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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5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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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원의 장학금도 사실은 지난해 기부 당시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으나 최근 종로구청측이 장학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그 내용을 구 의회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알려졌다.
1921년 경기 광주시에서 태어난 최옹은 흥남비료공장 직공, 쌀장사, 연탄장사 등을 하며 번 돈으로 1966년 택시회사를 인수했다. 그가 ‘남몰래’ 선행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즈음부터.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보내주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수백 명에 이르렀다.
1993년 최옹은 아예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기술전문학교 설립을 추진했으나 당시 교육부 차관이던 조규향 현 방송통신대 총장으로부터 “장학재단을 세우는 것이 고학생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권유를 받은 뒤 방향을 전환하고 53억원을 출연해 형애장학회를 세웠다.
이듬해 최옹은 사후 모든 재산을 장학재단에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했고 2002년에는 “죽을 때까지 기다릴 것 없다”며 부동산을 처분해 장학재단에 100억원을 더 냈다.
형애장학회는 지금까지 대학생 968명에게 19억4600여만원을 지급했고, 서울대 과학교육연구소 등에 10억9000만원을 기부했다.
최옹의 선행이 맺어준 인연이 ‘30년 우정’으로 이어져 오기도 한다. 1975년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의 이용수(李龍水) 기자는 등록금이 없어 고생하던 고려대생 서정희군에 대한 기사를 썼고, 최옹이 이를 보고 장학금을 보낸 것이 계기가 돼 세 사람이 아직도 각별하게 지내고 있는 것.
현재 새미래인사이트 소장인 서씨는 “처음엔 도움을 준 분이 누군지도 몰랐고, 최 선생님이 그렇게 많은 학생을 도왔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고 말했다. 서씨는 1990년 한 월간지에 최옹과 이용수 기자에 대한 추억담을 기고했으나 이때에도 최옹이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바람에 최옹을 ‘그분’으로 표현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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