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의원 斷指 논란]2003년 동아일보기자 동행취재기

  • 입력 2005년 5월 20일 04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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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못 믿겠다면 함께 (손가락이 잘린) 공장으로 갑시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그때 상황을 설명하지요.”

2003년 4월 5일 오전. 기자는 열린우리당 이광재(李光宰·당시 대통령국정상황실장) 의원과 함께 인천 부평으로 향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인 당시 세간의 관심은 권력 실세로 떠오른 ‘좌희정(안희정) 우광재(이광재)’에 집중돼 있었고 이 의원은 “병역기피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기자는 당시 사회부 사건기자로 한 달여에 걸쳐 이에 대해 취재를 했지만 손가락을 절단한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수십 차례 이 의원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결국 2003년 3월 13일 그의 부인을 통해 “(이 의원이) 병역기피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의혹을 받고 있으니 현재 위치로 볼 때 뭔가 해명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사를 전달했다.

2003년 3월 22일 오후 7시. 두 차례의 약속 취소 끝에 기자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한 카페에서 처음으로 이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의원은 간단하게 절단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구체적인 정황이나 근거는 말하지 않았다.

이후 두세 차례 더 만났지만 소득이 없었다. 쫓고 쫓기던 상황이 거듭되면서 이 의원은 “도피 중 위장취업한 공장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잘렸지만 당시에 본 사람이 없어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 그 공장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기자의 요청에 그는 “주소는 모르나 위치는 기억하니 함께 간다면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2003년 4월 5일 토요일 오전 이 의원과 기자, 그리고 동료 기자 등 3명은 기자의 승용차로 공장이 있었다는 부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85년 제적당하고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선배들이 운동을 더 해야 한다고 해 두 차례 입영연기를 했죠. 이때 부평의 한 작은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는데 대기업 위장취업을 위해 기계조작법, 노동자의 습성 등을 배웠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정집 지하에 기계 몇 대 놓고 하는 식이고요. 이때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어요.”

그는 “당시 병원에는 가지 않았고 본 사람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군부대를 지나 한 동네에 도착했다. 그는 취업 당시 버스를 타고 왔는데 군부대 옆 언덕으로 우회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왕복 6차로 도로변을 이곳저곳 훑었지만 이 의원은 결국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동네가 완전히 변해서 못 찾겠네…. 여기쯤인데…. 여기쯤에 골목길이 있었고….”

그는 허탈해하는 기자를 보며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소득 없이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대화는 거의 없었다. 허탈한 상태라 무엇을 더 물어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못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맥주 6병을 마셨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말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 증명을 하고 싶었는데…. 답답하다.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서 좋은 사이가 되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이 후 그와는 한 달여 후 딱 한번 식사를 함께한 것 외에는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기자는 2005년 5월 19일 그의 홈페이지에서 ‘1986년 태극기에 혈서를 쓰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고 그가 직접 쓴 글을 보았다.

왜 그는 2년 전에 기자를 데리고 직접 부평까지 갔을까.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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