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핸드백 가죽은 원래 이 장갑처럼 부드러웠어요. 핸드백 값 110만 원을 모두 돌려받게 해 주세요.”(소송을 낸 핸드백 주인 이모 씨)
“난 그런 돈 없습니다. 내가 오늘 수리도구랑 약품까지 다 가지고 나왔으니 판사님 앞에서 이 핸드백 원래대로 해 놓겠습니다.”(소송을 당한 가방 수리업자 김모 씨)
이달 초 민사 소액 재판이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법 북관 3호 법정.
이 씨는 수리점에 맡긴 핸드백 겉가죽이 뻣뻣해지고 은은한 미색이던 가죽 색깔도 바나나 색깔처럼 촌스럽게 변했다며 김 씨를 상대로 핸드백 값을 물어내라는 소송을 냈다.
두 사람은 이미 여러 차례 다툰 탓인지 법정에서도 한 치 양보가 없다.
판사는 이 씨가 가지고 나온 핸드백과 장갑을 만져 보고 김 씨가 들고 나온 수리도구들도 훑어본다.
“원고가 처음 낸 수리비 6만 원과 핸드백 복구비 12만 원에 좀 더 얹어서 피고(수리업자)가 20만 원 정도 주고 끝내는 건 어때요.”
두 사람도 한참을 다투다 지쳤는지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법정을 나선다.
판사들은 소액 사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들어 주고 가능한 한 조정으로 끝내려고 한다.
민사 소액 사건은 빠른 해결이 장점이다. 소송기간은 2∼3개월 걸린다. 소송비용은 9만5000원 이하의 인지대와 송달료가 전부다.
그러나 소액 법정에서 풀리는 건 돈 문제만은 아니다. 억울함과 답답함, 그동안 가슴에 맺힌 속내를 털어 내야 비로소 재판이 끝난다.
서민들의 전세보증금 다툼도 소액 법정의 단골 메뉴다.
10일 한 소액 법정에서 김모(55·여) 씨는 건물 지하 방에 세 들어 살다가 지난달 28일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집 주인이 전세보증금 1000만 원 중에서 300만 원을 못 주겠다고 해 소송을 냈다. 김 씨가 수도를 제대로 잠그지 않고 이사를 가서 물이 차는 바람에 방바닥을 다 뜯어내 고쳤다는 것이다. 공사비로 300만 원이 들었다는 것.
집주인은 법정에 나오지 않아 재판은 연기됐다.
김 씨와 함께 나온 김 씨의 아들은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해도 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법을 잘 몰라요. 판사님께서 잘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사진사 이모(39) 씨는 한 디자인회사 실장과 1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사진 작업을 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회사 사장이 “실장은 회사를 그만뒀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해 소송을 냈다는 것.
이 씨는 “그 회사 재산을 가압류하면 소송비용이 더 들 수도 있겠지만 괘씸해서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소송에서 이긴 뒤에는 민망해하거나 허탈해하기도 한다.
회사원 김모(46) 씨는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비가 붙은 오모(26) 씨 등 2명에게 맞았다며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판사는 두 사람이 김 씨에게 75만 원씩 주도록 하고 조정으로 사건을 끝냈다.
김 씨는 최소한의 병원비를 받은 것뿐이라면서도 “이런 일로 법원까지 오게 된 것이 좀 민망하다”고 했다.
그는 “두 사람 다 연예인 준비생이라 직업이 변변치 않으니 가진 걸 가압류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부모들이 알아서 책임져 주면 좋겠다”면서 법원을 나섰다.
이날 재판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지만 방청석에는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다.
재판을 끝내고 법정 밖으로 나간 사람들끼리 다시 실랑이가 벌어져 법정 밖도 소란스럽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이 기사의 기획 및 취재에는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 정혜진(고려대 교육학과 4학년) 하예린(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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