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자 쪽방, 재개발로 사라질판… 지명 ‘삼릉’ 유래도 몰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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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국내 현장 가보니]
부평에 일부 남은 미쓰비시 사택

흉물로 변해버린 역사의 현장 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전문위원이 인천 부평2동 일명 ‘미쓰비시 줄사택’ 
안에서 사택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위 사진). 지붕 하나에 일곱 집이 벽을 맞대고 있는 이 곳은 현재 87채가 
남아 있지만 도시 주거 개선을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인천=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흉물로 변해버린 역사의 현장 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전문위원이 인천 부평2동 일명 ‘미쓰비시 줄사택’ 안에서 사택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위 사진). 지붕 하나에 일곱 집이 벽을 맞대고 있는 이 곳은 현재 87채가 남아 있지만 도시 주거 개선을 위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인천=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흙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았다. 흙벽 위로 벽지를 발랐지만, 벽지까지도 빛바래 찢겨 나간 곳이 많았다.

28일 김현석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조사전문위원과 함께 찾은 인천 부평구 부평2동. 1940년대에는 ‘미쓰비시(三菱) 마을’ 또는 ‘삼릉’(미쓰비시를 한자 음으로 읽은 것)이라 불린 사택(社宅) 일부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미쓰비시는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 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공식 확인한 일본 전범 기업 103곳 중 하나다.

사택들은 한 채, 한 채 독립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일곱 채가 나란히 벽을 맞대고 있었다. 지붕 하나가 일곱 채 위에 얹혀 있는 형태였다. 그 끝에는 공용으로 쓰는 화장실이 붙어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사택은 총 87채. 일본이 군수물자를 한창 만들어 내던 1940년대와 비교하면 10% 정도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미쓰비시에는 조선인 1000여 명이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안에 들어가 보니 성인 걸음으로 다섯 걸음이면 방 끝에서 끝까지 다다랐다. 노동자 4, 5명이 모여 살기에는 너무 비좁아 보였다.

현 주민들은 동네 이름을 여전히 ‘삼릉’이라고 불렀지만, 어떤 용도로 이 사택이 생겼는지 잘 몰랐다. 주민도 20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60여 년을 살아온 박모 씨(87·여)는 “옛날에 여기 살던 사람들은 다 사라졌는데 일본말을 많이 썼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사택에 살진 않았지만 남편이 미쓰비시에서 2년간 일했다고 밝힌 장가란 씨(86·여)는 “공장 노동자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했는데 1년 내내 휴가란 건 없었다”고 회고했다. 김 전문위원은 “일단 공장에 들어오면 자발적으로 그만둘 수 없었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사택은 올해 3월 부평구 주거 개선 프로젝트 대상으로 선정됐다. 정혜경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 조사1과장은 “한 채만이라도 상징적 의미로 남기거나 표지를 세워서 이 장소의 의미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은 중국과 인접한 데다 항만 시설까지 갖춘 인천으로 끌려와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됐다. 1939년 인천에는 남한 최대 군수공장인 인천육군조병창이 들어서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밥 세 끼를 먹을 수 있는 등 해외로 끌려간 사람들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나 해외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삼릉 근처 소화여학교에 다니던 조선인 여학생들은 1940년부터는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미쓰비시나 조병창에 취업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조병창은 1953년 이후 미군 군수지원사령부(일명 캠프마켓)로 바뀌었다.

토종 와인 생산업체 ‘와인코리아’의 저장고로 쓰이고 있는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토굴 모습. 매천리에만 100여 개 남은 토굴들은 일제강점기 탄약 저장고로 쓰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만들어졌다. 영동=유승진 기자 promotion@donga.com
토종 와인 생산업체 ‘와인코리아’의 저장고로 쓰이고 있는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토굴 모습. 매천리에만 100여 개 남은 토굴들은 일제강점기 탄약 저장고로 쓰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만들어졌다. 영동=유승진 기자 promotion@donga.com
이날 찾은 충북 영동군 매천리 역시 과거에는 탄약을 저장한 땅굴이었다. 장시용 매천리 이장은 “매천리에는 167개 이상의 토굴이 있었지만 무너져 막힌 것을 제외하면 100여 개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동굴은 와인 저장고로 사용되면서 코레일이 운영하는 와인 열차 관광 코스가 됐다. 폭 3∼4m, 길이 56m로 굽은 동굴에 와인 약 5만 병과 와인 오크통 35개가 보관돼 있다.

장 씨는 “우리 할아버지도 토굴 만드는 데 끌려갔는데 영동체육관 앞쪽 공터에 집단 주거지가 형성돼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토굴을 만들었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1999년 이곳에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사실을 적은 표지판을 세웠지만, 관광객들의 관심은 아무래도 와인에 더 쏠렸다.

그나마 남아 있는 매천리 동굴은 다행스러운 편이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 ‘궁산터널’은 1940년대 굴착한 군사 시설물이지만 역사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이유로 지방자치단체가 원형을 심하게 훼손했다. 그마저도 개장이 여의치 않자 2010년 결국 폐쇄했다.

인천=김재형 monami@donga.com / 영동=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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