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에 탄 남자가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앞에 놓인 책상을 짚고 서자 판사는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 이 판결에 불복이 있으면 항소할 수 있고…”라고 판결 주문을 읽어 내려갔다. 남자는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 검거를 도왔던 출장마사지 업소 사장 A 씨(42)다. 영화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에게 “야, ‘4885’ 너지?”라고 외치는 엄중호(김윤석·사진)의 실존 인물이다.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부장판사 이효두)는 마약 매매·투약 혐의로 기소된 A 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고 14일 밝혔다. A 씨는 유영철 검거에 기여했고, 중국 흑사파와 연루된 마약 조직에 대해 제보한 뒤 보복의 두려움으로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8시간 넘게 이어진 국민참여재판 끝에 배심원과 재판부는 중형을 선고했다.
변호인에 따르면 A 씨는 유도 특기생으로 경찰관이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이사를 간 새 동네에 적응하지 못해 탈선하기 시작했다. 18세 때는 지역 폭력조직에 가입하고 유흥업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4년. 자신의 업소 여종업원이 실종되자 경찰에 제보한 뒤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섰다. 수소문 끝에 그해 7월 15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에서 다른 업주들과 함께 격투 끝에 유영철을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 실종된 종업원은 유영철에게 살해당한 후였다.
당시 경찰은 A 씨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5000만 원의 포상금을 받기로 했지만 실제로는 2500만 원만 지급받았다. 현장 검증 과정에서 산림을 훼손했기 때문에 그 비용을 삭감해야 한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었다고 A 씨 변호인은 전했다.
수사에 관여한 경찰 40여 명은 특진했다. 하지만 현장검증에 참여해 20여 구의 훼손된 시체를 목격한 A 씨에게는 심리 치료 등 적절한 사후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A 씨의 누나는 “동생이 현장검증을 일일이 따라다녔고 사체들을 보고 돌아와서는 구토와 악몽에 시달렸다”고 했다. 상습적으로 마약 투약 및 매매 혐의로 처벌을 받곤 했던 A 씨는 아내의 권유로 2010년 이민을 결심했다. 하지만 호주로 떠나는 비행기에서 체포됐다. 마약 밀매 혐의였다.
구속된 A 씨에게 담당 검사는 마약 조직에 관한 제보를 하면 양형을 줄여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A 씨는 고민 끝에 중국 흑사파와 연루된 국내 14개 조직이 20만 명분의 마약을 밀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서울중앙지검은 이듬해 2월 198억 원 상당의 필로폰을 밀수·판매한 흑사파 두목과 조직원 4명, 국내 폭력조직 조직원 9명을 검거했다.
보복을 두려워하는 A 씨에게 검찰은 정착금, 개명, 성형 등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A 씨는 검찰이 마련해 준 안전가옥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안전가옥 생활 3일 만에 괴한에게 습격을 받아 머리를 다쳤다. 불안한 안전가옥 생활마저도 증언이 끝나자 13개월 만에 끝났다. 정착 비용으로 받기로 한 3000만 원에서 안전가옥 월세와 식비 등을 제하고 그의 손에는 540만 원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A 씨는 안전가옥을 떠난 지 한 달 만인 2012년 1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내는 혼자 캐나다로 떠나버렸다. 그 후로도 A 씨는 마약 때문에 수차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2001년부터 2013년까지 8차례에 걸쳐 처벌을 받았고 2005년 이후 법정에 섰을 땐 유영철 검거 및 마약조직 검거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세 차례에 걸쳐 양형 결정에서 선처를 받았다.
올해 1월 A 씨는 마약을 끊겠다며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그를 진료한 의사 김모 씨(57)는 A 씨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대인기피증, 약물 의존증 등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며 처벌보다 치료가 필요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이미 수차례 선처를 받은 A 씨에게 이번에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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