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어른들의 사정, 몰염치의 사정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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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 매거진 도미노 동인
함영준 매거진 도미노 동인
철들지 않음이 그럴듯한 수사가 되는 때가 있다. 거기에는 보통 회한이 동반된다. 살아오며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 차라리 모를 때가 더 좋았다는 것. 아마 모든 사람은 자신이 꿈꿨던 미래와는 전혀 다른 미래를 살고 있을 것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정작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여러 가지 인생의 조건에 부딪히고 있을 것이다. 그 운명의 고리에 피로를 느낄 때,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세상의 논리를 탓하며 철들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이상향으로 설정하곤 한다. 그러므로 노스탤지어는 다소 운명적인 현상인 셈이다.

그런데 철들지 않았을 때를 그리워하는 것이 조금쯤 비정상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되는 삶의 또 다른 법칙을 일컬어 인터넷에서는 종종 ‘어른의 사정’이라는 말을 쓴다. 애니메이션 건담 시리즈에서 유래한 이 표현은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섰을 때 겪게 되는 불합리한 일을 설명하기 힘들 때 전가의 보도처럼 쓰인다.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른의 사정이 있단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는 뉘앙스와 함께 사안의 불합리함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일단은 이해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철이 들었다는 것,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종종 사회의 불합리를 너도나도 함께 암묵적으로 이해해야 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법적으로 성인이 된 지 십수 년이 흘렀지만, 요즘에 들어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소위 ‘어른의 사정’이라고 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소소한 일상부터 뉴스를 장식하는 수많은 희비극에 모두 담겨 있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밀치고 다니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에게도 아마도 그래야 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자살을 선택한 기업가가 고작 몇 십억 원을 뿌린 것으로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는 데에도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용되는 사정이 있을 것이다. 경남도지사가 무상급식을 그만두고 선택적 복지를 선택한 것에도 그가 진정 선택적 복지를 지지하느냐는 사상적 배경 이외에도 어떤 정치 공학적 논리, 즉 ‘어른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를 무리하게 증축해서 운항한 데에도, 인명보다도 공무원적 보고 체계가 우선하는 데에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바다에 빠진 배를 인양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데에도 사건의 진실을 파악해야 한다는 원래의 목적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사정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건을 저지르는 범죄자부터 사건을 판결하는 사법부, 그리고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까지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어른들에게는 제 직업이 가진 원래의 목적과는 동떨어진 사정 안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어른의 사정’들이 전부 손을 잡고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주로 사회의 기득권을 위한 사정이기 때문이다. 성별, 계급, 민족 등 모든 차이가 차별로 전환되는 순간 ‘어른의 사정’은 ‘남자의 사정’이 되고, ‘기업가의 사정’이 되고, ‘한 민족의 사정’이 된다. 그 때문에 여성 혐오를 드러내는 발언에는 남자끼리 있을 때 늘 일어나는 대화라는 변호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공학적 판단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깃발 아래에서 안온을 찾는다. 건설업에 종사하던 기업가가 정치인에게 돈을 뿌려야 했던 속사정에 대해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가 기자회견에서 흘렸던 눈물이 가진 괴상한 진정성에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먹고살기 위해 정치인에게 줄을 대야 했던 본인의 운명에 대해 느꼈을 자괴감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은 모르는 너희의 사정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면, 정작 소외의 대상으로 남게 될 자들은 누구일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쩔 수 없이 꺾이게 된 올곧은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철들지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철든 사람들 사이의 일원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어른의 사정’이 사실은 제 밥그릇을 위한 ‘몰염치의 사정’이었음을 인정하고 불문율에 변화를 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몰염치의 사정’을 이해할수록 사회의 윤리적 기준은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다. 과거가 아름다웠던 것이 어떤 순수의 상징이기 때문이라면, 그 순수는 멀리에 있지 않다.

함영준 매거진 도미노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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