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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마음 졸여, 희망을 졸여… 마침내 복음이 된 잼 중의 잼

입력 2014-03-20 03:00업데이트 2014-03-2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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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은 ‘복음’이다. 복음자리 잼은 경기 시흥시 복음자리 마을의 철거민에게 일자리를 줬고, 지금은 판매 수익금 중 일부를 이주여성과 홀몸노인 등을 위해 쓴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 시민대로에 위치한 복음자리 본사에서 복음자리 임직원과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의 관계자들이 함께 활짝 웃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980년대 초 경기 시흥군 소래읍의 한 마을. 곳곳에 퍼지는 딸기 향은 봄이 왔다는 신호였다. 자전거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에서 아낙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마을 사랑방’인 아름이네 집 앞에서 상훈이 엄마를 비롯한 서너 명의 아낙들이 딸기를 씻어 다른 아낙들에게 넘겼다. 이들은 빠른 손놀림으로 딸기 꼭지를 떼어내고 으깬 뒤 설탕을 부었다.

바로 옆 ‘석유곤로’ 앞에는 아낙 20∼30명이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낙들은 불 위의 양은대야에 딸기를 수북하게 담고는 주걱으로 젓고 또 저었다. 마을의 수녀님들도 손을 보탰다.

딸기는 서서히 걸쭉해졌다. 달콤한 향이 모락모락 퍼지자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 몰려왔다. 아낙들은 걷어낸 딸기 거품을 식빵에 발라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내줬다. 아낙들이 두어 시간 꼬박 딸기를 졸여내면 딸기잼이 됐다. 이 잼은 전국 각지의 성당으로 팔려나갈 것이었다. 아낙들은 어둑할 때까지 딸기가 담긴 대야를 저었다.

○ 복음이 깃드는 보금자리

마을에서 잼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 사람들은 원래 서울 양평동의 판자촌에서 살았다. 마을 이름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복음자리’라고 붙여줬다. 복음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福音)이 깃드는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김 추기경은 주민들과 판자촌에 함께 살던 미국인 정일우(본명 존 데일리) 신부와 친분이 깊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77년 ‘마을을 재개발할 예정이니 판자촌을 철거하겠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눈앞이 깜깜했죠. 이사 갈 장소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어요. 그러다 땅값이 평당 7000원인 소래읍을 발견했어요. 근처인 경기 부천시의 땅값이 평당 3만 원 하던 시절이어서 여기다 싶었죠.”(아름이 엄마·신명자 씨)

문제는 건축비였다. 다행히 김 추기경이 지원군이 돼 줬다. 그는 독일의 천주교단체에 ‘SOS’를 보내 10만 달러의 원조금을 받아 보증까지 서줬다. 덕분에 정일우 신부와 양평동 판자촌 사람들(170가구)은 소래읍에 함께 이사와 ‘또 다른 복음자리’를 꾸릴 수 있었다.

주민들은 스스로 집을 지었다. 방 두 개에 부엌 하나인 40m²(약 12평) 안팎의 집이었다. 공동화장실을 써야 했지만 그래도 ‘내 집’이어서 행복했다. 그렇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여전히 고민이었다. 새 복음자리 마을로 이주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신 씨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생계 걱정을 덜 하며 살 수 있을까….

신 씨는 마을 주변의 포도밭을 눈여겨봤다. 과수원에선 땅에 떨어진 포도 알갱이를 싸게 팔았다. 크기도 작고 볼품은 없었지만 맛은 좋았다. ‘이걸로 잼을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옆집의 정일우 신부가 빵을 좋아하지만 시중에서 파는 잼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떠올랐다. 고향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준 잼과 맛이 다르다는 게 이유였다.

○ 과일 두 바가지에 설탕 한 바가지

당시 시중의 잼은 점성을 높이기 위해 첨가물을 많이 썼다. 잼이라기보다 차라리 젤리라고 부르는 게 나을 정도였다. 또 생과일 대신 과일 가루(퓌레)를 썼다. 원료가 좋지 않으니 과일의 풍미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신 씨는 연탄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포도며 딸기, 복숭아, 자두 등 온갖 과일을 졸여보기 시작했다.

외국인 수녀님들이 훈수를 뒀다. 수도원에서 담그는 잼은 설탕과 과일로만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쉽지 않았다. 잼은 적정한 점성을 지니게 하는 게 중요한데 너무 많이 졸이면 아예 눌어붙어 버렸다. 그렇다고 덜 졸이면 곰팡이가 필 염려가 있었다. 수백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신 씨는 ‘과일 두 바가지에 설탕 한 바가지’라는 단순하고도 귀한 레시피를 얻을 수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서울의 난곡, 상계동, 목동 등지의 철거민들도 복음자리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잼을 만들기 시작했다.

딸기 국물이 여기저기 튀는 건 다반사였다. 가벼운 화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낙들은 즐거웠다. 돈 벌 거리가 마땅치 않은 그들에게 잼을 만들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건 분명 고마운 일이었다.

상훈이 엄마, 정영금 씨도 그랬다. 남편은 건설현장에 일을 나갔지만 일거리가 없는 날이 적지 않았다.

“밭일, 전선 잇기, 봉투 붙이기 같은 부업을 간간이 했지만 일당이 쥐꼬리만 했어요. 잼을 만들면 돈을 서너 배나 많이 벌 수 있었죠. 잼 만들기는 구세주와 같은 일이었어요. 아이를 돌보면서도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은 매년 햇과일로 만든 잼 한 박스를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예수회의 외국인 신부들이 왔을 때 빵과 잼을 대접하면 “진짜 집에서 만든 게 맞느냐” 고 되물었다.

○ “수녀님들이 만든 잼” 입소문

마을 사람들은 잼을 주변 성당에 조금씩 팔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86년 인천 중구의 답동성당에서 바자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을 사람들은 구멍가게에서 사온 마요네즈병을 소독한 뒤 잼을 담았다. 마을 이름을 따서 복음자리란 이름을 붙였다.

“수녀님들이 부활절 달걀을 꾸미던 솜씨로 잼 병에 예쁜 라벨을 붙여주니 볼품없던 모양이 나아졌어요. 대박이었어요. ‘수녀님들이 만든 잼’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믿을 수 있다는 이유로 모두 팔려나갔으니까요.”

이후 복음자리는 전국의 성당에서 잼을 팔기 시작했다. 봄(4, 5월)에는 딸기로, 가을(10월)에는 포도로 잼을 만들어냈다. 마을 사람들의 손길도 바빠졌다. 그들은 서울의 영등포시장으로까지 원정을 가서 잼을 담을 헌 병을 구해오기도 했다.

성당의 주문이 몰려들자 잼을 만들던 양은대야는 어느 때부터인가 무쇠솥으로 바뀌었다. 1993년에는 드디어 경기 시화공단에 잼 공장이 세워졌다.

상훈이 아빠, 황영수 씨가 잼 공장에 일자리를 얻은 것도 이무렵이었다. 환갑이 코앞인 나이에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이 생겼다. 6·25전쟁 때 검지가 잘려 나간 데다 변변한 기술도 없어 일용직을 전전하던 그였다. 100만 원 남짓한 첫 월급을 받던 날 부부는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할 말을 잊었다.

마을 청년 김광남 씨는 잼 공장의 공장장으로 일했다. 김 씨는 “복음자리 공장은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일군 자랑스러운 일터였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맛있는, 멋있는, 안전한’이라는 소박한 사훈 아래 회사 일을 자신의 일처럼 했다.

경기 성남 분당신도시와 서울 목동, 잠실 등 부촌에서,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까지 잼을 사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소위 ‘백’ 없으면 만나지도 못한다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바이어들이 먼저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장세복 복음자리 영업본부장(이사)은 “일반 잼보다 가격이 20∼30%보다 비쌌고 대형마트에 판촉사원을 두지 않았는데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사갔다”고 말했다.

현재 복음자리는 할인점과 백화점의 잼 매출액에서 중소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링크아즈텍에 따르면 백화점에서 복음자리의 시장점유율은 28.5%(판매액 기준·2013년 기준)로 압도적인 1위다. 대기업인 대상(8.5%)이나 오뚜기(5.8%)보다 높다.

이달 1일에는 잼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영국에서 낭보가 들려왔다. 현지에서 열린 세계적인 잼 경연대회인 ‘더 월드 오리지널 마멀레이드 어워드’에서 복음자리 잼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번 대회에는 120여 년 전통의 영국 브랜드 ‘윌킨 앤드 선스’와 미국 1위 잼 기업인 스머커스 등이 내놓은 2000여 개의 제품이 경쟁을 벌였다. 복음자리는 이번 수상으로 영국 왕실에 납품하는 식료품 백화점 ‘포트넘 앤드 메이슨’에서도 제품을 판매하게 됐다.

○ 가난했지만 결핍하지는 않았다

현재 복음자리(회사)에 1980년대에 일했던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 복음자리 마을은 아파트단지로 바뀌었고 상훈이 아버지, 황영수 씨는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시흥에 살고 있는 상훈이 엄마 정영금 씨는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됐고, 아들은 대학 공부까지 잘 마치고 건실한 사회인이 됐다.

“남편이 복음자리 공장에서 일하며 고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준 덕택에 2000년대 중반 복음자리 마을에서 나와 더 큰 집을 마련했어요. 마을에서 생활했던 때는 가난했지만 결핍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들과 함께 잼을 만들고 어울리면서 진정한 복음을 찾았으니까요.”

복음자리는 2009년 ㈜대상에 인수됐다. 과일 알갱이가 씹힐 정도로 신선한 잼을 만드는 기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과거의 복음자리 운영주체는 이제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를 운영하며 저소득층과 다문화 여성 등을 대상으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는 직접 잼을 만들지는 않지만 복음자리 공장에서 잼을 시중가보다 싸게 공급받아 여전히 성당에 납품한다. 수익금은 사회복지 사업에 쓰인다. 복음자리 회사는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가 성당에 판매한 잼 매출액의 5%를 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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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복음자리 마을에 정착했던 최수자 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은 “복음자리 회사가 좋은 뜻에 귀한 돈을 쓸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대상 출신인 정찬수 복음자리 대표는 “(성당에서 잼을) 많이 팔아줘서, 그리고 정직한 잼을 만드는 기술을 전수해줘서 감사하다”며 “좋은 잼 만들기를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시흥=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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