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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4월 10일 19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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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번에도 같은 요구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 역시 남북회담을 평양에서 먼저 여는 것이 이미 관행으로 굳어져 이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락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북한이 남북문제 해결에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그같은 주장을 고집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북한 주민들에게는 남한측 관계자들을 평양으로 불러 각종 모임을 갖는 것이 북한 당국의 ‘통일 의지’를 과시하는데 유효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실제로 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이 독자적으로 참석했던 사실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북한은 이와 함께 김일성전주석이 생전에 합의했던 정상회담을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마무리한다는 차원에서 당초 예정됐던 ‘평양회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면서 굳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북남 최고위급회담을 6월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키로 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우월적 권위’를 암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고 남북 관계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또 다른 관심거리는 김대중대통령이 역사적인 평양 정상회담에 어떤 경로로 가느냐는 것.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판문점을 통해 직접 평양으로 가면 그 의미를 달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은 10일 이에 대해 “앞으로 열릴 실무 접촉에서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인수기자> issong@donga.com
▼경호는/北이 모든 책임…우리측은 근접경호▼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평양행과 관련, 대통령 경호팀이 적지 않게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김대통령의 경호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만 어차피 실질적인 경호는 북한측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
외교관례상 외국 원수에 대한 경호는 외빈을 맞는 국가에서 거의 전적으로 책임을 지도록 돼있다. 하지만 상대가 북한인 만큼 한국측 경호원들도 돌발 사태에 대비, 김대통령의 주변에서 근접 경호에 나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경호팀 운영은 북측과의 경호팀 실무접촉이 있어야만 윤곽이 드러나겠지만 94년 당시 남북정상회담 준비 과정을 보면 약간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당시 양측 경호팀은 실무접촉에서 경호원 50여명과 권총 정도의 휴대무기 소지 등을 놓고 협상을 벌였다. 아무튼 김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 하나 하나마다 경호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에 북측과의 세심한 합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경호원 수를 아무리 늘리고, 자동화기를 보유한다고 해도 김대통령의 신변 안전은 북측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상호간의 신뢰와 세계의 눈, 북측이 한국측에 제시할 ‘신변안전 보장각서’에 경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94년 상황은/김일성 急死로 무산▼
94년 YS정부 시절 합의됐던 남북 정상회담은 북한 김일성(金日成)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됐다.
당시 정상회담은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중재로 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키로 합의됐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 간의 기류를 보면 93년에 이어 94년 3월까지 계속된 남북특사교환을 위한 실무접촉이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무산되고,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는 등 정상회담 개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 속에 94년 6월 15일부터 18일까지 평양을 방문하고 입경한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당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을 면담하고 “김일성주석이 언제 어디서든 정상회담에 호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김영삼대통령도 이에 화답했고, 이에 따라 당시 이영덕(李榮德)국무총리는 북한 강성산(姜成山)정무원총리 앞으로 예비접촉을 가질 것을 제의했다.
남북 양측은 그해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 회담을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을 비공개로 갖고 정상회담 일정에 합의했다. 당시 예비접촉에서 양측은 정상회담 장소 및 시기, 체류일정 등과 실무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대표접촉에 합의했다. 그 후 두차례 실무대표접촉(7월 1, 2일), 통신관계 실무자 접촉(7월 7일), 경호관계 실무자 접촉(7월 8일)을 통해 세부 일정 등이 합의됐다.
그러나 7월 8일 김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북측은 같은 달 11일 김용순(金容淳)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 명의의 전화통지문을 통해 정상회담의 연기를 통보해왔다.
<공종식기자>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