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내각 얼굴/김덕중교육]마지막 봉사기회 「총장님」

  • 입력 1999년 5월 24일 18시 52분


코멘트
“눈물 젖은 빵의 맛을 아는 고학생, 내빈에게 2천5백원짜리 식사를 대접하는 사람, 동생 김우중(金宇中)대우그룹 회장의 후견인, 기업인, 경제학자, 교육개혁론자….”

김덕중(金德中)신임 교육부장관을 묘사하는 말은 많다. 하지만 김장관은 자신을 ‘봉사하는 사람’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30여년간 교단에 서고 이제 봉사하는 일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

김장관 인생에서 ‘봉사와 희생’은 많은 일화를 낳았다.

김장관은 6·25전쟁 와중에서 동생 김회장과 경기고를 함께 졸업한 뒤 김장관은 서울대, 김회장은 연세대에 합격했다.

당시 맏형은 군에 있어 김장관은 가장의 역할까지 떠맡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동생 김회장의 학비를 댔다.

하지만 그는 향학열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1백50달러를 들고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를 하며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주리대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위스콘신 주립대 교수를 하다 70년 서강대 교수가 됐다.

그는 77년 동생 김회장의 요청에 따라 기업인으로 변신, 대우실업의 사장을 맡아 국제적인 종합상사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김장관의 고향은 언제나 ‘학교’였다. 그는 기업인으로 목돈을 쥘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다시 서강대로 돌아갔다.

그는 항상 미국의 효율성있는 대학체제를 실현할 꿈을 꾸고 있었다. 기회는 왔다.

95년 아주대총장으로 부임하자 마자 교수업적평가제와 연봉제의 시동을 걸었다. 교수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34개과 교수들을 만나 당위론을 펴며 설득, 개혁정책을 정착시켰다.

개혁의 성공은 그의 도덕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김장관은 총장시절 장관이 내방해도 대학 구내식당에서 2천5백원짜리 식사를 대접했고 총장 전용차를 고집하지 않고 업무용 공용차량을 사용했다. 학생이 낸 등록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김장관은 매년 하반기에 교사 등을 대상으로 한 대학설명회에 직접 참석하는 ‘세일즈 맨’의 면모도 갖고 있다.

김장관을 오랫동안 지켜본 한 지인은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밴 실행력을 갖춘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했다.

〈하준우기자〉ha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