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5일 오전. 기자는 열린우리당 이광재(李光宰·당시 대통령국정상황실장) 의원과 함께 인천 부평으로 향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인 당시 세간의 관심은 권력 실세로 떠오른 ‘좌희정(안희정) 우광재(이광재)’에 집중돼 있었고 이 의원은 “병역기피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기자는 당시 사회부 사건기자로 한 달여에 걸쳐 이에 대해 취재를 했지만 손가락을 절단한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수십 차례 이 의원과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결국 2003년 3월 13일 그의 부인을 통해 “(이 의원이) 병역기피를 위해 손가락을 자른 의혹을 받고 있으니 현재 위치로 볼 때 뭔가 해명은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사를 전달했다.
2003년 3월 22일 오후 7시. 두 차례의 약속 취소 끝에 기자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옆 한 카페에서 처음으로 이 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의원은 간단하게 절단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했지만 구체적인 정황이나 근거는 말하지 않았다.
이후 두세 차례 더 만났지만 소득이 없었다. 쫓고 쫓기던 상황이 거듭되면서 이 의원은 “도피 중 위장취업한 공장에서 사고로 손가락이 잘렸지만 당시에 본 사람이 없어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그러면 그 공장이 어디 있느냐. 우리가 가서 확인해 보겠다”는 기자의 요청에 그는 “주소는 모르나 위치는 기억하니 함께 간다면 안내해 주겠다”고 말했다.
2003년 4월 5일 토요일 오전 이 의원과 기자, 그리고 동료 기자 등 3명은 기자의 승용차로 공장이 있었다는 부평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85년 제적당하고 신체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선배들이 운동을 더 해야 한다고 해 두 차례 입영연기를 했죠. 이때 부평의 한 작은 공장에 위장취업을 했는데 대기업 위장취업을 위해 기계조작법, 노동자의 습성 등을 배웠습니다. 공장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정집 지하에 기계 몇 대 놓고 하는 식이고요. 이때 기계를 다루다가 사고를 당해 그렇게 됐어요.”
그는 “당시 병원에는 가지 않았고 본 사람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우리는 군부대를 지나 한 동네에 도착했다. 그는 취업 당시 버스를 타고 왔는데 군부대 옆 언덕으로 우회전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왕복 6차로 도로변을 이곳저곳 훑었지만 이 의원은 결국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
“동네가 완전히 변해서 못 찾겠네…. 여기쯤인데…. 여기쯤에 골목길이 있었고….”
그는 허탈해하는 기자를 보며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반복했다.
소득 없이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대화는 거의 없었다. 허탈한 상태라 무엇을 더 물어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못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맥주 6병을 마셨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정말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 증명을 하고 싶었는데…. 답답하다. 나를 믿어줬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서 좋은 사이가 되자”고 말하고 헤어졌다.
이 후 그와는 한 달여 후 딱 한번 식사를 함께한 것 외에는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기자는 2005년 5월 19일 그의 홈페이지에서 ‘1986년 태극기에 혈서를 쓰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다’고 그가 직접 쓴 글을 보았다.
왜 그는 2년 전에 기자를 데리고 직접 부평까지 갔을까. 또 그 장소는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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