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우리학교 논술 수업]상명대부속여고 독서토론반

  • 입력 2006년 11월 28일 03시 02분


22일 오후 서울 상명대부속여고 2학년 ‘독서토론과 논술반’ 수업. 경영서 ‘CEO는 낙타와도 협상한다’를 읽고 난 학생들이 박소연 양(왼쪽 서 있는 학생)의 사회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권희정 교사. 안철민 기자
22일 오후 서울 상명대부속여고 2학년 ‘독서토론과 논술반’ 수업. 경영서 ‘CEO는 낙타와도 협상한다’를 읽고 난 학생들이 박소연 양(왼쪽 서 있는 학생)의 사회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이 권희정 교사. 안철민 기자
《2008학년도 입시부터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이 도입하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두고 일선 교사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마땅한 교재나 교수법이 없는 상황에서 여러 과목을 넘나드는 논술 강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여간 고민이 큰 게 아니다. ‘이지논술’은 나름의 방식으로 알차게 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공교육 현장을 격주 시리즈로 소개한다.》

서울 상명대부속여고 ‘독서토론과 논술반’에선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이 학교 철학·논술 담당 권희정(34) 교사는 얼마전 다음과 같은 ‘질문 목록’을 학생들에게 숙제로 내주었다. 학생들은 목록 속 질문을 일상대화에서 반드시 사용하고 이를 기록한 후 질문의 질적 수준과 상황 적합성을 스스로 평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질문 목록’은 토론의 고수였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사용했던 질문들을 유형별로 정리한 것이다.

①명료화를 위한 질문(∼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요?) ②전체를 탐색하는 질문(그는 지금 어떤 가정을 하고 있을까요?) ③근거를 탐색하는 질문(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죠?) ④견해와 관점에 대한 질문(A와 B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 거죠?) ⑤함축과 결론을 탐색하는 질문(그런 결론이 논리적 비약은 아닐까요?) ⑥질문에 대한 질문(그 질문이 이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22일 오후 4시 20분부터 2학년 학생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학교 ‘독서토론과 논술 반’ 방과후 수업. 경영서인 ‘CEO는 낙타와도 협상한다’를 미리 읽고 온 학생들이 토론을 벌인다.

“이 책에는 협상을 둘러싼 일화와 협상방법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친구들과 이런저런 타협을 해야 할 때나, 아니면 성인이 되어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할 때 좋은 팁(tip·비결)을 제공해 줍니다. 우선 책 내용 중 어떤 쟁점에 대해 토론할 것인지 여러분의 의견을 받겠습니다.”(사회자 박소연)

토론수업은 학생들 간 철저한 역할분담을 통해 이뤄진다. 사회자 외에도, 학생들의 발언을 칠판에 옮기며 즉석에서 요약 정리하는 ‘칠판서기’(오지윤), 토론내용을 상세히 노트에 적어 기록으로 남기는 ‘기록서기’(김정현)가 있다. 이른바 ‘체크 서기’(여세린)도 있는데, 그는 △질문 △추가질문 △주장 △반박 △동의 △설명 △인용(관련 지식 등 근거를 대는 것) △예시 △토론진행발언(일종의 의사진행발언) 등으로 항목이 나뉜 ‘발언 성격 분석표’를 가지고 있다. 학생들의 발언이 분석표의 어느 항목에 해당하는지를 가린 뒤 발언 횟수를 ‘정(正)’자를 써가며 체크한다. 이렇게 계량화된 토론 결과는 대학입시 논술지도의 참고자료로 활용된다. 독서하는 법과 토론하는 법을 단계별 수준별로 잘디잘게 쪼개어 훈련시키는 것이다.

이날 토론주제는 논쟁을 거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쌀 시장개방이 국내 농업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로 좁혀졌다.

“국내 쌀 시장은 큰 타격을 입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 83쪽에는 키위의 사례가 나옵니다. 시장개방으로 뉴질랜드 키위가 들어왔지만 국내 재배농가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이를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요즘 국내에선 웰빙(참살이)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유기농 쌀 같은 좋은 품질의 쌀을 내놓으면 소비자들이 농약으로 재배된 값싼 외국 쌀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김지영)

“저는 찬반을 따지기 전에 필자 의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하고자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키위는 안 먹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쌀은 삼시세끼를 먹는 필수 식량입니다. ‘웰빙’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다고 해도 쌀을 사기 위해서는 키위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써야 하므로 아무래도 가격이 싼 쌀에 기울게 될 것입니다.”(김푸르나)

권 교사는 수업 틈틈이 “‘왜냐하면’과 ‘예를 들어’는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세트(set)”라면서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왜?’ 그런 주장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하고 구체적인 근거를 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자만 읽는다고 독서일까요? 몇 페이지 몇째 줄에 어떤 표현이 있는지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이것이 현실 속 나의 문제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창의성입니다. 통합교과형 논술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책 내용을 마음속으로 담아내 읽는 연습이 필요합니다.”(권 교사)

상명대부속여고의 논술수업은 독서토론과 글쓰기를 주로 하는 1, 2학년 수업과 첨삭지도가 핵심인 3학년 수업으로 나뉜다. 3학년 첨삭지도는 사설 학원들이 해주는 이른바 ‘빨간 펜 자국이 가득한’ 1회성 첨삭지도보다는, 같은 주제를 두고 3차례까지 써보는 반복논술 위주로 이뤄진다. 문장 표현을 소소하게 지적하기보다는, 글의 접근법이나 문제의식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주고 있다. 똑같은 주제라도 반복해 쓰다 보면 발전된 생각이 담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학생들끼리 서로의 글을 돌려보면서 첨삭해 주는 ‘상호첨삭’과 학생 한 명의 논술문을 샘플로 뽑아 다른 학생들이 함께 첨삭해 보는 ‘공동첨삭’ 과정을 밟는다. 동료의 글을 읽고 첨삭해 보면서 채점자의 의도와 평가 기준을 배우게 되고 ‘잘 쓴 글’과 ‘못 쓴 글’의 차이점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