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의 휴먼정치]두 父女의 10·26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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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 논설위원
박제균 논설위원
 역사는 때론 잔인한 얼굴로 다가온다. 아버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날, 그 딸의 비극에 대해 글을 쓰려니 마음이 무겁다. 37년 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의 아버지 최태민을 증오했다. 동아일보가 장기 연재했던 시리즈 ‘남산의 부장들’(김충식 기자)을 보자.

김재규, 최태민에 분노해

 “그(김재규)는 박근혜 양을 붙잡은 ‘목사’ 최태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김재규는 각하(박정희)에게 최의 비리를 보고했으나 박근혜 양이 최를 비호해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親鞫)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천하의 정보부장이 ‘사이비’ 목사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 … 대통령 식구들, ‘로열패밀리’ 때문에 생긴 김의 스트레스도 10·26의 한 원인이었다고 당시 정보부 국장들은 증언하고 있다.”

 시해 사건을 조사한 합동수사본부의 기록에 나타난 정보부 국장의 진술은 이렇다. “김 부장은 ‘최태민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아버지(박정희)의 기일(忌日)에 그 딸(박근혜)이 아버지 죽음의 한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최태민)의 딸(최순실) 때문에 초유의 위기를 맞은, 역사의 기막힌 우연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정희 대통령 말기 국정을 농단한 차지철 경호실장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다면 박근혜 대통령 시대에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은 딸을 정치적 죽음으로 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는 19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영 박정희’와 ‘올드 박정희’로 구분된다. 그가 무력으로 집권한 독재자란 사실은 같지만, ‘영 박정희’는 민족을 가난에서 구하고 근대화를 달성하겠다는 열정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남의 말을 충분히 들었고, 때론 반대 의견도 수용하며 능률적인 통치를 해나갔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올드 박정희’는 권력에 취했다. 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에는 더 나빠져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통치보다 권력 유지에 집착했다. 대통령 주변의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대해 진언하면 비판받은 당사자에게 ‘내부 고발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식이었다. 권력 핵심부가 곪을 대로 곪아 갔다.

 10월 유신 때 박근혜 대통령은 스무 살이었다. 육 여사 서거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다. 통치에 능했던 ‘영 박정희’보다 권력에 집착했던 ‘올드 박정희’에게서 정치를 배운 것이 오늘날 박 대통령 비극의 출발점이다. ‘올드 박정희’는 고독했고, 그럴수록 몇몇 측근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부모를 모두 총탄에 보낸 박근혜 대통령도 고독했고, 그럴수록 최태민-최순실 부녀 같은 ‘사이비류(流)’에 의지했다.

차기 대통령의 자격

 이번 ‘최순실의 난(亂)’을 겪으며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한국적 대통령제가 지속되는 한 차기 대통령은 무엇보다 심각한 ‘트라우마’가 없어야 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대통령직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국민과 같은 눈높이에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때 언론사는 각 대선후보의 신상명세표 같은 걸 작성한다. 물론 후보 본인이 아니라 캠프에서 답해 준다. 지난 대선 때 측근이 신상명세표를 채우기 위해 박 후보에게 ‘친구 관계’를 묻자 돌아온 답은 이랬다고 한다. “친구?… 없어요.”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
#박정희#김재규#최순실#최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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