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농산물만 급식’ 조례 무효…大法 “WTO 조항 위반”

  • 입력 2005년 9월 1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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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농산물만을 학교 급식에 사용하도록 한 지방의회의 조례는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위배돼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03년부터 대다수 지방자치단체가 유사한 조례를 제정했거나 추진하고 있어 이번 판결로 관련 조례가 무더기로 효력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학교 급식에 국산 농산물 사용을 추진했던 시민단체와 지자체는 “학생들의 건강을 외면한 판결”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판결 의미=대법원 3부(주심 양승태·梁承泰 대법관)는 9일 전북도교육청이 전북도의회를 상대로 학교 급식에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학교 급식 조례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낸 조례 무효 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도의회의 학교 급식 규정은 WTO가 규정한 ‘외국 농산물과 국산 농산물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한국이 비준한 WTO 규정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있어 조례가 WTO 규정을 위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학교 급식에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도록 규정한 학교 급식법 개정 움직임에도 제동이 걸리게 됐다.

현재 전국 광역시도 15곳(전체 16곳 중 부산 제외)과 기초자치단체 82곳(전체 234곳)에서는 전북도의회와 유사한 조례를 제정했거나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 판결이 학교 급식에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한 것은 아니다.

▽쟁점=국산 농산물의 사용을 명문화한 학교 급식 조례는 안전한 식재료 사용을 통해 학생들의 건강을 지키고 지역 농업경제를 되살려야 한다는 지역 시민단체의 요구에 따라 추진됐다.

그러나 외교통상부는 WTO의 규정 위반으로 이 같은 조례가 통상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조례 제정에 반대했다. 행정자치부는 외교부의 해석에 따라 이들 조례를 대법원에 제소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관련 단체는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판결은 WTO의 규정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며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자국 농산물을 학교 급식에 이용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전망=대법원 판결로 학생들의 급식에서 국산 농산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 급식 재료 결정권은 학교 측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직영이 아닌 민간업체에 급식을 위탁한 학교의 경우 영리를 앞세운 업체들이 값싼 수입 농산물을 사용해도 막을 근거가 사라졌다. 현재 전체 초중고교 가운데 95% 이상이 학교 급식을 시행 중이고 이들 학교 가운데 17%가 위탁 급식을 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예산을 지원 받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학교 직영 급식에서 수입 농산물의 비중이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정부나 지자체가 급식에 많은 예산을 배정하고 각 학교가 이 돈으로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는 것만이 국산 농산물의 비중을 높이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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