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준씨 불법대출-돈세탁]차명 계좌 23개나 동원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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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준 게이트’는 사채시장과 일부금고가 ‘검은 돈’의 세탁창구로 애용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금융실명제는 전혀 무시된 채 대주주와 경영진이 가명과 차명계좌를 만들어 제멋대로 자금을 굴리고 있는 것.

정현준(鄭炫埈) 한국디지탈라인(KDL)사장이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서울 동방금고와 인천 대신금고를 통해 불법대출받은 돈은 637억원. 대출자금의 최종 종착지를 숨기기 위해 총 23개의 차명계좌를 동원했다. 그러나 이는 불법대출금이 정사장의 개인계좌 또는 계열사 법인계좌로 들어가는 첫 단계였을 뿐이다.

수표로 들어온 이들 자금은 추적할 수 없도록 여러 차례 계좌를 바꿔 현금화됐다.

▽차명계좌 활용은 ‘고전’ 수법〓차명계좌는 형식상 실명과 똑같기 때문에 적발이 쉽지 않다.

금감원 관계자는 “차명계좌 대출이 주된 수단으로 활용된 것은 금고업계의 오랜 풍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72년 사채시장의 자금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호신용금고법을 만들면서 △2% 이상의 지분을 소유한 출자자에겐 대출을 금지하고 △동일인 여신한도를 자기자본의 10% 이하(현재는 20% 이하)로 정해놨지만 이를 거의 지키지 않았다는 것. 결국 이전의 영업풍토에 젖어 불법도 적당히 눈감는 ‘모럴 해저드’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또 “차명계좌를 사용하도록 허용해준 23명이 현재 동방금고 이경자 부회장의 조종을 받는 것인지, 정사장의 하수인인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고 밝혔다.

▽어떤 방식이 동원됐나〓차명계좌를 이용해 이뤄진 불법대출의 대부분은 단순대출이다. 그러나 어음할인이나 관계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수법도 동원됐다.

또 다른 금고의 대주주도 불법대출에 끌어들였다. 서울의 해동, 한신금고의 출자자와 짜고 대출액을 서로 교환하는 이른바 ‘교차대출’도 활용한 것. 이 때문에 금고업계에서는 돈 세탁 과정에 이제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금고와 금고 종사자가 개입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금고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까지도 사채업자들은 일부 금고를 ‘대출’ 창구로 이용해왔다”며 “이번 사건에서도 사채업자의 돈이 금고를 통해 정사장에게 흘러들어 갔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부통제시스템이 문제〓다양한 불법행위가 금고 내부에서 묵인된 것은 내부통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 대주주 소유제한이 없어 사실상 개인이 소유한 금고에선 직원들이 독자적인 결정을 하거나 대주주의 지시를 어길 수 없다.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까지 대출내용을 심사하는 ‘여신심사부’가 없는 금고도 있다”며 “제도적으로는 갖춰져 있더라도 한사람이 영업과 대출심사를 동시에 맡는 금고도 있어 현실적으로 심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나연기자>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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