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동서남북]도지사의 글쓰기와 한글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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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호·광주호남취재본부장
정승호·광주호남취재본부장
동아일보 기자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대변인을 다섯 차례나 지낸 이낙연 전남지사의 글은 세련되고 깔끔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지사의 언론계 후배는 “이낙연 선배는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청국장은 아무렇지 않게 먹어도 군더더기가 들어 있는 글은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소탈한 성격이지만 잘못된 글을 보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이 지사의 글쓰기에 관한 태도를 함축한 표현이다.

“이·통장 여러분은 통로입니다. 통로는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됩니다. 쌍방향이어야 통로로서 기능을 합니다. 행정이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그 행정이 모순은 생기지 않는지, 주민들의 어려움을 행정이 모르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쌍방향 통로가 바로 여러분입니다.” 지난달 9일 전남 이·통장연합회 워크숍 축사의 한 대목이다. 호소력이 돋보이는 연설이다. 이 지사는 연설문 담당 공무원이 있지만 대부분 경축사를 직접 쓴다고 한다.

올해 8·15 경축사도 명연설문으로 꼽힌다. “우리는 광복 70주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상황에 안주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한편으로 광복 70년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광복 70년의 부채를 청산하기 시작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이 지사의 글은 쉽고 명료해 전달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지만 도청 누리집의 공지사항이나 보도자료, 고시공고 등의 글은 그다지 ‘도민 친화적’이지 않다. 외래어와 관행적으로 사용해 온 일본식 용어, 지나치게 어려운 한자 중심 단어가 많은 탓이다.

‘2015년산 공공비축미곡 12만4000톤 매입’이란 제목의 보도자료(9월 30일자)에는 ‘포대벼’ ‘산물벼’ ‘조곡’이란 단어가 나온다. 국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단어는 없다. 포대벼는 포대에 담은 건조한 벼, 산물벼는 건조하지 않은 벼, 조곡은 방아 찧지 않은 벼라는 것을 담당 부서에 물어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공란’, ‘상기한 바와 같이’, ‘시방서’, ‘이하 여백’ 등 일본식 용어도 여전하다. ‘빈칸’, ‘위와 같이’, ‘설명서’, ‘아래 빈칸’ 등 쉬운 말이 있는데도 말이다. 외래어 남용은 더 심각하다. ‘랜드마크(표지물)’, ‘벤치마킹(본 따르기)’, ‘인센티브(성과급)’, ‘태스크포스(특별전담조직)’, ‘턴키(일괄)’, ‘바우처(이용권)’, ‘거버넌스(민관협력)’ 등은 한글보다 흔하게 쓰이고 있다.

9일은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제569돌 한글날이다. ‘글쓰기의 달인’인 이 지사가 한글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도청 공무원에게 특강이라도 한번 하는 것은 어떨까. 공직자를 대상으로 ‘우리말 경진대회’를 열어 시상하는 것도 어려운 행정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도청 누리집 ‘도민의 소리’란에 한자어나 외래어 순화에 대한 의견을 받아 개선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우리글은 갈고 닦아야 더욱 빛나는 법이다.

정승호·광주호남취재본부장 sh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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