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루머 ‘조폭 여대생’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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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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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남자친구 시켜 협박-폭행”짝사랑 남자 인터넷에 허위 글“투신자살” 루머 돌며 악플 급증학교-이름 등 신상정보공개 파문

성탄절 분위기가 한창인 지난해 12월 24일. 한 인터넷 포털 게시판에 ‘억울한 사연’이 올라왔다. ‘정말 억울해서 미치다가 죽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이 쓴 것이다.

그는 짝사랑하는 여성에 대해 “자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조직폭력배인 남자친구를 시켜 벽돌과 담뱃불로 (나를) 마구 폭행했다”며 “이러면 안 된다고 항의하자 모 대학 분교 주제에 어디서 법을 운운하느냐며 장애인인 나를 비아냥댔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을 폭행한 이 여성의 대학, 학과와 성(姓)까지 공개했다. 엉성하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 글에 누리꾼들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작성한 글 말미에 “조만간 그 여자의 실명을 밝힌 탄원서를 작성해 A대 앞에 뿌리고 자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름 가까이 지난 9일. A대 지하철역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고교생 지모 군(18)이 역으로 들어오는 전동차에 투신자살한 것이다. 유가족은 자살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한 일부 언론은 “20대 후반 남성이 A대 지하철역에서 투신자살했다”고 자살자의 연령을 잘못 보도했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가 나온 후 엉뚱하게 ‘A대 지하철역 20대 자살’과 ‘장애인 폭행’이 서로 연결됐다. 눈치 빠른 누리꾼들이 A대 앞에서 죽을 것으로 공언했던 ‘장애인’이 실제로 이날 자살한 20대 남성이라고 여긴 것이다.

자살 사건이 발생한 9일 이후, 이 글이 처음 게시된 12월 24일자 게시판에는 방문자들이 들끓었다. 누리꾼들은 댓글로 ‘A대 앞 지하철 자살사건’ 기사를 링크해 놓고 원본 글과 상황을 정리해 ‘○대 ○학과 ○○학번 ○ 양’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퍼뜨렸다. 자살 사건 이후 이 글은 조회수가 1만 건을 넘는 등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실제로 남자가 자살했다고 믿은 몇몇 누리꾼은 ‘자살한 남성의 명복을 빈다’거나 ‘○ 양을 도축하자’ 등의 험악한 댓글을 달았다. 누리꾼의 엉뚱한 오해와 보도 때문에 ○ 양은 졸지에 가련한 한 남성의 자살을 유도한 ‘살인자’가 된 셈이다.

이 사건의 당사자 ○ 양은 2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해당 글은 1년 전부터 나를 따라다닌 한 남성이 올렸으며 그는 죽지 않았다”며 “장애인, 폭행 등 그가 올린 글 내용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 양은 “최근 나 때문에 장애인 남성이 자살했다는 인터넷 루머가 퍼지며 학교와 전공, 성까지 노출돼 억울한 심정”이라고 울먹였다. 하지만 ○ 양과 가족은 해당 남성의 가족으로부터 앞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경찰에 이 사실을 신고하지 않았다.

이 글을 올린 남성은 문제가 커진 12일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글을 새로 올렸다. ○ 양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주변 사람들의 댓글도 여기에 붙었지만 한번 시작된 루머는 멈추지 않았다. 같은 학교의 한 학생은 “이 글을 작성한 남자는 9월부터 똑같은 글을 올렸다”며 “사실이 아닌 것을 너무 퍼뜨리지 말라”고 말했지만 누리꾼들은 “학교 바깥의 일이니 아직 확인할 수 없다”거나 “신상 정보를 공개해서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문조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전의 루머는 말 그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여서 그대로 내버려두면 없어졌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된 후 루머가 스스로 파괴력을 가지기 시작했다”며 “몇 년 전 떠돌던 루머도 그대로 기록돼 있어 잊을 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등 폐해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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