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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상처뿐인 열아홉 할머니 의사 아들로 19년… 지켜드린다는 그 말 지키며 살겠습니다

입력 2014-03-13 03:00업데이트 2014-03-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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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동협 곽병원 원장(왼쪽)이 지난달 11일 이수산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오른쪽부터)와 함께 곽병원에 입원 중인 김달선 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구=최지연 기자 lima@donga.com
‘당뇨병, 요로감염, 신장결석, 뼈엉성증(골다공증) 등…. 윗배엔 일본군의 칼에 찔려 생긴 상처가 있음. 향후 평생 치료가 필요함….’

캄보디아로 돌아간다는 훈 할머니의 말에 걱정이 덜컥 앞섰다. 곽동협 대구 곽병원 원장(57)은 급한 마음에 펜을 꺼내들고 영어로 진료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까지 왕진을 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치료를 제대로 받으셔야 할 텐데….’ 작성한 진단서를 훈 할머니 손에 쥐여주면서도 곽 원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16세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지로 끌려 다닌 훈 할머니. 1998년 한국으로 귀국한 뒤 곽 원장에게 진료를 받은 할머니는 결국 눈물과 상처만 안겨준 캄보디아로 다시 돌아가 3년 뒤 세상을 떴다.

19년 동안 곽 원장은 대구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 열아홉 분을 만났다. 그중 살아계신 분은 단 여섯 분. 훈 할머니를 포함해 그새 열세 분이 세상을 떴다. 어깨가 무겁다. 더이상 시간이 없다. 이렇게 할머니들을 계속 떠나보낼 순 없다.

○ 온몸에 새겨진 고통의 흔적들

“곽병원서 대구에 계신 우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진료해 줄 수 있을까요.”

광복 50주년을 맞던 1995년 8월 15일 즈음, 대구여성회에서 연락이 왔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주치의가 되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곽 원장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그해 8월 24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무료 진료를 승낙한 지 일주일 만에 문옥주 할머니가 처음 병원을 찾았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두 번째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증언하신 분이었다. 주름이 깊게 파인 얼굴, 희끗희끗한 머리…. 평범한 70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문 할머니 이후 병원을 찾은 이용수 할머니, 심달연 할머니, 김분선 할머니, 정서운 할머니 등 곽 원장이 마주한 열아홉 분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상처는 너무도 컸다.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통증과 골절, 어린 나이에 잦은 성 접촉으로 생긴 자궁경부암, 만성신부전증 등의 후유증 외에도 외음부와 엉덩이, 복부 등엔 일본군의 칼에 찔린 상처 자국이 선명했다.

가슴이 기억하는 상처는 더욱 참혹했다. 곽 원장이 진료한 할머니 열아홉 분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었다. 아픈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게 힘들어 병원을 피하는 할머니도 많았다. 1년에 한 번 있는 무료 종합검진도 마다했다.

‘병원에 일단 오셔야 진료를 할 텐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고민 끝에 곽 원장은 직접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감기약을 들고 할머니들 댁을 찾기도 했다. 특히 중풍과 만성신부전증 등으로 몸을 전혀 못 움직이던 서봉임 할머니에게는 꼬박꼬박 왕진을 갔다. “곽 선생님, 정말 고마워.” 할머니들은 집까지 찾아온 곽 원장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용수 할머니 30회, 김분선 할머니 28회, 심달연 할머니 15회, 이남이 할머니 15회….’ 무료 진료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1998년 한 해 동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입원한 횟수다. 할머니들은 더이상 병원에 오는 걸 꺼리지 않았다. 저 멀리 경남 진주에 사는 정서운 할머니도, 캄보디아에서 귀국했던 훈 할머니도 소문을 듣고 곽병원을 찾았다. 할머니들은 그렇게 곽 원장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갔다.

○ 첫 만남, 첫 이별 되다

1996년 10월 26일, 무료 진료를 시작한 지 일 년을 막 넘기던 무렵 문옥주 할머니가 세상을 떴다. 혈액 투석에도 불구하고 만성신부전증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 당시 나이 75세. 위안부 피해 할머니 중 첫 진료 환자인 문 할머니는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 그렇게 고통스러웠어야 했나.’ 병상에서도 줄곧 ‘민간기금은 절대 안 된다’고 외쳤던 문 할머니를 떠올리자 곽 원장은 괴로웠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여성을 위한 평화국민기금’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을 전달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단호했다.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소용없다고 했다. 눈감는 그 순간까지도 할머니는 가슴에 맺힌 평생의 한을 풀지 못했다.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할머니들 가슴의 피멍은 아물기 힘들었다. 1997년 12월, 곽 원장은 뜻을 같이하는 대구의 지인들과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했다. 평소 할머니들을 돕고 있던 대구여성회 회원과 학생들, 최봉태 변호사 등 수십 명이 시민단체에 참여해 힘을 보탰다.

곽 원장도 흰 가운을 벗고 할머니들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재판에 참가하고 평양과 중국 상하이, 필리핀 마닐라 등지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 문제 관련 국제연대협의회에 한국 대표로도 나갔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의 대표도 됐다. 직책은 점점 많아지고 몸은 한 개로도 부족했다. 하지만 열심히 뛰어다닐수록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곽 원장은 할머니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 계속되는 이별

‘지켜드린다고 약속했는데…. 거짓말쟁이가 됐구나.’

시간은 할머니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훈 할머니, 서봉임 할머니, 김분선 할머니, 심달연 할머니, 김순악 할머니, 박재남 할머니, 정서운 할머니…. 문옥주 할머니를 시작으로 할머니 한 분 한 분이 곽 원장의 곁을 떠났다. 마지막 보내드리는 길은 언제나 마음이 허했다. ‘이렇게 계속 떠나보내야 하는가….’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했지만 역사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일본의 망언들에 화가 치밀었다. 제대로 된 사죄 한 번 받지 못하고 서럽게 살다간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졌다.

할머니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기력이 떨어졌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종합검진도 의미가 없어졌다. 그때그때 필요한 진료를 하면 그만이었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지….’ 곽 원장의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갔다.

○ “그래도 곽 원장 덕분에 살아”

“병나면 곽병원 와서 한 달씩, 두 달씩 영양제도 맞고 그려. 우리 원장님은 건강해져야 또 집으로 돌려보내.”

지난달 11일 곽병원을 찾은 이수산 할머니(86)가 기자에게 곽 원장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용수 할머니(86)도 신이 났다. “우리는 돈이라는 걸 낸 적이 없어. 선생님이 죄다 내지. 밥값은 말할 것도 없고 비보험 약 탈 때도 다 알아서 내주고…. 10년째 그렇게 해오고 있어.”

곽 원장은 할머니들이 다른 병원에 입원하게 될 때도 꼬박꼬박 진료비를 대며 챙겼다. 쉬는 날이면 할머니들과 술도 마시러 가고 노래방에 가서 함께 노래도 불렀다. 그런 곽 원장이 편해 할머니들은 병원을 찾는 발걸음이 즐겁고 고맙다. 이렇게 친해진 이용수 할머니는 요즘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와 관절 치료를 받고 혈압약과 혈액순환제를 타간다. 이수산 할머니는 배탈이 나도, 감기가 걸려도 조금만 아프면 곽병원을 찾는다.

이용수 할머니와 이수산 할머니, 곽 원장은 이날 지난해 5월부터 중풍으로 곽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달선 할머니를 찾았다. 코에 꽂은 고무호스 때문에 입을 떼기 힘들었지만 반가운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김 할머니도 어느덧 89세. ‘할머니도 언젠가 세상을 뜨겠지.’ 곽 원장의 마음은 또다시 무거워졌다.

○ 시간은 흐른다

똑같은 이야기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22년간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어느덧 1000회를 훌쩍 넘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의 외침에 등을 돌린 지 오래다. 국내에 생존해 계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단 55명. 이들의 평균 나이는 88세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방한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만나 사죄의 뜻을 전했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는 그나마 양심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지만, 곽 원장의 생각은 다르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문의 두루뭉술한 사과는 할머니들 마음에 두 번 대못을 박았을 뿐이다. 민간단체들이 백날 나서 봐도 정부가 적극 나서지 않으면 해결은 요원하다.

‘뒷방 늙은이.’ 곽 원장이 요즘 본인을 일컫는 말이다. 할머니들 진료에 힘쓰다 역사 문제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다시 조용히 병원에서 진료만 보고 있다는 자조 섞인 표현이다.

하지만 곽 원장은 뒷방에서도 열심히 할머니들을 응원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를 알리는 강의를 나가고 조윤옥 할머니 일대기, 심달연 김순악 할머니 삽화 작품집 등을 만들며 할머니들의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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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시민단체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할 무렵 곽 원장이 단체 소식지에 기고했던 글의 제목이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곽 원장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할머니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도록 계속 힘을 보태고 목소리를 내려 한다. 오늘도 입술을 굳게 다물고 다시 한 번 다짐한다. ‘할머니,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하고.

대구=최지연 기자 lim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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