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총장님, ‘해태’와 ‘해치’ 같나요 다르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2일 03시 00분


■ 이화여대 이배용 총장, 전교생 대상 수년째 ‘고궁가이드’

“재미있다” 입소문 퍼져… 대학총장들-美대사도 들어
“올바른 글로벌인재 되려면 우리역사 제대로 알아야”

9일 오후 서울 창덕궁에서 이화여대 이배용 총장이 학생들과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며 궁궐의 역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홍진환 기자
9일 오후 서울 창덕궁에서 이화여대 이배용 총장이 학생들과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며 궁궐의 역사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홍진환 기자
“아직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덕궁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고요.”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학생 수십 명을 데리고 역사문화체험을 나온 이화여대 이배용 총장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며 말했다. 이 총장은 임기 동안 매 학기 한 차례씩 학생들을 데리고 서울 시내 사적을 견학하며 직접 설명을 해 주는 ‘총장님과 함께하는 역사문화체험’ 행사를 열고 있다.

○ 가이드한테 들을 수 없었던 역사

조선시대사학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는 역사학자 이 총장은 궁궐 구석구석에 있는 장식이나 시설물의 의미나 용도, 배경 등을 놓치지 않고 짚어냈다. 돌다리 ‘금천교(錦川橋)’를 지날 때는 “아래 흐르는 물은 ‘비단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당시 관리들이 이 물 위를 지나며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내 공정한 정치를 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식이었다. 흥미진진한 설명에 학생들도 이 총장 옆에 바짝 붙어 집중해 설명을 들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동물이라는 ‘해태’ 상이 조각된 다리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물 위에 있는 동물은 ‘해태’, 땅 위에 사는 동물은 ‘해치’라고 부른다”고 말할 때는 학생들의 입에서 ‘아!’ 하는 탄성이 한꺼번에 터지기도 했다.

인정문(仁政門)을 지날 때는 기둥 아랫부분을 받치고 있는 돌의 모양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윗부분은 둥글고 아랫부분은 네모지게 생긴 돌의 모양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담았다는 것. 사랑을 담은 정치를 하라는 뜻인 인정전(仁政殿) 앞에 길게 늘어선 품계석(品階石)을 볼 땐 정4품 뒤로 종품계석 없이 정품계석만 서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4품 이후 종품계는 주로 지방관리나 국방을 담당하는 관리들에게 내려지는 등급이었습니다. 궁궐까지 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아예 자리를 만들지 않은 거죠.”

인정전 지붕 위에 새겨진 꽃 모양 장식을 가리킬 땐 목소리에 힘을 주기도 했다. “저 장식은 ‘오얏꽃’입니다. 궁궐을 만들 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일제가 일부러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머리를 쓰던 일제가 왕조를 ‘이조(李朝·이씨조선)’라고 낮춰 부르면서 오얏 이(李)를 상징하는 오얏꽃을 인정전 위에 박아 넣었다는 설명이다. 이 총장은 “여러분들이 우리 정신을 담은 ‘올바른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 입소문 들은 미국 대사도 참여

취임 전 사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이 총장은 취임 이후 대상을 전교생으로 확대했다. 2008년 발생한 숭례문(남대문) 방화사건 때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이 총장이 “그처럼 어이없는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우리 문화재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총장이 되면서 학생들과 직접 만날 기회가 적어진 점도 이 총장이 이 프로그램에 애정을 갖게 한 이유가 됐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 직을 맡고 있는 이 총장은 각 대학 총장들을 대상으로 고궁 안내를 해 주기도 한다. 그의 설명이 재미있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지난해에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비공개로 이 총장의 안내를 받아 창덕궁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 총장의 임기는 올해 1학기까지다. 총장 자격으로는 마지막 고궁 나들이였던 셈. 하지만 학생들이나 학교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총장 임기가 끝나도 이 프로그램이 계속 진행됐으면 한다”는 반응이 많다. 2008년 가을 학기부터 이 학교 경영학과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베트남 출신 응우옌티탄투이 씨(25·여)는 “예전에 창덕궁에 친구들과 왔을 땐 그냥 ‘예쁘다’고만 느꼈었는데 총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궁궐 자체가 새롭게 느껴진다”며 “다른 외국인 유학생들도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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