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드는 정치」의 큰 원인 중 하나가 「손벌리는 유권자」에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물론 안주면 되지 않는가라고 쉽게 말할 수도 있겠으나 경쟁자가 있는 마당에, 또 당선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 손벌리는 유권자에게 약해질수밖에 없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국회의원을 「건달」 또는 「여기저기서 돈을 뜯어 유권자에게 뜯기는 직업」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처럼 돈을 매개로 한 유권자와의 관계 때문이다.
지난해 수도권지역에서 당선된 한 초선의원의 고백.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무슨 무슨 번영회니 동창회니 하면서 전화를 걸어오면 가슴부터 철렁 내려 앉았다. 「도와주겠다」 「몇백명을 확보해 놓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가지 뿐이었다. 실제로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돈을 주지 않으면 뒤에서 음해할 것이 두려워 요구를 들어주었다』
경남지역 출신 신한국당 의원의 얘기.
『여당의원의 경우 지난해 총선에 평균 10억원 정도가 든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선거가 시작되면 10억원은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내 지역구에 5백개의 마을이 있는데 마을마다 5,6명의 책임자가 있다. 이들에게 한번에 10만원씩만 줘도 3억원이다. 한번만 줄 수도 없고 해서 선거기간 중에 몇번 주다보면 결국 10억원을 넘길 수밖에 없다』
그는 『요즘은 시골에 가도 일당 4만∼5만원짜리 일자리가 수두룩하다. 며칠씩 도와주는데 성의표시를 안할 수도 없고…』라며 고민을 토로했다.
사실 「남이 받으면 타락, 내가 받으면 인사」라는 유권자들의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요즘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고비용 정치구조 개선」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하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말이다.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민원도 유권자 손벌리기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린벨트를 풀어달라」 「국가보상을 받게 해달라」는 등의 개인적 민원부터 교도소 장애인학교 하수종말처리장 쓰레기매립장 이전 요구 등 지역이기주의성 민원까지 넘쳐 후보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선거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를 위해 평소 끊임없이 「지역구관리」를 해야 한다. 말이 지역구관리지 실은 「돈 뿌리는」 일이다. 신한국당 한 초선의원의 말.
『주말에 지역구에 내려가기가 겁이 난다. 보는 사람마다 나를 「봉」으로 알고 손을 벌리니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고 서울에 버티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상대가 다음 선거를 노리고 지역구에서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 못본체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모 대선주자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신한국당의 한 원외위원장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위원장님이 내려와야 될 것 같다」는 전화가 지구당으로부터 오지만 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뻔하다. 지구당에 내려가기 싫을 때가 많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구당운영이 「돈드는 정치」의 핵심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당 3천만원, 야당 2천만원」이 요즘의 지구당운영비 공정가라고 한다.
의원 1인당 연 후원회비 한도는 선거가 없는 때는 1억5천만원. 후원회비만으로는 지구당을 운영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의원 세비가 있지만 의원회관 사무실 운영과 경조비에 다 들어간다. 결국 후원회비 외에 별도의 「수입」이 있어야 지구당을 운영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바로 이 점이 정치인들이 한보자금과 같은 「검은 돈」을 만지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지방출신 국회의원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지역구가 아닌 서울에 후원회를 두는 것도 돈 때문이다. 각 지역후원회원의 재력이 서울후원회원보다 떨어지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서울에서 후원회를 열면 소속 상임위와 관련된 기업인들이 줄지어 참석하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같은 지구당 운영의 문제점 때문에 정치개혁이란 화두가 나올 때마다 「지구당 폐지」주장이 등장한다. 그러나 선거조직의 필요성 때문에, 특히 대통령선거 때 지구당조직이 유용하다는 이유로 인해 지구당폐지론은 메아리없는 목소리가 되고 만다.
任左淳(임좌순)중앙선관위선거관리실장은 『금품수수 등에 대한 유권자 처벌선례를 만들어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지만 1대1로 주고 받는 일이라 적발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당의 한 중진의원은 『이번 한보사태는 선거와 지구당운영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지금까지 내앞으로 접수된 올해 후원금이 1천2백만원밖에 안된다. 선관위에 알아보니 후원금 「제로」도 수두룩했다.(유권자들이)아무리 손을 벌려도 없으면 못주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제균기자〉
▼ 선진국에선… ▼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지난 93년8월 영국식 선거제도의 도입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 당시 청와대와 민자당은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의 상징」인 영국선거제도를 집중 연구했고 그 내용의 일부를 94년 개정된 통합선거법에 반영했다.
그러나 김대통령 임기말이 된 지금 영국 선거제도의 도입 시도는 「제도와 현실의 괴리」만을 확인시켜 준 결과가 됐다.
당시 김대통령은 미국과 영국의 선거제도를 동시에 알아본 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이유 때문에 영국식을 선택했었다. 실제로 영국 하원의원 1인의 선거비용은 우리돈으로 평균 8백만∼1천만원. 그것도 다 쓰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후보나 대리인이 금품제공 등의 부정행위를 한 경우 당선무효와 함께 영원히 하원의원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거나 당해 선거구에서 7년동안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돼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무리 소액일지라도 유권자가 금품을 받았을 경우 준 사람과 함께 구속 처벌되는 점이다.
또 선거 소송은 계속적인 심리로 단시일내에 끝내도록 규정, 위법행위를 하고도 장기간 의석을 유지하는 길을 봉쇄하고 있다.
영국선거가 조용히 치러진다고 한다면 미국선거는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 미국은 선거비용을 철저히 공개해야 하지만 비용의 상한선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 선거조직이 한국의 「위장 자원봉사자」와는 다른 「순수 자원봉사자」로 구성돼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또 지역마다 자생정치조직인 「정치행동협회」(PAC·Political Action Committee)가 있어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후보자의 선거운동을 대신 해주기도 한다.
92년 미국 대선때 클린턴 부시 페로 등의 후보가 사용한 선거자금 총액은 대략 5억5천만달러(약 4천9백20억원). 나라 크기와 경제력 차이를 감안할 때 여당후보 대선자금만 1조원 안팎으로 추계되는 우리에 비해 너무나 적은 액수다.
〈박제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