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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0월 2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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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의 신뢰성은 무너졌고, 사설학원이 중고등학생 교육을 떠맡은 형편이다. 전국에 초중고교가 1만84개인데, 사설학원은 16만2441개나 된다. 아마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다른 아이에게 뒤질세라 걱정이 앞서 너도나도 방과 후엔 아이들을 학원으로 내몬다.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건 공부 잘한다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이야기다.
외국에서 귀국한 한 학생이 자기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다른 학생들이 바삐 무언가를 적고 있어서 살펴보았더니 학원 숙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학원에서 미리 배운 것을 학교에서 복습하는 형국이다.
학원교육 때문에 늦게 잠든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공교육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무너진 것이다. 한국은 사교육 공화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중고교 16배나 되는 사설학원
연평균 한 가정에서 266만 원을 사교육비로 쓰고 있다. 그래도 학부모는 안심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른다. 아이 교육 때문에 다른 문화생활을 대부분 접는 게 우리 세대의 학부모이다. 가족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중고등학생이 학원에서 밤 11시, 12시에 돌아오는 것은 예사다. 부모와 자식이 마주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할 시간도 일부러 찾아야 가능하다.
사교육을 받는 학생 당사자도 만족스럽지 않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다니니 자기만 안 가면 불안하다. 그나마 학원에 가지 않으면 딱히 갈 데도 없고, 다른 친구도 모두 학원에 가니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학원에 가야 한다. 이렇게 딱한 인생이 없다. 쉴 시간도 없고, 놀 상대도 없고, 인터넷과 게임이 아니면 제대로 놀 줄도 모른다.
그렇다면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달리 우수한 인재를 길러내고 있는가? 모두 열심히 하니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할 뿐, 기계적인 반복학습 속에서 오히려 창의력은 떨어진다. 인터넷에서 자료는 잘 긁어모은다. 하지만 문학이나 철학, 역사에 대한 상식은 뒤처진다. 톨스토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이야기하는 청소년은 천연기념물이다. 사회에 대한 공적인 관심보다는 개인의 성적관리가 우선이다. 공동체 문화의 전통을 가졌다는 한국에서 지역사회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기적인 외톨이 인간이 양산된다.
한국의 공교육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기러기 아빠가 되길 마다하지 않고 아이들을 외국으로까지 보낸다. 사교육에 그만큼 돈을 들일 거라면 차라리 외국의 편안한 환경에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함께 사는 가정의 행복은 잊은 지 오래다. 외국에서 받는 교육은 공교육이 짊어져야 할 국가적 정체성 배양과는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자녀들이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춰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무디어지고 있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도 5위인 60%에 이른다. 하지만 사교육에 그리 많은 투자를 해도 유명 대학에 들어가는 학생의 수는 정해져 있다.
유학간 아이들 정체성 희박해져
구구단을 몰라도 등록금만 있으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대졸자가 많다 보니 굳이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되는 직업군에 대졸자가 대거 몰린다. 나라 전체로 보자면 인적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소중한 국가자원을 유효하게 배치하지 못하는 형세다.
오죽하면 사교육을 금지했던 어느 대통령이 그립다는 이야기까지 시중에 떠돌 정도다. 공교육을 살리지 않고는 사교육에 대한 맹목적 의존은 줄어들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건강한 인성교육과 문화체험의 기회도 늘려주어야 한다. 공교육 활성화를 위해 국민의식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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