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통성 폄훼 - 자긍심 훼손 내용 집중 지적

  • 입력 2008년 10월 31일 02시 58분


■ 각계 수정요구 253개 표현 중 55개 수정권고

금성출판사 38개-중앙교육진흥연구소 9개 항목 해당

이념논란 의식 ‘고쳐라’ 대신 ‘삭제 바람직’ 완곡표현

수정권고안 수용 여부는 전적으로 집필진에게 달려

《교육과학기술부가 30일 그동안 편향성 논란을 빚어온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권고안을 밝힘에 따라 내년 3월부터 고교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내용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인다. 교과부는 “역사 교과서에 대한 사회적 논란은 교과서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학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육 현장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내용 오류를 바로잡고 객관성과 균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며 수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과서 수정을 둘러싸고 이념적 대립 양상까지 빚어졌지만 교과부는 수정 작업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교과부가 수정을 권고한 부분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저해하는 내용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이 훼손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수정 요구 역시 구체적인 문구가 아닌 ‘…하는 서술이 바람직함’, ‘지나친 표현임’ ‘국사편찬위원회 가이드 안에 의거해 삭제’ 등 완곡한 표현을 쓴 것도 이념 논란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정권고 금성출판사 최다=교과부는 각계에서 수정을 요구한 253개 항목 가운데 55개에 대해 수정권고안을 냈다. 이 중 중복 항목을 뺀 실제 수정권고안은 50개다.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내는 6개 출판사(금성출판사, 두산출판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 대한교과서, 천재교육, 법문사)별로 보면 금성출판사 38개, 중앙교육진흥연구소 9개, 법문사와 천재교육 각각 4개다.

교과부가 수정권고를 한 표현은 △광복과 연합군의 승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부분 △미-소 군정과 관련해 서로 성격이 다른 사료를 비교한 부분 △대한민국을 민족정신의 토대에서 출발하지 못한 국가로 기술한 부분 등이다.

국정감사에서도 논란이 된 ‘일장기가 걸려 있던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 광복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적 순간은 자주 독립을 위한 시련의 출발점이기도 했다’(금성출판사 256쪽)라는 서술에 대해 교과부는 국사편찬위원회 가이드 안에 따라 두 번째 문장을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남한에서 정부가 세워진다면 이는 북한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질 것이 확실했다. 이제 남과 북은 분단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금성출판사 261쪽)는 서술에 대해 교과부는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위원회가 먼저 열린 뒤에 6월에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나왔다”며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인해 분단이 됐다는 오해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 △이승만 정권은 ‘독재체제’로 서술하면서 북한 김일성 정권은 ‘유일지도체제’로 서술한 것 △친일파 청산 미흡으로 ‘민족정신에 토대를 둔 새로운 나라의 출발은 수포로 돌아갔다’고 기술한 것 △북한의 실상과 현저히 차이를 보이는 서술에 대한 보완의 필요성 등을 지적했다.

20여 개 항목은 단순한 문구 보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접속사 수정, 잘못된 단어 교정 등으로 이념과 무관한 부분도 적지 않다.

▽출판사 자체적으로 102곳 수정=교과부는 253개 항목 중 출판사들이 102개 항목에 대해 자체적으로 수정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들 표현에는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폄훼한 부분, 남북관계를 평화통일이라는 한 가지 잣대로만 서술한 부분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교과부의 설명이다.

이들 항목은 출판사가 자발적으로 수정을 결정한 만큼 우선적으로 수정 협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과부는 출판사 자체 수정 항목의 내용에 대해서는 수정안이 확정될 때까지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자체 수정안이 어떤 항목인지에 대해 진단이 엇갈리고 있다.

문제는 출판사들이 자체적으로 수정한 항목이 교과부가 원하는 방향과 맞지 않을 경우다. 이 경우 교과부와 출판사의 11월 협의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교과부 관계자는 “출판사가 102개의 표현을 어떻게 수정하겠다고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밝히지 않는 것”이라며 “출판사가 결정한 수정 문구가 국사편찬위원회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난다면 재수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교과부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서술 방향 제언과 크게 어긋나지 않아 수정 여부를 집필진의 재량에 맡긴 96개 표현은 해당 출판사나 집필진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수정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남은 수정 절차는=교과부는 이날 각 출판사와 집필진에 수정권고안을 전달했다.

교과서 수정의 최종 권한은 집필진에 있기 때문에 실제로 수정이 이뤄지느냐는 전적으로 집필진에 달려 있다.

교과부는 11월 한 달 동안 출판사 및 집필진과 계속 협의를 하면서 수정권고안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11월에 최종 수정안이 결정되고, 12월에 곧바로 인쇄 및 배포가 이뤄지면 내년 3월부터는 일선 학교에서 수정된 교과서가 쓰이게 된다.

집필진이 수정을 거부할 경우 교과부가 직권수정에 나설 것인지에 대해서는 교과부는 말을 아꼈다.

심은석 교과부 학교정책국장은 “강제적인 수정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교육을 위한 것이므로 집필진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최대한 설득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 영상취재 : 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영상취재 : 정주희 동아닷컴 인턴기자

교 총 “헌법정신 부정하는 내용 바로잡는 것은 당연”

집필진 “권고안 알맹이 없어… 좌편향 운운 이해 안돼”

■ 각계 찬반 명확히 갈려

편향성 논란을 일으킨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표현에 대한 교육과학기술부의 검토 결과에 대해 교과서 집필진은 30일 “교과부의 수정권고 내용 중 절반 정도가 첨삭지도 수준에 불과한데 이 정도의 내용을 가지고 ‘국가 정체성’이니 ‘좌편향’ 등을 운운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주장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대표 저자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교과부 권고에 대한 수용 여부를 다른 집필진과 상의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권고안 내용을 살펴보니 교과부가 고심을 거듭하고 꽤 신중을 기해 권고안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든다”면서도 “교과서가 대단히 잘못된 것처럼 논란이 일었지만 막상 권고안 내용은 상당수가 애매한 내용이거나 일부 단어 사용을 문제 삼는 등 알맹이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날 논평을 통해 “국가정통성과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내용을 수정하고 바로잡겠다는 것은 당연하다”며 “향후 편향 시비가 재연되지 않도록 ‘역사교과전문가협의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성출판사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성을 지적하며 대안교과서를 발행했던 ‘교과서포럼’의 이영훈(서울대 교수) 공동대표는 “아쉽지만 그나마 교과부가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며 “다음 교육과정 개정 때 새로 만들어지는 교과서는 지금보다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시각이 강조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반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논평을 통해 “교과부는 스스로 정착시킨 교과서 검인정 체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켰다”며 “교과서 문제에 공동 대응해 온 단체들과 함께 교과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역사교사모임 윤종배 회장은 “교과부의 이번 수정권고 내용에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자긍심에 대한 것보다 기술적인 문제만 제시했다”며 “일부의 과장된 문제 제기에 교과부가 휘둘린 꼴”이라고 지적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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