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DJ)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북한 김정은의 초청을 받아 어제 3박 4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오전 11시 6분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 등 이 여사 일행 19명이 탄 전세기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강원 철원군 백마고지역에서 열린 ‘경원선 남측 구간’ 기공식에서 막 축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햇볕정책을 폈던 대통령의 부인을 평양으로 불러들이는데, ‘통일대박’을 강조한 대한민국 대통령은 남북 철도가 끊긴 곳에서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철도 연결의 꿈을 외쳤다. 광복 70주년을 열흘 앞둔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문상 후 3년 8개월 만에 다시 이뤄진 이 여사의 평양행은 분단 70주년이기도 한 올해 화해는커녕 관계가 더욱 경색된 남북 간에 유일하게 이뤄진 소통이다. 김정은 면담이 이뤄질 경우 남북문제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직접 확인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이 탄력을 받으면서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반면 북이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을 압박하기 위해 이 여사의 방북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다. 2000년 6·15선언의 계승을 비롯해 정치성 있는 사안을 논의할 경우 8·15까지 남남(南南)갈등이 증폭되고 남북관계에 부담이 될 우려도 없지 않다.
박 대통령은 경원선 기공식에서 “오늘이 실질적인 통일 준비로 나아가는 역사적 날로 기록될 것”이라며 “북한은 우리의 진정성을 믿고, 남북화합의 길에 동참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북의 호응을 이끌어낼지 방법론이 없는 비전은 공허한 정치쇼처럼 비친다. 박 대통령이 지난 2년 반 동안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되뇌었지만 남북대화와 교류는 꽉 막힌 상태다.
박 대통령이 아무리 선의의 구상을 갖고 있다고 해도 북이 외면하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남북의 현실이다. 지금까지 구사한 대북정책이 작동되지 않았으면 똑같은 레퍼토리만 반복할 것이 아니라 북을 이끌어낼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압박이든 유인책이든,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방책을 찾지 않는다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이름만 그럴듯하고 콘텐츠는 없다는 평가로 끝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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