 관제 행사에 동원돼 ‘하나의 중국’을 지지한 것처럼 보인 데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싱하이밍 대사와 티베트 참석 논란은 구한말 위안스카이의 행태처럼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중국 패권주의’ 행태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하지 않을까요.이것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는 한국이 이른바 ‘가치 외교’ 원칙에 따라 싱하이밍 대사 발언 등에 단호하게 대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강경 노선으로 중국과 갈등을 벌이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개인끼리도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지켜야하듯, 중국도 한국을 과거의 조공국이 아닌 강력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임을 인식하도록 하자는 겁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6-29 10:00
美中 반도체 전쟁에서 보는 역사 속 ‘쐐기 전략’[김상운의 빽투더퓨처]“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각종 문헌 속 역사적 사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려고 합니다.“쌍방은 반도체 산업 공급망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동의하였다.(双方一致同意加强半导体产业链供应链领域对话与合作.)”▶5월 27일 중국 상무부 보도자료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과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이 APEC 장관급 회의에서 만난 뒤 중국 상무부는 이 문장이 들어간 보도자료를 최근 홈페이지에 띄웠습니다. 마치 의도한 듯 보도자료 맨 끝부분에 ‘반도체’ 공급망을 운운했죠(학자들도 진의가 담긴 민감한 내용은 논문 각주나 뒷부분에 넣곤 합니다).그런데 같은 날 한국 산업통상자원부의 보도자료에는 반도체의 ‘반’자도 나오질 않습니다. 다만 ‘중국 측에 교역 원활화와 핵심 원자재, 부품 수급 안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요청했다’는 문구 정도가 나오죠. 양자 회담에서 각국이 강조 내지 주장하는 바가 보도자료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그런데 이 미묘한 차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각국이 원하는 것 혹은 원치 않는 것(眞意)이 살짝 드러나죠. 다시 말해 이번 한중 장관급 회담에서 첨예한 이슈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반도체’ 공급망 이슈였던 겁니다.이 양국 간 입장 차이를 두고 일부 국내 언론들은 미국의 압박으로 다급해진 중국이 반도체 강국 한국과의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과연 그럴까요.중국 속셈은 ‘쐐기 전략’우선 반도체 수급이 다급해졌다면 얼마 전 중국 정부가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을 제재한 사실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이크론의 중국 D램 시장 점유율(2022년 기준)은 14.5%로 삼성전자(43.2%), SK하이닉스(34.6%)에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반도체 수급 문제로 자동차 생산에 지장이 초래될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무시할 수 있는 물량은 아닙니다.무엇보다 상무부의 발표 시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이크론 제재를 발표(5월 21일)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반도체 공급망’을 언급했죠. 이는 마이크론 제재와 상무부 발표에 어떤 연관성 내지 흐름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저는 이것이 중국의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쐐기 전략이란 경쟁국과 그 동맹국의 관계를 벌리기 위한 일종의 ‘이간책’을 말합니다. 이번 건의 경우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로 부족해질 중국 반도체 물량을 둘러싸고 한미 간 균열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실제로 미국 정부가 마이크론 물량을 한국 반도체 기업이 채우지 말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한 데 이어 미 의회 고위 인사도 이를 압박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마이크 갤러거 미 하원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 “미국 상무부는 중국에서활동하는 외국 메모리 반도체 회사에 대한 미국의 수출 허가가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경험한 한국이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backfilling)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런 상황에서 중국 상무부장이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만나 반도체 공급망에서 협력을 운운한 건 마이크론 물량 공백을 둘러싼, 나아가 미국의 반도체 규제를 둘러싼 한미 간 균열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미국의 반도체 규제 방침과 관련해 한국 정부와 업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는 5월 26일 자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도 이런 맥락에서 예사롭지 않죠. WSJ은 미국의 반도체법 시행으로 인해 대만과 더불어 중국에 대규모 사업장을 둔 한국의 타격이 특히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국책 연구기관인 KDI는 반도체법 등 미국, EU가 추진 중인 공급망 재편 전략으로 인해 한국 경제 성장률이 최대 0.641%포인트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1972년 미중 데탕트로 시계 돌리면그럼 과연 이런 ‘쐐기 전략’은 역사적으로 효과가 있었을까요. 시계를 1972년 2월로 되돌려 봅시다. 당시 미국 대통령 중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면서 중요한 첩보를 하나 제공합니다. 소련군의 중소 국경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였죠(The NationalSecurity Archives, “Nixon‘s Trip to China”: )그러면서 닉슨은 저우언라이에게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소련은 우리의 서유럽 동맹국들에 맞서 배치한 군대보다 더 많은 병력을 중소 국경에 배치했소.”미중 데탕트는 미소 냉전 국면에서 중소 갈등에 쐐기를 박은 신의 한수로 통합니다. 소련을 고립, 봉쇄하고자 한 미국의 대외전략에서 사회주의 양대 대국인 소련과 중국의 분열은 긴요했죠. 미중 데탕트 설계자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의 데탕트가 소련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이런 맥락에서 1972년 방중한 닉슨은 중국의 최대 안보 위협이던 소련 군사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중소 갈등을 이용하려는 행태를 보인 겁니다. 결과적으로 미중 데탕트는 사회주의권에서 소련의 입지를 좁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쐐기 전략’으로 평가됩니다.1960년대 북한으로 시계 돌리면그렇다면 ‘쐐기 전략’은 강대국 간에 말을 움직이는 그레이트 게임에 국한된 걸까요. 역사를 거슬러보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계를 1960년대로 돌려보죠. 당시 중소 갈등이 국경 분쟁으로까지 격화된 상황에서 북한은 양국 사이에서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경제, 외교적 실익을 얻습니다. 이른바 북한식 자주외교라는 명목하에 계산된 줄타기를 한 거죠.북한은 6.25 전쟁 직후부터 1960년까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체 무상원조의 43.17%와 30.75%를 각각 받아냅니다. 이를 두고 북한이 중소 갈등 구조를 이용해 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취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박동훈·이성환, “북중관계 변화의 동인과 시진핑 시대의 대북정책”, 『국제정치연구』, 제18집 1호, 2015)때론 김일성이 직접 나서 중국을 겨냥해 소련과의 협력 가능성을 내비치는 압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오늘 사회주의 나라들과 공산당, 로동당들은 의견 상이(相異)로 하여 통일 단결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혁명에서 마땅히 놀아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형제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의견 상이가 더는 확대되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 역량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통일 단결은 하루빨리 실현되어야 합니다.”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보고’)미중 데탕트가 한창 무르익던 당시 중국이 미제와 손을 잡는다면 북한도 소련과 손잡을 수 있다는 일종의 협박인 셈입니다. 비록 소국이지만 사회주의체제 내 분열을 이용해 강대국을 쥐고 흔든(꼬리가 몸통을 흔든) 사례죠.중국 ‘쐐기 전략’ 어떻게 대응하나그렇다면 쐐기 전략에 대해선 어떻게 대응하는 게 현명할까요. 동맹국과의 분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국익을 지킬 수 있는 묘안을 짜내야 할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국의 진의(이간책)를 꿰뚫고 있다면 과잉 반응을 자제하고 사태를 냉정하게 파악할 수는 있죠.그럼 서두의 마이크론 사태로 돌아가 보죠.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 이후 공백을 우리 기업들이 채워야 할까요, 말까요? 그런데 바로 이런 질문이야말로 중국이 원하는, 동맹(미국)과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일도양단의 논리로 흐를 수 있습니다. 공백을 메운다면 미국에, 그렇지 않으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니까요.이런 이분법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다시 살펴볼까요. 전문가들은 반도체 유통구조상 마이크론 물량을 대체한 주문에 대해 이것이 과연 그것인지를 콕 짚어 판별하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전자제품을 만드는 세트업체인 A사가 삼성전자, 마이크론, 난야 테크놀로지(대만)의 반도체를 각각 주문해 사용한다고 칩시다. A사가 어느 날 마이크론과 난야 부품을 줄이고 삼성 것을 늘리면 이것이 마이크론을 대체한 것인지, 난야를 대체한 것인지 애매모호합니다.이처럼 독점 시장이 아닌 이상 복수 제품들의 조달 현황을 꼬리표를 붙여 일일이 추적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죠. 결국 한국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 중국 정부 간 핑퐁 게임은 사실상 ‘레토릭’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이크론의 공백을 채우느냐, 마느냐의 이분법 프레임에서 벗어나 상황을 관망하면서 조용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쐐기’에 걸려들지 않으면서도(한미동맹 유지 및 강화)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 아닐까요.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6-18 13:40
[온라인 라운지]영원무역 성래은 부회장 ‘영원한 수업’ 출간아웃도어 브랜드 ‘노스페이스’로 알려진 영원무역 성래은 부회장이 신간 ‘영원한 수업’(은행나무)을 최근 펴냈다. 부친이자 창업자인 성기학 회장의 경영수업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부친으로부터 배운 경영인의 태도와 경영의 본질은 물론 저자가 21년째 기업현장에서 경험한 일화 등을 기록했다.신간에는 대학시절 산악부에서 활동한 창업자가 1970년대 초반 설악산 등반 당시 구스다운 재킷을 입은 일본인과 만난 후 기능성 아웃도어에 관심을 갖게 된 일화가 소개돼 있다. 당시 국내에는 일반 소비자들을 위한 스포츠웨어가 거의 없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성 회장은 “섬유업은 반도체나 IT에 비해 대중의 주목을 덜 받는 사업이다. 사양 산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의식주 중 하나인데 어떻게 사양산업이 되겠는가”라고 되묻는다.이처럼 우직하게 한 길을 걷은 결과 방글라데시, 베트남, 에티오피아 등 국내외에 9만 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빠른 속도로 시시각각 변하는 경영상황에서 장기플랜을 세우느라 시간을 쓰기보다 현재에 충실 하는 게 중요하다는 창업자의 경영철학도 곱씹을만하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6-07 20:51
대국민 ‘4대 환경교육 캠페인’ 나서교보생명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이 중 환경부와 함께 벌이는 환경교육 분야의 사회공헌 활동이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6월 환경부와 ‘지속가능한 미래 실현을 위한 환경교육 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보험, 금융, 유통, 식품, 항공, 교통 등 국민 일상생활과 밀접한 업계의 9개 기업이 협약을 맺었는데, 이 중 교보생명은 보험분야 대표 기업으로 참여했다. 교보생명은 환경교육 활성화와 탄소중립 실천 확산에 나서고 있다. 임직원 대상으로 다양한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겠다는 것. 지금까지 교보생명 임직원 3350명이 환경보호 실천 다짐서약에 참여하고 환경보호 교육을 이수했다. 교보생명은 교육을 이수한 임직원 명의로 총 6700그루의 ‘환경 희망나무’를 베트남 빈곤 농가에 지원했다. 농가의 지속가능한 소득원 마련과 경제적 자립을 돕고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취지다. 생활 속 환경보호 실천을 위해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ESG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10월 편정범 사장 등 임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플로깅(조깅을 하면서 쓰레기를 줍는 활동) 캠페인’을 진행했다. 강화도 동막해변을 시작으로 강화도 독립운동길을 걸으며 주변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펼쳤다. 연말 기부 프로그램 ‘굿윌마켓’을 통해서는 임직원들이 의류, 잡화, 도서 등 사용하지 않은 물품 3700점을 기부하는 리사이클링 환경보호 활동을 벌였다. 여기에서 거둔 수익은 장애인 경제자립 지원에 쓰였다. 교보생명은 올 6월 환경의 날과 환경교육 주간을 시작으로 ‘대국민 4대 환경교육 캠페인’을추진할 계획이다. 환경부와 함께 청소년과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환경미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운영할 예정이다. 초중고생들이 앱 기반의 참여형 프로그램을 통해 환경보호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교보생명은 우수학교를 선정해 시상하고, 나무 기부를 지원한다.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환경위기 지구본 만들기 공모전’도 개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3-31 03:00
업무 프로세스 디지털화로 탄소중립 실현삼성생명은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걸쳐 디지털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고객 편의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입, 유지, 지급 경험 개선에 집중했다. 올해도 각종 디지털 채널과 인공지능(AI) 기술 및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경험을 개선하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삼성생명은 보험 가입과 계약 유지, 보험금 청구 등 각 단계에서 디지털화를 진행하고 있다. 먼저 가입 단계에서는 컨설턴트 상담 후 고객이 직접 계약 체결을 진행할 수 있는 ‘모바일 청약’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보험 가입을 최종 확인하고 진행할 수 있다. 그 결과 태블릿 전자서명을 포함해 모바일 기기를 통한 개인보험 계약이 전체 계약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연간 청약에 필요한 종이 약 3800만 장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어 ‘친환경 경영’에도 일조하고 있다. 올 6월부터는 컨설턴트가 태블릿PC뿐 아니라 스마트폰에서도 고객 등록부터 청약까지 가입 프로세스 전체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에는 비대면으로 보험을 선물하는 ‘보험 선물하기’ 서비스를 개시했다. 고객이 보험을 계약하고 지인에게 카카오톡 등을 통해 선물을 보내는 방식으로, 선물을 받은 사람이 해당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한 번에 최대 30명까지 선물이 가능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전송받은 인터넷 주소를 누른 뒤 간단한 정보 입력과 본인인증을 마치면 별도 심사 없이 즉시 가입이 완료된다. 보험계약 유지 단계에서는 과거 플라자나 지점을 방문해 처리하던 업무를 고객이 직접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모니모(삼성 금융계열사 통합 애플리케이션)와 모바일 웹을 개선했다. 편리한 인증 방식, 빠른 속도, 쉬운 화면 구성으로 고객이 플라자를 방문하지 않아도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보험료 납입도 모바일 웹이나 카카오페이 등을 통해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보험 가입 이후 모바일 웹에서 이뤄지는 고객의 디지털 업무처리율이 2020년 27.6%에서 2022년 42%로 높아졌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3-03-31 03:00
조폐공사, 실물기반 NFT 미니골드 상품권 국내 첫 선금 1g을 10개로 쪼개 살 수 있는 실물 기반의 대체불가토큰(NFT) 골드 교환권이 나왔다. 실물 기반으로 발행돼 투기를 막고, 금 거래 투명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상대적으로 값싸게 금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이점이다. 한국조폐공사는 1g의 카드형 골드바를 10개로 나눈 0.1g 미니골드 상품권을 시범 출시한다고 3일 밝혔다. 조폐공사 쇼핑몰에 접속해 미니골드(0.1g) 상품권을 구입하면 PIN 번호가 발급된다. 발급 사이트에 접속해 PIN 번호를 입력하면 NFT 골드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 교환권에는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교환권(0.1g) 10장을 모으면 카드형 골드 1g으로 바꿀 수 있다. 미니골드(0.1g) 상품권은 조폐공사가 처음으로 NFT를 적용한 디지털 제품교환권이다. NFT 골드교환권은 다른 NFT와 달리 실물기반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는 평가다. 조폐공사가 보유한 위변조 방지 및 정품인증 기술이 적용돼 보안이 한층 강화됐다. 특히 적은 금액으로 금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장의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기존 가상자산과 달리 디지털 자산에 별도의 고유 값을 부여해 대체 불가능하다. NFT 골드교환권(0.1g)은 전자 형태로 발급돼 실물을 소지할 필요가 없다. 또 10개 교환권을 확보하면 고객이 원할 때 실물로 바꿀 수 있다. NFT골드교환권(0.1g) 10장으로 바꿀 수 있는 ‘디지털 제품교환권 카드형 골드’에는 중량 1g, 순도 99.99%로 정품임을 보증하는 잠상(숨겨진 이미지) 기술이 적용됐다. NFT골드교환권(0.1g)을 발급받을 수 있는 미니골드(0.1g) 상품권의 판매가는 1만4900원으로 조폐공사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조폐공사는 국내 금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금 품질 인증을 전담하고 있다. 반장식 조폐공사 사장은 “실물 기반의 디지털 미니골드 상품권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고 소액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금시장 투명화에 기여할 것”이라며 “화폐와 여권제조를 통해 구축한 공사의 위변조 방지 노하우를 디지털 세계에서도 적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8-03 16:32
[책의 향기]노동자들은 왜 브렉시트를 지지했는가브렉시트와 샤이 트럼프의 공통점. 분노한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결집해 예상치 못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트럼프 집권 모두 ‘설마…’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생존경쟁에 시달려 온 이들의 거센 반격에 이는 현실이 돼 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꿀을 빨며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살아온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영국으로 이주해 현지인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 저자는 노동계층에 속하는 베이비붐 세대 이웃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이 책을 썼다. 먹물 냄새 풍기는 학자들의 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현실 묘사가 압권이다. 트럭을 모는 저자의 남편이 대처리즘과의 일전을 선포하며 생병을 앓는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남편은 급작스러운 두통으로 국민보건서비스(NHS)의 무료 진료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하지만 대기인원이 너무 많아 수개월째 병원 문턱조차 넘지 못한다. 저자는 돈을 써서라도 민간병원에 가자고 설득하지만 남편은 “NHS를 잃으면 영국이 복지국가였던 시절의 유산을 잃는 거다. 대처한테 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그는 의료재정이 지금보다 풍족하던 시절 NHS 병원에서 말기 암을 치료한 경험이 있다. 저자는 몸뚱이가 전부인 영국 블루칼라 계층에게 무상진료 혜택은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신자유주의 정부의 재정긴축이 이를 앗아갔다고 주장한다. 우려스러운 건 이런 흐름이 외국인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 NHS 병원을 찾는 내국인 대비 이주민 수가 늘어난 데 따른 현상이다. 영국인들이 돈을 내고 의료서비스 질이 좋은 민간병원으로 몰리는 반면, 대출 여력조차 없는 이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NHS 병원을 이용하고 있어서다. 사정이 이런데도 극우 인사들은 NHS 재정을 외국인들이 축내고 있는 것인 양 사실을 왜곡하며 블루칼라 계층을 선동한다. 이들이 이민자 통제를 외치며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나선 배경이다. 복지와 경제효율이 상충하는 혼돈 속에서 노동계층과 이주민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는 비극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6-25 03:00
[책의 향기]대문호의 눈으로 본 분단 베를린의 허상남미의 대문호 마르케스가 냉전 초기 동유럽을 직접 둘러보고 쓴 책이라면 한 번쯤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의 소설 ‘백년의 고독’(1967년)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1985년)을 통해 현실과 환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마술적 리얼리즘’에 빠져든 독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언론인 출신답게 1950년대 동유럽 사회와 인간 군상의 민낯을 날카롭게 포착한 솜씨가 돋보인다. 시작은 한낮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나른한 카페에서 결행한 객기였다. 그의 이탈리아인 친구가 새로 뽑은 프랑스제 자동차를 어떻게 활용할까를 고민하다 “철의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 가자”는 제안이 튀어나온 것. 아직 베를린 장벽이 들어서기 전이라 이들은 국경을 통과해 동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반도 분단과 맞물려 냉전 최전선이었던 베를린 기행이 특히 눈길을 끈다. 저자의 눈에 자유 진영의 서베를린과 공산 진영의 동베를린 모두 기묘하게 뒤틀린 도시로 비친다. 서베를린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에 힘입어 거대한 ‘자본주의 선전장’이 돼 있었다. 거리마다 미국 수입품이 넘쳐나고 새로 건설된 건물들이 마구 들어서는 서베를린을 보며 저자는 “가짜 도시 같다”고 말한다. 동베를린에서는 ‘가짜 사회주의’의 폐해를 목도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자본가 계층으로 분류돼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직후 자산을 빼앗긴 동독 남성 볼프를 만난다. 볼프는 자신의 사업체가 국유화된 뒤 정부로부터 자식에게 상속할 수 없는 조건의 배상금을 받는다. 볼프는 이 돈으로 외국인들이 이용하는 호텔, 바 등을 드나들며 의욕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는 저자와 밤새워 술을 퍼마시며 사회주의 정부를 욕하지만, 경찰이 감시하는 선거 때마다 결국 찬성표를 던졌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동독 시민들이 혐오하는 소련 주둔군에 대해서도 연민의 시선을 드러낸다. 이들과 우연히 가진 파티에서 정부 명령으로 낯선 땅에 파견되고서 모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고대하는 모습을 발견한 것. 결국 당시 냉전을 겪은 모두가 정치 체제의 희생양 아니었을까.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6-18 03:00
서점이라는 소우주 속 진솔한 이야기[책의 향기]에세이의 힘은 자신의 치부마저 드러내는 ‘진솔함’에서 나온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유명인의 그것보다 생활인의 진심이 담긴 에세이 한 편이 훨씬 값진 이유다. 여기에 깊은 성찰이 담긴 시적인 문장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다. 이 모든 상찬은 오로지 이 책에 해당된다. 저자는 강원 속초시에서 8년째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장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서점 한번 해보겠느냐”는 부친의 제안을 받고 20대 후반에 귀향한다. 그리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딸을 얻는다. 저자는 서점이라는 소우주에서 가족, 손님들과 겪은 일들을 자신이 추천하는 책 소개와 엮어 흥미롭게 풀어냈다. 유명 작가에게 북토크를 제안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지만 끝내 아무 답신을 받지 못하고 수치심에 빠진 일화가 눈길을 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똬리를 튼 ‘욕심’을 발견한다. 편지에 속초 산불로 침체에 빠진 지역 경기를 운운했지만, 결국 자신의 서점을 띄우기 위한 욕심이었음을 순순히 고백한 것. 그러면서 일본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통해 한순간의 잘못된 마음이 가져온 파국을 이야기한다.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 서점에서 보살피며 매일 힘겹게 놀이터에 데려간 이야기는 묵직한 부정(父情)을 일깨운다. 서점에서 부부싸움을 하던 중 책을 추천해달라는 손님에게 줌파 라히리의 소설 ‘축복받은 집’을 소개한 뒤 아내와 화해한 이야기도 따스하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6-11 03:00
대통령 국빈 만찬 대비 ‘국박 활용 매뉴얼’ 만들자[광화문에서/김상운]12년 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포드자동차 기자간담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앨런 멀럴리 포드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저녁식사를 겸한 자리였는데 만찬 장소에 놀랐다. 이 미술관의 백미(白眉)인 디에고 리베라(1886∼1957)의 걸작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1933년) 바로 앞에 음식 테이블이 차려진 것. 미 연방정부의 국가사적(national historic landmark)으로 지정된 이 작품은 가로 23m, 세로 5m 벽면에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1930년대 미국 자동차 산업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작품인 만큼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 옛 위상을 되찾고자 한 포드의 목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기업 주최 간담회를 많이 다녀봤지만 지금까지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이유다. 만약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건희 컬렉션 전시회에서 삼성전자가 이와 비슷한 행사를 치른다고 하면 어떨까. 당장에 “기부만 하면 다냐”며 국립박물관을 특정 기업이 사용하는 데 대한 ‘특혜 비판’이 쇄도할 것이다. 오래전 기억을 장황하게 꺼내든 것은 지난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공식 만찬을 놓고 불거진 논란 때문이다. 만찬 사흘 전에야 휴관을 통보해 사전에 예약한 일반 관람객들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1급 국가 유물이 즐비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높으신 분’들이 식사를 즐기는 게 온당하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K팝과 한국 영화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요즘 ‘문화 외교’ 차원에서 박물관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사실 대통령실의 서울 용산구 이전을 계기로 지척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국가 행사 활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국빈 접대에서 장소가 주는 상징성이 작지 않아서다. 예컨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차르 여름궁전(리바디아궁)을 회담장으로 고집한 건 제2차 세계대전 승전 후 이곳과 연접한 동유럽 일대를 수중에 넣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한국 문화의 얼과 정수를 상징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의 외교 만찬은 반만년 고유문화의 소프트파워를 각국 정상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다. 단, 국민들의 관람권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묘안이 필요하다. 예컨대 최소 일주일 전 임시휴관을 공지하거나, 가급적 폐관 시간 후 행사를 여는 식의 ‘국립박물관 및 미술관 활용 매뉴얼’을 만들어 대비하는 방안이 있겠다. 국빈 만찬 시 문화재 훼손을 막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유물들을 정상들의 동선상에 이동 전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만찬의 경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동문으로 입장해 만찬장인 으뜸홀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에 고려 전시실과 신라 전시실을 드나드느라 황남대총 금관 등 서너 점밖에 감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관람객 동선과 분리된 별도 행사 공간을 박물관 경내에 두자는 아이디어도 나온다. 문화재는 성물(聖物)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활용 방안을 찾아야 할 때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sukim@donga.com}2022-06-04 03:00
[책의 향기]예고된 지정학적 비극, 우크라이나 전쟁바야흐로 ‘지정학의 귀환’ 시대다. 미국과 각을 세우는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을 앞세워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러시아는 흑해 연안의 요충지 우크라이나를 전격 침공했다. 첨단기술로 통신혁명이 이뤄졌지만 지리는 여전히 세계정치와 경제를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약 100년 전 쓰인 지정학의 고전을 꺼내 봐야 하는 이유다. 영국 지리학자이자 정치인인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듬해인 1919년 이 책 1부를 썼다. 당시는 유럽에서 장기 평화를 가능케 한 ‘빈 체제’가 붕괴되고,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진 직후라 지식인들이 1차 대전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 골몰하던 때다. 그런데 저자는 지리 관점에서 베르사유 체제를 분석하며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가능성을 점치는 선견지명을 보여줬다. 자연환경과 자원이 편재된 탓에 지정학적 요지를 차지하려는 팽창주의 경쟁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 저자는 북극해와 고비·티베트 사막, 알타이·힌두쿠시 산맥에 둘러싸인 유라시아 중심부(러시아 서부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티베트·몽골까지 포함)를 ‘심장지대(heartland)’라고 부르며 중시하고 있다. 해양세력에 맞서 대륙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것. 공교롭게도 구소련의 영토와 거의 겹친다. 2차 대전 종전 후 해양세력인 미국에 맞서 소련이 유라시아 대륙의 절대 강자로 부상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다, 산맥, 사막의 자연방벽에 둘러싸인 심장지대가 서쪽으로 동유럽에 열려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심장지대를 뚫을 수 있는 일종의 급소인 셈.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유럽을 침공한 이유다. 이는 현재에도 유효한 이야기다. 심장지대 서쪽 경계에 있는 흑해 연안에 우크라이나가 자리 잡고 있어서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에서 지정학적으로 예정된 비극일 수 있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6-04 03:00
[책의 향기]안기부 야사로 본 제5공화국 정권의 민낯야사(野史)는 언제 읽어도 재밌다. 여기에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한 사람 이야기가 더해지면 게임 끝이다. 더구나 베일에 싸인 정보기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 저자가 속편을 냈다. 이번에는 저자 표현대로 시작부터 ‘유혈 낭자했던’ 제5공화국의 국가안전기획부장들 이야기다. 베테랑 언론인 출신답게 전직 안기부 요원부터 청와대 관계자, 외국 학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한국 정보기관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냈다. 5공 안기부의 서막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 부장에 ‘셀프 취임’한 전두환이 열었다. 그는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약 한 달간 중정을 직접 이끌며 연간 예산의 15%에 달하는 120억 원을 통치자금으로 쓴다. 국가안보 예산을 정치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책에서는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 등 모든 사정기관 위에 군림하며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안기부의 파워게임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중 1982년 6월 터진 대원각 외화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가 검찰과 사법부를 옥죈 사례가 눈길을 끈다. 당대 유명 요정 대원각을 소유한 이경자 씨 등이 27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려다가 적발됐는데도 보석으로 석방된 데 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것.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은 안기부가 대법원장 비서관과 변호사를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이 씨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안기부는 이창우 서울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이 씨의 남편에게 받은 호텔 숙박권도 찾아낸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과 법원 간부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저자는 증인들의 입을 빌려 안기부가 각종 시국사건에서 마찰을 빚은 검찰, 법원을 길들이고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었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고문 수사의 명수였던 안기부가 대검 중앙수사부의 가혹행위를 고발한 대목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2022-05-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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