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밤. 장모씨(43·여)가 서울 성동구 금호동 남편의 봉제공장 사무실 책상서랍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어딘가 있을 텐데. 그 사람이 유서 한장 없이 그럴 리가…』
혼이 나간 모습으로 서랍을 뒤지던 장씨는 쏟아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훔쳐내면서 22년 전 서울 청계천의 한 봉제공장을 떠올렸다.
10평 남짓한 조그만 공간. 「다다다다…」 재봉틀 소리가 중간에 끊어지면 마음이 불안하던 당시 25세의 오점교(吳點校·46·서울 성동구 금호동)씨는 장씨의 건너편 재봉틀에서 열심히 박음질을 해대고 있었다.
고교를 중퇴하고 전라도 광산에서 혈혈단신 상경한 오씨. 봉제공장에서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일하는 그의 「장인(匠人)정신」을 장씨는 사랑했다. 2년 뒤 그는 오씨의 아내가 됐다.
82년. 오씨는 미싱사 7년만에 독립해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봉제공장을 차렸다.
『여보, 우리 한번 열심히 살아봅시다』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종업원이 속을 썩일 때도 많았고 자금난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때도 있었다. 빚이 늘어나자 오씨는 멀리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3년간 돈을 벌어와 빚을 갚았다. 오씨 부부는 88년 서울 금호동에 소규모 봉제공장을 다시 차렸다.
여성 스웨터를 만들어 소매점에 팔았다. 현금거래여서 수입이 안정됐다. 오씨부부의 사업은 그러나 수표를 주고받는 큰 규모로 확대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거래업체의 부도로 2억5천만원의 손해를 보았고 오씨는 안먹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27일 오후 5시. 12명 종업원과 새참을 함께 한 그는 『잠깐 나갔다 올게』란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오후 7시. 부인 장씨는 감감무소식인 오씨를 호출했다. 그 순간 이미 오씨는 서울 중구 흥인동 H플라자 20층 꼭대기에서 투신해 숨져 있었다. 그는 유서 한장 남기지 않고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봉제공장에서 키운 이들 부부의 「재봉틀 사랑」은 이렇게 끝났다.
〈이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