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는’ 정치인은 정녕 없는 걸까[윤다빈의 세계 속 K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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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수준은 도대체 왜 나아지지 않을까?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각각 두 번씩 취재하며 가졌던 의문입니다. 닫힌 섬과 같은 여의도만 보고선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야를 넓혀 세계 각국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고 한국 정치와 신랄하게 비교하겠습니다. 때로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때로는 우리 정치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일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언젠간 K팝, K드라마, K푸드처럼 K정치도 호평과 갈채를 받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미국 공화당에 조지 산토스(35)라는 하원의원이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통해 뉴욕주에서 당선된 젊은 신인 정치인입니다.

브라질 이민자 2세인 그는 선거 과정에서 미국 뉴욕의 명문 공립대인 버룩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대 대학원 MBA를 취득했다고 밝혔습니다. 골드만삭스와 씨티은행 등 월가의 대형은행에서 일한 경력까지 더해져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여기에 조부모가 홀로코스트 피해자이고 어머니는 9·11테러 생존자라는 강력한 스토리까지 더해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그의 학력과 경력이 대부분 거짓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심지어 그는 15년 전 브라질에서 사기 혐의로 기소된 적도 있었습니다. 법정에서도 자신이 골드만삭스에서 일했다고 허위 증언을 할 정도로 뻔뻔한 인물임이 드러났죠. 진보 성향이 강한 뉴욕 유권자를 겨냥한 막장 자작극이었습니다.

조지 산토스 뉴욕주 하원의원이 1월 25일 (현지 시간)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공화당 하원 회의를 떠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그는 명문대 졸업, 월가 근무 등 선거 때 내세운 이력이 허위로 드러났음에도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조지 산토스 뉴욕주 하원의원이 1월 25일 (현지 시간)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공화당 하원 회의를 떠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그는 명문대 졸업, 월가 근무 등 선거 때 내세운 이력이 허위로 드러났음에도 의원직 사퇴를 거부하고 있다. 뉴욕=AP 뉴시스
의혹 보도가 이어지자 산토스 의원 본인도 학력과 직업을 허위로 기재했다고 거짓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어떠한 법률도 위반한 적이 없다”며 꿋꿋하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도 뉴욕시민 10명 중 7명은 그가 사퇴해야 한다고 답했고, 당내에서조차 사임 압박이 이어지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것이죠.

●선거 때마다 단골로 나왔던 ‘용퇴론’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조지 산토스는 정치인의 기본적 속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싸우고, 한 번 잡은 권력은 내려놓지 않으려는 특징이죠. 권력의 속성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전 세계를 관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대한민국은 정치인에 대한 물갈이 여론이 무척 큰 나라입니다. 지난해 12월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에서 국회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15%로 꼴찌였습니다. 검찰(56%), 정부(56%), 법원(50%), 경찰(48%), 지방자치단체(43%)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은 수치였습니다.

국회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때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당들은 비장의 카드로 ‘물갈이’를 내세웁니다. 매번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50% 정도의 금뱃지들이 다음 공천을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누가 더 물갈이를 많이 했냐가 공천 개혁의 지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4년마다 돌아오는 물갈이의 계절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집단이 있습니다. 매번 용퇴론이 튀어나오지만 강력한 연대로 늘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게 하는 진귀한 능력을 보이는 이들, 바로 86 운동권 세대(80년대 학번‧60년대생)입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정치개혁 흐름과 함께 등장했던 정치 신인들은 이제 금뱃지를 3~4번씩 단 중진이 됐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이들의 숫자가 늘어났고 이번 21대 국회에서는 60년대생 숫자가 177명(58%)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성과로 정치개혁의 상징이었던 이들은 이제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 등을 거치면서 ‘내로남불’ 기득권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는 집단이 됐습니다.



●몇몇은 은퇴를 고민했지만
86그룹 내에서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몇몇 의원들은 86세대의 과오를 인정하면서 자성론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운동권의 상징으로 꼽히는 A의원은 용퇴를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기자들에게 자신의 은퇴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었죠.

그와 같은 세대인 B의원 역시 ‘우리를 대체할 젊은 세대가 있다면 확실하다면 물러날 의사가 있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형이 물러나면(86그룹들은 서로 형, 동생 호칭을 많이 씁니다) 우리도 다같이 휩쓸려 밀려나가는거야”라는 다른 86그룹 의원들의 설득에 잠시간의 고민을 거둬들였던 것입니다.

지금 민주당의 중책을 맡고 있는 한 86그룹 의원은 당시 식사자리에서 용퇴론에 대해 묻자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86은 아직 참모 역할밖에 못했다. 서울시장, 당대표, 대통령 선거 등에 도전한 사람이 얼마나 되나. 아직 제대로 일할 기회가 부족했다. 우리의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한 민주당 재선 국회의원은 이 때를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86그룹에서 스스로 퇴장을 고민하는 사람이 3명 정도 있었다. 근데 아래 세대에서 이 사람들을 밀어낼 수 있는 흐름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86그룹의 결속력이 생각보다 너무 강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불출마를 하면 전체가 물갈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정치인의 은퇴가 능사라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분야나 그렇듯 능력과 열정을 갖춘 이들이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갖는 자리로 가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더구나 지위를 내려놓고 소위 ‘뒷방 늙은이’로 살아가라고 요구하는 것도 권력을 먹고 사는 정치인에게는 분명 가혹한 일입니다.

특히 86세력의 경우 전문직 출신보다는 재야운동, 시민단체 등의 활동을 한 ‘직업 정치인’이 많습니다. 아직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인 이들 입장에서는 갈 곳 없는 이른 은퇴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용퇴론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금 꺼낸 건 국회를 출입하면서 한국 정치에서 감동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이 뭘까요. 결국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는 모습이 아닐까요.

코로나19 이후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대부부 정치인들은 조찬 모임부터 시작해 의정활동, 지역구 모임, 세미나, 친교 활동, 식사 모임 등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집단으로는 욕을 먹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보면 뛰어난 이들이 많죠. 그렇다보니 대부분은 ‘나 아니면 안 돼’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총리 사임이 준 신선한 충격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제 사회에 충격을 준 소식들이 있었습니다. 세계 젊은 정치인의 기수’로 꼽혔던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43)가 올해 1월 자신의 에너지 고갈 등을 이유로 전격 사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총리직은 탱크(정치적 열망)가 가득 차 있지 않는 한 수행할 수 없고 수행해서도 안 된다”며 “정치인도 인간이다. 더 이상 총리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탱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죠.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오른쪽)가 1월 19일 집권 노동당의 행사가 열린 북섬 네이피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한 후 사실혼 관계인 방송인 클라크 게이퍼드와 껴안고 있다. 아던 총리는 회견이 끝난 후 게이퍼드에게 깜짝 청혼을 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네이피어=AP 뉴시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오른쪽)가 1월 19일 집권 노동당의 행사가 열린 북섬 네이피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한 후 사실혼 관계인 방송인 클라크 게이퍼드와 껴안고 있다. 아던 총리는 회견이 끝난 후 게이퍼드에게 깜짝 청혼을 하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네이피어=AP 뉴시스
일각에서는 60%에 육박했던 그의 지지율이 29%로 급락하는 등 정치적 위기가 사임을 초래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내 뚜렷한 경쟁자도 없던 상황에서 본인이 고집한다면 충분히 3연임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현직 총리 최초로 출산 휴가를 쓰고, 이슬람 예배소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 때 히잡을 쓴 채 무슬림 유족을 위로해 큰 울림을 남겼던 지도자다운 퇴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여성 행정수반으로 8년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이끌었던 니콜라 스터전(52) 수반도 지난달 15일 재임 8년만에 “새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돌연 사임을 표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줄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게 일을 잘 하는 것”이라며 “머리와 가슴으로 이제 내려올 때란 것을 안다”고 밝혔죠.

다음 국회의원 선거가 이제 1년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도 유권자들의 물갈이 요구는 거셀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응답하는 정치인은 누구일까요. 모든 국회의원이 차기 공천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누군가는 아던 총리, 스터전 수반 같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을 각각 출입하면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를 두 차례씩 취재했습니다. 우연치않게 제가 출입하는 정당이 모두 승리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몇몇 정치인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도대체 선거를 이기는 비법이 뭐냐고 묻기도 했죠.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더 많이 내려놓고 민심에 부응해 혁신하는 쪽이 이깁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이 사라진 정치판에서 누군가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젠가 더 큰 쓰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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