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혈육찾은 南의 가족들]"꿈은 아니겠지…"

  • 입력 2000년 7월 27일 19시 32분


《“정말로 북쪽에 제 가족이 살아있었나요. 꿈만 같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북한에 있는 가족의 생사여부가 발표된 27일. 서울 중구 남산동 3가 대한적십자사에는 이를 확인하기 위한 이산가족들의 문의전화가 폭주했다. 오후5시까지 전화로 생사여부가 확인된 사람은 40여명. 김확실씨는 북에 남아있는 가족 7명 가운데 단 1명만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되자 전화통화를 하면서 “믿을 수가 없다”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전화통화에서 가족 모두가 사망하거나 ‘확인불가’로 통보받은 가족들은 “그렇다면 유해라도 찾을 길이 없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며 전화통을 붙잡고 호소, 전화문의를 받던 적십자사 직원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날 TV를 통해 북의 가족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도 직접 북측 서류를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며 적십자사를 찾은 이산가족들도 줄을 이었다.

1사단에 근무하다 6·25전쟁 발발 직전 당시 남한 땅이었던 고향 개성에 휴가간 것이 가족과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는 송성수(宋聖秀·70)씨는 부모는 세상을 떠나고 동생 4명이 모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송씨는 “동생들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는 했지만 막상 만날 수 있다니 꿈만 같다”며 “동생들을 만나면 밤새 못다한 얘기도 나누고 남동생에게는 족보도 건넬 생각”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부모는 세상을 떠나고 조카만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김정수(金貞壽·66)씨는 “조카를 만나면 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또 그리고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53년 동안 가족을 만날 방법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기 전에 만날 수 있게 될 줄이야….”》

▼"찬송가 들으면 고향생각"▼

▽윤대호씨(71·서울 관악구 봉천6동)=1947년 월남하면서 헤어졌던 가족 중 남동생 3명과 누나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윤씨는 부인 나윤열(羅潤熱·67)씨를 붙잡고 우느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 윤기선씨(사망)가 교회 장로를 지낼 정도로 당시로선 흔치 않던 독실한 기독교 가족이었던 윤씨 가족은 형제간의 우애가 남달랐다.

윤씨는 “고향인 평남 순천군 자산면에는 당시 크리스마스만 되면 찬송가가 울려퍼지곤 했다”며 “찬송가만 들으면 고향 생각이 나 월남 후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향을 떠나 평양에 살던 윤씨가 월남을 결심한 것은 공부 욕심 때문이었다.

“남한에서 대학도 나오고 남보란듯 번듯한 직장도 갖고 싶었죠.”

윤씨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친구와 개성(당시 남한 영토)행 열차를 탔으나 친구는 보안소(경찰) 검문에 걸려 해주로 도망치는 바람에 혼자 개성에 도착했다.

이후 윤씨는 원하던 명문 송도중학교에 입학해 매점에서 빵장사를 하며 학비를 벌었지만 이내 6·25전쟁이 터져 졸업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공부하겠다는 꿈도 산산조각났다.

그는 52년 공군에 들어가 2년간 목수일을 배운 덕에 89년까지 서울 용산 미8군 공병대에서 목수로 일했으며 이후 지금까지 서울 강남에서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어릴 적 욕심이 지나쳤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하지만 가족들과 헤어져 지내면서도 원한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을 자책할 때도 많았습니다.”

윤씨는 북의 형제들을 만나게 되면 “지난 53년을 되돌리고 싶다고 말하겠다”며 회한에 젖었다.

▼여동생이 살아있다니 단박에 알아볼것▼

▽김각식씨(71·대구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북한에 여동생 정숙씨(66)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27일 오후 TV뉴스를 통해 알았다는 김씨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6·25전쟁 당시 1·4후퇴때 가족들을 떠나 단신으로 월남한 김씨는 이후 대구에 정착, 가정을 꾸린 뒤 50년간 구멍가게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어렵게 생활해 왔다.

김씨는 “죽기 전 고향(함남 북청군 당포리)에 두고온 가족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는 소원을 이제야 이루게 됐다”며 “앳된 동생의 얼굴을 본 지 50년이 지났지만 단박에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 제사 10년전부터 지내"▼

▽채성신씨(72·경기 하남시 덕풍동)〓북쪽의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을 찾았던 채씨는 어머니와 남동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정열씨(62) 1명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고향인 평북 영변군 황원면에서 48년 9월 월남한 채씨는 “아버지는 47년 늦가을 ‘북한에서는 못살겠다’며 월남하셨고 1년 뒤 나도 남쪽에서 공부할 생각으로 내려왔다”며 “고향에 집도 있고 땅도 있어 어머니와 동생들은 고향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남쪽에서 재혼을 하셨다가 82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 생전에 가끔씩 술을 들면 ‘내가 너희 엄마와 동생들을 데리고 왔어야 하는 건데…’하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며 “생사를 확인할 길 없었지만 10여년전부터 어머니 생일(음력 6월1일)때는 해마다 제사를 모셔왔다”고 덧붙였다.

▼"부모님 평생恨 못풀어 죄송"▼

▽정명희씨(71·여·동해시 천곡동)〓이날 오후 1시반 적십자사로부터 “부모는 돌아가셨지만 오빠 언니 남동생 2명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화로 통지받은 정씨는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었다.

정씨가 신의주에 살던 가족과 생이별을 한 것은 6·25전쟁이 나기 6일전인 50년 6월19일. 금광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동상에 걸리는 바람에 아버지 약을 구하기 위해 평북 신의주 본가를 떠나 원산의 할머니 집에 왔다가 전쟁이 일어나 발이 묶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마을 인근 동굴에서 피란생활을 하기도 했던 정씨는 원산에 들어온 현재의 남편인 국군을 만나 1·4후퇴 때 함께 남하했다. 이때만 해도 전쟁이 끝나는 즉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으나 그 기대는 휴전과 함께 무너졌다.

부유하진 않았지만 당시 북에서 가족과 화목하게 살았다는 정씨는 “딸의 생사를 모른 채 평생 한을 갖고 사시다 돌아가셨을 부모님께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7,8년전 소식들어 만날수 있다니"▼

▽전기영씨(70)〓평남 안주가 고향인 전씨는 7, 8년 전 미국에 사는 친형을 통해 북한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안부를 주고 받아오다 이번에 만날 수 있는 일말의 기회를 갖게 된 경우.

전씨는 그동안 부모님과 남동생 2명은 모두 죽고 현재 북한엔 50대 남동생과 누이동생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남동생이 몸이 아파 요양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 이번에 북한에 가더라도 누이동생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47년 친형과 함께 월남한 전씨는 “가족들 안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친형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 가 북한쪽 인사와 연락이 닿으면서 가족들이 고향인 안주를 떠나 평양 순안비행장 근처로 옮겼다는 것을 알게돼 그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전씨는 “보성중학 1회 졸업생인 친할아버지는 일제 때 군수를 지낸 친일파였고 작은 할아버지는 독립군이었다”며 “막상 가족들과의 상봉이 이뤄진다니 분단으로 찢긴 우리 가족사가 새삼 되새겨져 만감이 교차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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