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과 은 가격이 사실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1월 21일 서울 종로구 한 금은방에서 직원이 골드바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내가 8개 이상 전쟁을 중단시켰는데도 노벨평화상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나는 더 이상 순수하게 ‘평화’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 평화가 항상 중요하지만, 이제는 미국에 무엇이 좋고 적절한지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린란드에 대해 완전하고 전면적인 통제권을 갖지 않는 한 세계는 안전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월 19일(이하 현지 시간)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 불발과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 통제 필요성을 연결 짓는 취지의 편지를 노르웨이 총리에게 보낸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에 대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됐다. 이에 따라 ‘셀 아메리카(Sell America)’ 우려가 커져 미국 주식·채권·달러가 모두 약세를 보였다. 반면 안전자산 수요가 확대되면서 금 가격이 1월 20일 트로이온스당 4700달러(약 690만 원)를 넘어섰고, 은 역시 사상 처음으로 95달러(약 14만 원)를 돌파했다.
S&P500 급락, 금값은 사상 최고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병합 의지가 부각되자 올해 들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던 S&P500 지수는 이날 하루만 143.15포인트 떨어지며 연초 이후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하락폭은 지난해 10월 10일 이후 3개월 만에 가장 컸다. 인공지능(AI) 거품론과 반도체주 급등으로 고점 부담을 느끼던 투자자들이 지정학적 불확실성까지 겹치자 위험자산을 대거 정리한 것이다.
반면 시장 불안이 커지면서 금값은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미국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날 런던 현물 금 가격은 트로이온스당 4701.23달러까지 올라 사상 처음으로 4700달러 선을 넘어섰다. 팀 워터 KCM트레이드 수석 애널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국제정치 행보와 저금리 지향 정책이 귀금속 시장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금·은·구리에 투자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도 자금이 빠르게 유입됐다. 1월 21일 코스콤 ETF 체크에 따르면 최근 1주일간 금과 은에 투자하는 주요 ETF에 각각 1000억 원 이상이 순유입됐다. ‘KODEX 은선물(H)’에는 1303억 원, ‘ACE KRX 금현물’에는 1110억 원이 들어왔다. 구리 투자 ETF 가운데 순자산 규모가 가장 큰 ‘TIGER 구리실물’에도 396억 원이 유입됐으며, 글로벌 금 채굴 기업에 투자하는 ‘HANARO 글로벌금채굴기업’ 역시 93억 원 순유입을 기록했다.
덴마크 연기금도 미국 국채 팔아
이번 금과 은 가격 급등의 도화선은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병합 강행 의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9년에도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사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으며, 라르스 뢰케 라스무센 당시 덴마크 총리는 “만우절 농담 아니냐”고 일축했다. 그럼에도 주권 국가 영토를 부동산처럼 매입하려는 발상을 반복하는 배경에는 북극항로와 희토류가 있다.
그린란드는 아시아·유럽·북미를 잇는 북극항로와 맞닿아 있다. 기후변화로 얼음이 녹으면서 북극항로는 수에즈 운하보다 짧고 빠른 대체 항로로 주목받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북극항로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여기에 그린란드에는 약 1500만t 규모의 희토류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중국이 사실상 장악한 글로벌 희토류 공급망에서 벗어나려는 미국으로서는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 21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설에서 그린란드에 병력을 파견한 유럽 8개국을 대상으로 예고했던 관세를 철회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병합 의지를 거두지 않는 한 미국달러 자산에 대한 기피 현상이 이어지고 금과 은 가격이 추가로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는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될 경우 동맹국 간에도 상대국 부채를 보유하려는 유인이 줄어들고, 금 같은 ‘경화’를 선호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경화는 국경을 넘어 통용되고, 가치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자산을 의미한다.
실제 자금 이동도 나타나고 있다. 덴마크 학술인 연기금인 아카데미커펜션은 현재 보유 중인 미국 국채 1억 달러(약 1470억 원)어치를 이달 말까지 모두 처분하기로 했다. 유럽 국가들은 현재 약 8조 달러(약 1경2000조 원) 규모의 미국 주식과 채권을 보유한 최대 채권자다. 안데르스 셸데 아카데미커펜션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미국은 기본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국가라고 보기 어렵다”고 매각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번 결정이 그린란드 사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지만, 갈등 상황이 판단을 어렵지 않게 만든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소니 쿠마리 호주뉴질랜드은행(ANZ) 원자재 애널리스트는 “은 가격이 세 자릿수로 올라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조정과 높은 변동성을 동반할 수 있다”고 1월 21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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