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마감 단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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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기자들에겐 데드라인(마감 시간)보다 중요한 게 없다. 특종을 건졌거나, 엄청나게 큰 의미가 있는 기사라도 마감 시간을 넘기면 신문에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소 생소한 ‘마감 단계’는 현장의 기자들이 기사 마감을 재촉하는 데스크에게 하는 말이다. “마감 단계입니다. 곧 기사 보내겠습니다.” 풀어보면 “아직 기사를 못 썼지만, 곧 보낼 테니 기다려 주세요”라는 의미다. 간혹 변명하는 말로 쓰인다는 얘기다.

북한이 이처럼 기자들이 자주 활용하는 용어를 썼다. 북한 국가우주개발국 국장은 14일 “새로운 지구관측위성 개발을 마감 단계에서 다그치고 있다”고 했다. 기자의 언어로 계속 접근한다면 “위성 개발을 못 했지만, 곧 완료할 테니 기다려 주세요”라는 말로도 볼 수 있다.

외교안보 언어로 바꾸면 어떨까. “장거리미사일 발사 준비가 거의 다 됐다. 북한 최대의 행사인 노동당 창건 70주년(10월 10일)을 전후로 쏠 수도 있으니 알아서 우리(북)를 잘 대해주기 바란다”라고 할 수 있겠다. 대외적으로는 25일 미중 정상회담과 다음 달 16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뤄 달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마감 단계라는 용어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북한이 미사일 발사 준비를 완료할지 불분명하다는 모호성도 깔려 있다. 그럼에도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4차 핵실험 가능성을 거론함으로써 한미 간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 논의를 이끌게 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중국이 반대하는 사드 문제가 나오면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고 전승절 열병식 참석으로 쌓은 한중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들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도 회복해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할 기회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북한이 진짜로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할 것인지도 궁금하지만 이런 도발적 언사는 3주밖에 안 된 ‘8·25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의 효용성에도 관심을 돌리게 한다. 무엇보다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의 조건인 ‘비정상적 사태’와 연결된다. 정부는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10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가 비정상적인 상황이냐’는 질문에 “북한 도발 시 안보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리부터 비정상 사태로 못 박았다간 대북 확성기 방송 재개 논란의 틀에 갇힐 수 있다고 우려하는 셈이다.

하지만 사안은 간단하다.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나 핵실험은 중대한 도발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2094호에 대한 명백한 위반임에 틀림없다. 이를 비정상 사태가 아니라고 한다면 한국의 전략적 입지만 축소된다.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한국이 나서서 정상 사태로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핵실험을 하거나 장거리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움직임은 없다고 한다. 벌써부터 북한이 설정한 틀에 끌려갈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변칙적인 접근과 도발을 일삼는 북한에 대한 다변화된 단계별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를 거론하지 않는 내용의 대북 방송 검토는 어떨까. 이는 북한이 ‘최고 존엄’ 모독이라고 나설 빌미를 차단할 방법이기도 하다. 아이유와 소녀시대의 노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초기 단계에선 충분한 대응이 될 수 있다. 도발을 위협하는 북한에 보내야 할 답변은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하는 틀에 갇혀 고민하는 대신 일상의 위대함을 전하는 데 있지 않을까.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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