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北고광욱씨가 찾는 南아내 이춘애할머니

  • 입력 2000년 10월 2일 18시 50분


50년 동안 남편을 그리며 수절(守節)해온 한 여인의 한(恨). 반세기만에 들려온 남편의 생존 소식과 그 남편이 지금 자신을 찾고 있다는 꿈같은 사실에 칠순 할머니가 된 아내는 그동안의 ‘기다림의 한’을 모두 눈물로 쏟고 말았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가을 피란 과정에서 남편과 헤어진 이춘애(李春愛·72·서울 종로구 창신동)씨. 2일 이씨는 북의 남편 고광욱(高光旭·73)씨가 제2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자신과 두 자녀의 생사확인 신청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20년 전부터 제사까지 지냈는데 살아있었다니….”

46년 결혼한 이씨 부부는 당시 전남 광주에서 운수업을 하던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 고씨도 전남도청 공무원이어서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다.

48년 첫 아들을 낳고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한 맏며느리 생활을 하고 있던 이씨에게 6·25전쟁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해 가을 인천 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과 국군이 도심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자 남편 고씨는 가족들을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피란 보냈다. 당시 고씨는 이씨를 “먼저 부모님 모시고 떠나면 나도 곧 따라가겠다”며 안심시켰다.

“그게 끝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며칠 지나면 또 만날 수 있으려니 믿었어요.”

당시 임신 9개월의 만삭이었던 이씨는 필요한 짐만 단출하게 꾸리고 장성으로 떠났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걸었던 힘겨운 피란길이었다. 하지만 ‘며칠 있으면 오려니’하고 기다리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란 생활중인 10월 딸을 낳았지만 남편의 소식은 끝내 없었다.

전쟁은 이씨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남편뿐만 아니라 피란 도중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부모마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전쟁 후 빈털터리가 된 이씨는 어린 남매를 데리고 광주와 서울을 전전하며 구멍가게 등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너무도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이씨에게 재혼을 권유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씨는 수절을 택했다. “오직 자식들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 선택은 간단하고 쉽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세월을 담담하게 되돌아보는 이씨의 말에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는 듯 했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어 너무 기쁘네요.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왜 이제 나타났느냐’고 따지는 것 외에는 생각이 잘 안 나네요.”

<이완배기자>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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