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까지 이겨놓고도… 전례없는 ‘정권초 혼란’ 왜?

  • 입력 2008년 5월 10일 02시 58분


■ ‘정권교체’ 아직도 진행중인가

유가 폭등 - 광우병 논란 - 與與갈등 등 안팎 악재 겹쳐

88년엔 집권직후 여소야대… 98년에는 인재풀 부족

2008년처럼 일찌감치 국정장악력 떨어진 적은 없어

“대선, 총선은 이겼지만 정권이 교체된 곳은 청와대뿐이다.”

9일 만난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출범 75일을 맞은 이명박 정부의 현주소를 이같이 압축했다.

역대 대선 사상 최대 표차로 집권했고, 한 달여 전 4·9총선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단일 정당의 최대 의석(153석)을 얻었지만 아직 완전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과도기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18대 국회가 개원하는 6월까지 여전히 111석의 소수당에 불과하다.

인터넷과 일부 방송 매체가 ‘광우병 공포증’을 확산시키면서 임기 초 대통령에 대한 ‘온라인 탄핵운동’에 불을 지피고, 대선 참패의 늪에 빠졌던 야당과 진보세력은 반전(反轉)의 계기를 잡은 듯 대정부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 사회적 환경이 비슷했던 1988년과 1998년에 견주어 봐도 이토록 국정 장악력이 일찌감치 떨어진 적은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이 같은 유례없는 혼란의 원인으로 외생변수와 내생변수를 거론하고 있다.

먼저 외적(外的)으로는 치솟는 유가와 국제 곡물가격, 불안정한 외환시장과 국제금리가 이명박 정부의 탄생 이유이기도 했던 ‘경제 살리기’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

내적(內的)으로는 대선, 총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경선 때부터 비롯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세력과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여당 연합군’에 머물고 있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정부와 산하기관 학계 언론계 문화계 시민단체 등에 깊이 뿌리내린 진보세력이 기득권 유지를 위한 ‘진지전(陣地戰)’을 본격화하는 데도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세력은 목표의식을 상실한 채 새 정부 인선과 공천 파동 등을 겪으면서 분열, 이완됐다는 내부 비판이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 5년간 6만5804명이 늘어난 공직사회를 축소 개편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공직사회의 물밑 저항과 방관, 전임 정부에서 이념과 코드에 의해 임명됐던 정부산하기관장들의 ‘버티기’도 “정부 내에서조차 정권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을 낳고 있다.

1988년 이른바 ‘평화적 정권교체’를 내세워 집권한 노태우 정권도 18대 총선처럼 대선 4개월 만에 총선을 치렀고 이번과는 달리 여소야대 상황을 맞았다. 여기에 5공 청산이라는 흐름에 내몰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이루면서 ‘여여(與與)’ 내부 갈등에 시달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당시는 1988 서울 올림픽과 이른바 ‘3저(低) 호황’이라는 경제여건 등이 과도기 국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1998년에는 헌정사상 최초로 김대중 정부가 이른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다. 그러나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집권 인재풀 부족이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난상황인 외환위기 극복이라는 국민적 컨센서스에 바탕해 국정 프로그램을 전개해나갈 수 있었다.

다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이명박 정부의 2008년 5월은 10년 전, 20년 전의 과도기 중에서 가장 어려운 환경들만 뽑아놓은 듯하다는 것이 정치권 안팎의 분석이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국무총리의 역할과 한계

“조정자 아닌 조력자” 비판에 “부처 지휘 강화”

“예전 같으면 총리실 홈페이지가 비판 글로 도배됐을 텐데….”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를 둘러싼 반대 여론이 촛불시위로 촉발됐던 2일 총리실 관계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인터넷에 온갖 ‘광우병 괴담’이 나돌고, 청와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성토의 글이 가득한데 총리실은 조용했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총리실이 정책 조정자에서 ‘조력자’로 바뀌면서 국민의 눈에 대통령만 보이게 된 것 같다”며 “어떤 면에선 (대통령의) 방패막이 사라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근 한승수 국무총리의 역할이 도마에 올랐다. 광우병 논란, 아동 성폭력, 조류인플루엔자(AI), 내각 인사 혼선 등으로 정부가 총체적인 위기 국면을 맞고 있는데도 내각을 지휘 통솔해야 할 총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8일 한 총리가 미국 쇠고기 수입 재개와 관련해 대국민 담화에 나선 것도 ‘총리의 역할 찾기’ 고민이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국무총리는 국정현안조정회의를 통해 매주 부처 장관들과 함께 정책을 조정하는 ‘국정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새 정부에서는 청와대의 조력자로서 자원외교 등 새로운 역할에 한정됐고 조직도 반토막 나는 등 그 역할이 축소된 게 사실이다.

한 총리는 총리실 직원들에게 “조직이 반으로 줄었다고 역할이 축소된 것은 아니다”라고 독려해 왔지만 총리실 당국자들도 조직의 ‘정체성’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지금은 ‘개혁’ 대통령에 총리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이라며 “대통령은 ‘통합’, 총리는 ‘개혁’으로 역할분담을 해야 한다. 총리에게 부처를 총괄할 수 있도록 정책조정 권한을 줘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한 총리도 최근 자신의 역할 논란에 대해 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총리실의 부처 지휘감독 역할을 강화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대통령실 기능 제대로 작동하나

아마추어리즘 혹평… “이제부터 진면목 보일 것”

청와대 대통령실에 대한 평가는 청와대 안과 밖이 크게 엇갈린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출범 두 달이 넘어서면서 운영시스템이 제자리를 찾았고, 이제부터 본궤도에 올라 국정운영을 주도해 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밖에서는 현재의 국정 난맥상이 청와대 대통령실의 ‘아마추어리즘’에서 비롯됐다고 혹평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실에 대한 비판은 정무 민정 홍보라인으로 집중되고 있다.

정무라인 쇄신론은 공천과정에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고, 광우병 논란을 겪으면서 민정 홍보라인까지 도마에 올랐다. 비판의 핵심은 ‘아마추어리즘’이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청와대에 정무기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무의 ‘정’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정책 조율에서 엇박자를 보이고, 박근혜 전 대표를 비롯한 친박세력과의 불완전한 동거에 대해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정라인은 인사파동을 겪으면서 인사검증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줬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홍보라인은 광우병 논란 과정에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류우익 대통령실장은 정치 경험이 없는 학자 출신이다. 정치권에서는 정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이명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기 위해서는 정치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 실장으로서 더 적격이라는 얘기가 많았다.

이에 대해 류 실장은 “정치 경험이 적은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기존 정치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신뢰와 설득의 리더십을 보여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청와대 내부의 운영시스템이 조기에 자리 잡은 것은 류 실장의 꼼꼼한 리더십 덕분이다. 류 실장은 출범 초기부터 ‘군기반장’을 자청했다. 류 실장은 3월 첫 직원조례에서 “힘과 욕망, 감정의 표출을 절제하라”고 했다. 수석비서관들에게는 “대통령의 그림자가 돼라”며 앞에 나서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류 실장의 진면목은 아직 청와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인사파동, 삐걱거리는 당-청관계, 쇠고기 재수입과 관련한 광우병 논란 등에서 류 실장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류 실장은 업무 파악을 위해 대통령과 늘 함께했던 수행보좌 방식에서 벗어나 국정운영의 비전을 그리고 조율하는 ‘책사’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정무 민정 홍보라인 보강과 관련해서는 정치특보와 정무 담당 특임장관 등을 추가로 임명해 정무라인을 보강하고, 민정라인은 업무 조정으로, 홍보라인은 전문가를 충원해 부족함을 메우겠다는 방침이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제자리 못잡은 한나라

아직도 경선분위기…정책 조율 역할 못해

정권이 교체됐지만, 아직도 과도기적인 정국이 이어지는 데는 제자리를 잡지 못한 한나라당의 ‘여당 역할 부재’도 원인을 제공했다.

혁신도시, 추가경정예산, 뉴타운, 쇠고기,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등 현안이 터질 때마다 당정협의를 열긴 했지만 당과 정부가 꼼꼼하게 대책을 점검하기보다는 당이 정부를 질타하는 자리가 되곤 했다. 당은 그때마다 “정부를 따끔하게 야단쳤다”는 식의 ‘야당식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9일 “여당이 된 이후에는 ‘감시와 비판’에서 ‘대책과 집행’으로 역할 모드를 바꿔야 하는데도 10년 만의 정권교체다 보니 말처럼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당이 한곳으로 힘을 집중하지 못하는 ‘결속 부재’도 문제다. 당내에서는 ‘한나라당은 아직도 경선 중’이라는 말이 많다. 복당 문제로 마음이 상한 친박 의원들은 현안마다 당 지도부와 딴소리를 하거나 비협조적인 자세다. 18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긴 했지만 친박을 끌어안지 못하면 사실상 여소야대나 마찬가지인 정국 구도다. 더구나 ‘쇠고기 국회’가 된 5월 임시국회에서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에 밀리는 형국이다.

당의 리더십 부재도 지적돼야 할 대목이다. 7월 초가 되면 새 지도부가 선출되기 때문에 지금의 ‘시한부 지도부’에 힘이 실리기는 어렵다. 22일 원내대표-정책위의장 선출, 6월 초 국회의장단 및 국회 상임위원장 선출, 7월 3일 전당대회 등 줄줄이 예정된 선거 일정으로 상당수 의원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쇠고기 문제 등 현안에 대해 정부와의 정책 조율을 지휘해야 할 한 핵심 당직자는 18대 국회 선출직을 따내기 위해 하루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한 표’를 호소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낙선 의원들은 책임감이 부족하고 82명이나 되는 초선 당선자는 의욕은 넘치지만 공식 권한이 없는 과도기적인 상황도 상황 악화를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결국 18대 국회 원 구성과 새 지도부 구성이 끝나야 여당으로서의 전열정비가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 민심 이반과 국정 지지도 하락은 하루가 다르게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게 문제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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