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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스포츠

[Narrative Report]두번째 축제… 숨어 핀 17송이 소치의 꽃

입력 2014-03-06 03:00업데이트 2014-03-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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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환 감독(뒷줄 오른쪽)이 이끄는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지난달 18일 강원 춘천 의암빙상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날을 끝으로 국내 훈련을 마친 선수들은 체코에서 전지훈련을 한 뒤 2일(한국 시간) 결전의 장소인 소치에 입성했다. 한국은 9일 개최국 러시아와 첫 경기를 치른다. 춘천=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바지를 벗는다. ‘다리’도 함께 벗는다. 몸을 떠난 다리들이 트레이닝복 하의를 걸친 채 벤치에 기대어 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선수들이 슬레지(Sledge·썰매)에 앉았다. 얼음을 만나려면 펜스에 붙어 있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썰매를 탄 채 이동하는 일은 어렵다. 기우뚱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간다. 옷에 밴 땀 냄새가 지독하다. 힘겨운 시간은 잠시였다. “쉬익∼ 쉬익∼.” 썰매의 날이 얼음 위에 닿는 순간 17명은 돌변했다. 그물에 있다 연못을 만난 잉어처럼 펄떡거린다. 쏜살같이 달리는가 싶더니 맹수처럼 거칠게 몸싸움을 한다. 가슴에 붙어 있는 태극마크, 그들은 아이스슬레지하키 국가대표다.

○ 다리를 절단했다. 드디어 걷게 됐다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어린 시절 한민수 씨(44·강원도청)는 간절히 기도했다.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살 때 침을 잘못 맞은 게 문제였다. 나중에 알게 된 병명은 류머티스 관절염. 왼 무릎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목발을 짚고 다니며 장애인이 아니라고 우겼지만 인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돼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이 서른에 아예 그 다리를 잘랐다. 한동안 상실감에 빠져 있다 깨달았다. 의족이지만 비로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휠체어농구와 역도를 즐겨 했던 그는 다리를 자른 2000년 슬레지하키를 시작했다. 시속 100km가 넘는 퍽(Puck)이 날아다니는 얼음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다리는 없는 게 나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저는 행복한 거죠. 서른까지 신나게 달려 봤으니까요.”

이종경 씨(41·강원도청)는 만능 레포츠맨이었다. 180cm의 키에 늠름한 어깨를 가졌다.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어느 날. 그는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멋지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착륙은 최악이었고 척추를 다쳤다. 장애인이 됐다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레포츠를 더는 못하게 됐다는 게 너무 슬펐다. 재활병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이 슬레지하키였다. 다른 스포츠도 해 봤는데 그만한 게 없었다. 다리가 멀쩡했다면 모르고 살았을 운동이었다.

“슬레지하키는 의족이 필요 없어 좋아요. 예전엔 많이 망가뜨렸는데….”

정승환 씨(28·강원도청)는 이 씨보다 열세 살 어리다. 그래도 슬레지하키 ‘구력’이 10년으로 이 씨에게 겨우 1년 뒤진다. 2004년 한국복지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동기였던 이 씨가 그를 끌어들였다. 2003년 클럽에서 슬레지하키를 시작한 이 씨는 ‘늦깎이 신입생’으로 이듬해 이 대학에 입학했다. 정 씨는 다섯 살 때 오른 다리를 잃었다. 공사장 근처에서 혼자 놀다 파이프에 깔렸다. 그때부터 의족은 그의 몸이었다. 축구를 할 때도, 농구를 할 때도 함께였다. 2004년 대학에 들어온 뒤부터는 달라졌다. 정 씨가 얼음 위에 있을 때 의족은 신발을 신은 채 벤치를 지켰다. 정 씨가 의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은 점점 늘었다. 키 167cm, 몸무게 53kg의 작은 체구지만 누구보다 빠른 스피드로 얼음 위를 지배했다. ‘독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훈련을 감내한 덕분이었다. 정 씨는 입문한 지 2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어느새 대표팀의 에이스가 됐다.

○ “아무도 모르지만”… 2회 연속 패럴림픽 출전

아이스하키는 겨울올림픽의 꽃이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관중은 전체의 절반이었다. 한국은 1948년 생모리츠(스위스) 대회부터 출전했지만 한 번도 이 종목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세계의 벽이 그만큼 높다. 아이스슬레지하키는 다르다. 8일(한국 시간) 개막하는 소치 겨울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 나간다. 처음이 아니다. 2010년 밴쿠버 패럴림픽에도 본선 진출 8개국에 포함됐다.

아이스슬레지하키는 하반신 장애인을 위한 아이스하키다.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타고 한 개의 스틱 대신 양 끝에 픽(Pick)과 블레이드(Blade)가 달린 두 개의 스틱을 사용한다. 픽은 썰매를 지칠 때, 블레이드는 퍽을 때릴 때 쓴다. 1960년 스웨덴에서 시작돼 1994년 릴레함메르(노르웨이) 패럴림픽에서 정식 종목이 됐다. 국내에 도입된 것은 1998년으로 20년이 안 된다.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다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고 이성근 씨가 일본에서 전용 썰매를 기증받은 게 계기였다.

대표팀 김익환 감독(48)은 비장애인이다. 경희대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으로 국가대표 ‘골리’(골키퍼)였다. 부친인 고 김원길 씨도 골리로 12년 동안 태극마크를 달았다. ‘원조 아이스하키 집안’이다. 이전부터 아이스슬레지하키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올림픽 무대를 밟기 위해 사령탑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국은 밴쿠버에서 8개국 가운데 7위에 그쳤다. 예선 3경기를 모두 졌고 7, 8위 순위 결정전에서 스웨덴을 겨우 이겼다. 쓴 경험은 약이 됐다. 2012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은메달을 땄고 정승환 씨는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달콤함은 독이 됐다. 한국은 지난해 4월 국내에서 처음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안방의 이점을 앞세워 우승까지 노렸지만 A풀(상위 그룹) 8개국 가운데 7위에 머물러 5위까지 주어지는 패럴림픽 직행 티켓을 놓쳤다.

한국은 패럴림픽 출전을 향한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지난해 10월 토리노에서 열린 최종 예선에 나섰다. 한국은 5전 전승으로 1위에 오르며 티켓 3장 가운데 하나를 거머쥐었다. 자신감을 되찾은 한국은 12월 캐나다에서 열린 월드챌린지대회에서 4강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캐나다, 미국, 러시아가 1, 2, 3위를 했지만 이보다 놀라운 것은 한국이 4위를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번 패럴림픽에 출전하는 8개국 가운데 아시아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 태극마크는 나의 힘, 그리고 나의 삶

“딸들이 아빠가 자랑스럽대요. 국가대표라서.”(한민수 씨)

다리를 자른 한민수 씨는 자신보다 자식을 걱정했다. ‘장애인의 딸’이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스러웠다. 기우였다. 잘생긴 아빠를 빼 닮은 예쁜 두 딸은 자상하고 재미있는 데다 국가대표인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다. 두 딸에게 아빠가 달고 있는 태극마크는 이상화나 김연아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죠.”(이종경 씨)

이종경 씨는 스물아홉에 장애인이 된 뒤 한동안 부모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커다란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았다. 누군가 아들의 근황을 물을 때면 애써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모습이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는 것 같아 죄송했다. 2004년 국가대표가 된 뒤로는 달라졌다. 누가 물어보기 전에 이제는 부모님이 먼저 아들 얘기를 꺼낸다.

“저도 국가대표가 된 게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었죠.”(정승환 씨)

이종경 씨의 말에 정승환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더 많이 신경을 쓴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정 씨는 대학 졸업 후 국내 유일의 실업팀인 강원도청에 입단했다. 덕분에 생계 걱정 없이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청년 실업 속에서 단박에 ‘취업’한 아들을 보며 부모님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동호인들의 취미 정도였던 아이스슬레지하키가 국제 수준으로 도약한 것은 2006년 강원도청이 팀을 창단한 덕분이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면서 선수들의 실력이 크게 늘었다. 이번에도 강원도청 선수 11명 전원이 대표팀 17명에 포함됐다. 나머지 6명은 클럽 선수들이다.

대한민국 아이스슬레지하키 대표팀의 얘기는 SBS PD 출신 김경만 감독(44)이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로 만들었다. 김 감독은 “신문기사를 통해 이 종목을 알게 됐고 태흥영화사 이효승 전무와 의기투합해 제작했다. 흥행을 떠나 사람 냄새가 나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3년 동안 틈틈이 촬영을 했고 6개월가량의 수정 작업을 거쳐 올 1월 완성됐다. 하지만 언제 상영될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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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이 맞닥뜨린 장애인에 대한 이 사회의 편견은 여전히 지독하기 때문이다. 소재를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도 했지만 김 감독은 촬영을 계속 하며 오기가 생겼다. 시골 마을회관에서 무료로 상영하더라도 이들의 행복한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오기를 부추긴 것은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선수들의 말이었다.

2일 결전의 장소인 소치에 입성한 대표팀은 9일 개최국 러시아와 만난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올림픽’에서 아름다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춘천·소치=이승건 기자 w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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