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8>우리는 서로 충분히 만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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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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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나요, 엄마의 따스한 볼… 아름다워라, 老부부의 꼭잡은 손

친하게 지내는 선배 한 분이 있다. 소탈하고 영민한 정신을 가진 분이어서 나도 그와 자주 만나 세상과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최근 그는 나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멍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하게 자신의 속내를 풀어놓았다. 얼마 전 부인과 여행을 갔을 때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이제는 부인과 성관계를 갖기 힘들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당혹감을 느낀 그는 서둘러 호텔 프런트에 맥주를 주문했다. 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술에 취해 그냥 잠자리에 들려는 생각에서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여러 가지 일을 만들거나 다양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집에 늦게 들어와 아내와 직면하는 것을 피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이었을 것이다. 잠자리에서 부인이 무심결에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을 때는 숨이 턱 막힌다고도 했다. 이 경우 애써 잠든 척 밤을 새우게 된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그에게 감각과 관련된 이야기를 건넸다.

타인이나 세계와 관계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뉜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 등 오감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오감에 대한 동서양의 이해방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드러난다. 서양의 사유 전통에서 오감 중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시각이다. 서양철학을 시작했다고 하는 플라톤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에이도스(eidos)’라고 불렀는데, ‘이데아’나 ‘형상’이라고 번역되는 에이도스라는 말은 ‘보다’라는 뜻을 가진 ‘이데인(idein)’이라는 동사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반면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중시된 것은 시각에 앞서 촉각이었다. 불교 철학자 바수반두(Vasubandhu·世親)☆는 우리의 오감을 양파껍질처럼 위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 가장 표층에 시각이 있다면 가장 심층에는 촉각이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근 서양의 학자들도 플라톤적 전통을 벗어나 불교적 전통에 가까운 관점을 취하고 있다. 감각에 대한 흥미로운 저술로 알려진 다이앤 애커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아에게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은 촉각으로, 신생아는 눈을 뜨거나 세상에 대해 알기도 전에 자동적으로 촉각을 통해 느낀다. 우리는 태어나면 보거나 말할 수는 없어도 본능적으로 신체 접촉을 시작한다. (…) 신체 접촉은 ‘나’와 ‘타자’의 차이, 나의 외부에 누군가, 엄마가 있을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엄마를 만지고 엄마의 손길을 받는, 최초로 경험하는 따스함은 헌신적인 사랑의 기억으로 평생토록 남는다.

―‘감각의 박물학(A Natural History of the Senses)’

그렇다.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중요한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촉각이었던 셈이다. 애커먼의 말대로 촉각은 “나의 외부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동시에 “엄마를 만지고 엄마의 손길을 받는, 최초로 경험하는 따스함”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아들을 만나게 된 할머니가 어떤 행동을 먼저 할지를 생각해보자. 아들을 만나자마자 할머니는 아들의 얼굴과 몸을 정신없이 어루만지고, 아들을 품에 안으려고 할 것이다. 다른 예도 있다.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가 헤어지려고 하는 꿈을 꿀 때, 우리는 안타까운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그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촉각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울러 사랑하는 사람과 만지고 만져지는 따스한 애정을 확인하는 최종 절차였던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이 얼마나 유치했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시각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이 옳다면, 우리는 실종된 아들이나 그리운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다섯 가지 각각이 가지는 상이한 거리감과 관련된다. 시각이 내가 보려는 것과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야 가능하다면, 촉각은 내가 만지려는 것과 거리가 있다면 불가능한 법이다. 시각에서부터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으로 갈수록 우리는 자신이 감각하려는 대상에 밀접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감각에서 더 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처음 이성을 사귈 때 우리는 시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첫 만남에서 외모는 상대방의 호감도를 결정하는 유일한 계기가 된다.

첫 데이트 때부터 이성의 향내를 맡는다고 코를 상대방 몸에 붙이거나 키스를 할 수도 없는 법이니까. 사랑이 무르익으면 두 사람의 감각은 시각에서 청각으로 점점 내려가 촉각에 이르게 된다. 손을 만지고, 키스를 하고, 포옹하고, 나아가 온몸을 애무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여기서 한 가지 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애정 관계를 성기의 접촉, 즉 성교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해묵은 편견과 관련된 것이다. 애정 관계의 최종적 시금석을 성교에다 두는 편견은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조르주 바타유(1897∼1962)는 우리의 궁금증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금기는 대체로 대상의 성적 가치(혹은 에로틱한 가치)를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에로티즘☆☆의 역사(L'histoire d'´erotisme)’

가부장제는 아버지의 모든 권력과 재산을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물려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여인이 임신했을 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오직 임신한 그녀뿐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 아내가 “그 아들은 사실 다른 남자의 아들이다”라고 속삭인다면 가부장은 어떤 마음이 들까? 조선왕조 깊은 궁궐 안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남자는 군주 한 명뿐이었던 것도, 사대부 가정에서 결혼한 여인은 안채에 깊이 감금되어 안방마님으로 불리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성교가 함부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으로 굳어진 것, 그리고 여성에게 순결과 정조의 덕목이 강요된 것도 이와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교에 대한 금기가 성욕을 강화시켰다는 점이다. 바타유의 말대로 “금기의 대상은 금지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탐욕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에 붙은 ‘들여다보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하듯이, 성교에 대한 금기는 성욕을 자극한다. 마침내 남녀의 애정 관계에서 성교는 두 사람의 사랑을 상징하는 일종의 시금석이 되어버린 것이다. 불행한 것은 성교가 촉각을 통해 가능한 다양한 신체 접촉들 중의 단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실도 망각되었다는 점이다. 분명 성기에는 촉각과 관련된 신경세포가 많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촉각은 성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몸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을 잡거나 머리카락이나 등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갓난아이가 어머니 품 안에서 느꼈던 따스한 안정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반대로 그런 안정감을 상대방에게 전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교만이 남녀 사이의 유일한 신체 접촉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성적 능력이 감퇴하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그는 상대방을 만지려는 노력 자체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 대가는 치명적이다. 엄마의 품에서 떨어질 때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배와 이야기를 마치려는 순간, 어느 노부부가 손을 잡고 다정스럽게 카페에 들어섰다. 꼭 잡은 두 손은 노부부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안정감을 주는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다. 노부부는 해묵은 성교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사랑을 새롭게 꽃피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뜻한 포옹만으로, 혹은 따뜻한 손길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전해주고 받을 수 있는 법이다. 선배는 노부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돌아보니 노부부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여전히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부인과 손을 맞잡은 채 행복한 산책을 즐기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신체 접촉을 포기하는 순간 아무리 같은 집에 오래 살았어도 부부는 남남으로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항상 되물어볼 일이다. “우리는 서로 충분히 만지고 있는가?”

강신주 철학박사

::바수반두(世親·320?∼400?)☆::

유식불교학파(Yog ̄ac ̄ara school)의 창시자로서 그는 인간의 의식이 양파껍질처럼 여덟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제일 밑에 있는 기억의식만 제거하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덟 층위의 의식은 ‘눈의 의식(cakJur-vij~n ̄ana)’ ‘귀의 의식(Irotra-vij~n ̄ana)’ ‘코의 의식(ghr ̄aKa-vij~n ̄ana)’ ‘혀의 의식(jihv ̄a-vij~n ̄ana)’ ‘촉감의 의식(k ̄aya-vij~n ̄ana)’ 그리고 ‘의식(mano-vij~n ̄ana)’ ‘자의식(manas)’ ‘기억의식( ̄alayavij~nana)’이다. 저서로는 ‘유식20송(ViMIatik ̄ak ̄arik ̄avLtti)’ ‘유식30송(TriMIatik ̄ak ̄arik ̄avLtti)’ 등이 있다.

::에로티즘(Erotism)☆☆::
금기와 위반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사유를 대표하는 개념이다. 그는 동물적인 것이라고 폄하되었던 에로티즘이 역사와 사회를 갖는 인간에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로티즘은 금기시된 성적 대상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금기는 사회적 차원과 동시에 역사적 차원을 갖는다. 남녀가 같이 있는 것을 금기시했던 조선시대에는 남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당시 사람들은 강한 에로티즘을 느꼈을 것이다. 반면 현대에서는 남녀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에로티즘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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