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분할 청구제도 시행 10년 점검]황혼이혼 부채질

  • 입력 2000년 7월 6일 19시 38분


한 중견기업 회장 부인 S씨(73)가 3일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내면서 1000억원의 재산을 나눠달라고 요구해 화제다. 이는 이혼소송 사상 최고액수. 부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이혼 재벌’이라는 말이 생겨날 수도 있다.

신씨가 1000억원의 거액을 남편에게 요구한 법적 근거는 민법 제839조의 2에 규정된 ‘재산분할 청구’ 제도.

이혼을 한 부부의 한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혼인생활중 형성한 재산을 각자 기여한 정도 등을 고려해 공평하게 나눠줄 것을 청구하는 권리다. 90년 1월 민법개정 때 도입돼 91년 1월1일부터 시행된 것으로 10년째를 맞는다.

◇재산분할 제도에 의한 판례〓A씨(74)는 98년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결단을 내렸다. 55년간 살아온 남편(76)과 이혼하기로 한 것. 남편은 결혼 직후부터 불륜과 폭행을 일삼아왔다.

A씨는 그러나 함부로 이혼을 할 수 없었다. 자녀 문제와 함께 ‘먹고 사는’ 문제가 결렸기 때문. A씨는 그러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혼을 하더라도 재산을 나눠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혼 소송을 냈다.

A씨는 결국 지난해 7월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남편은 부인에게 2억원의 위자료와 별도로 73억원의 재산중 24억원 상당을 나눠주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재산분할 제도는 이처럼 이혼하는 여자에게 경제적인 보장을 해줌으로써 ‘이혼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개정 전의 민법에 따르면 혼인중에 취득한 재산은 그 재산이 누구 명의로 돼있느냐에 따라 소유자가 정해졌는데 부부의 재산은 대부분 남편 명의로 해놓아 여자는 이혼을 해도 한푼도 못받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최근 이혼소송을 보면 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제기하는 소송이 전체 이혼소송의 7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며 “여자가 이혼을 해도 재산분할로 경제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한 재산분할 제도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나 나눠주나〓법은 “당사자들이 협력으로 이룩한 재산의 액수와 기타 사정을 참착해 분할의 액수와 방법을 정한다”고 규정했다. 법원 판례는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전업주부의 경우 부부재산의 30%를, 맞벌이 부부의 경우 50%를 나눠받도록 하고 있다. 서울고법은 98년 9월 맞벌이부부에 대해 아내의 재산형성 기여도를 남편보다 높게 평가,전체 재산 1억7000만원중 60%이르는 1억원을 아내가 갖도록 했다.

서울가정법원은 지난해 3월 이혼판결 107건을 분석, “이혼여성의 88%가 재산분할을 인정받았고 분할의 비율은 30∼40%가 33건으로 가장 많았다”고 발표했다.

◇세금도 내야 하나〓국세청은 이혼하면서 배우자로부터 분할받은 재산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해왔다. 그러나 여성계에서는 “남편한테서 증여받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번 재산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박했다. 헌법재판소는 97년 10월 분할재산에 증여세를 물리도 록 한 상속세법 규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국세심판원도 “분할재산은 증여세나 양도세의 과세대상이 아니다”는 입장.

◇위자료와의 차이는〓재산분할은 정신적 손해배상과는 다르기 때문에 위자료와 별도로 청구할 수 있다. 또 ‘간통한 여자’ 등 혼인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경우도 위자료는 청구할 수 없지만 재산분할은 청구할 수 있다. 이혼 후 2년이 지나면 청구권리가 소멸한다.

◇문제점과 대책〓조배숙(趙培淑)변호사는 “남자들이 증권과 채권 등에 투자해 재산을 숨길 경우 재산분할 자체를 요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조변호사는 “일단 이혼하기로 마음먹으면 남편이 재산을 처분하거나 숨길 경우에 대비해 가압류 등의 조치를 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어느 할머니 '순정'의 승리-집나갔던 남편 이혼요구 부당▼

지난달 27일 서울가정법원 372호 법정. 황혼의 노(老) ‘부부’가 마주섰다. ‘부인’ 김모씨(64)가 ‘남편’ 김모씨(65)를 이렇게 가까이서 만난 것은 30여년만의 일. 사라졌던 남편이 갑자기 나타나 부인 김씨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내 법정에서 마주 선 것. 그러나 부인 김씨의 생각은 달랐다.

“한번 남편은 평생 남편입니다. 지금이라도 남편이 돌아오면 결혼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김씨는 “감감무소식이던 남편을 계속 기다려 왔는데 이제와서 이혼녀가 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이들은 1960년 결혼했다. 그러나 65년 군에 입대한 남편이 폐결핵으로 의병제대하면서 긴 이별이 시작됐다. 김씨는 일할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공장 등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남편의 치료비가 늘어나 집안 살림은 어려워져 갔다. 생활고로 인한 불화가 계속되자 남편은 어느날 홀연히 집을 나가버렸고 혼자 남은 김씨는 파출부일 등을 하며 외아들을 키워왔다.

남편 김씨는 98년 12월 갑자기 부인 김씨를 찾아왔다. 그 사이 남편은 다른 여자와 결혼, 장성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남편은 “호적을 정리하자”며 부인 김씨에게 합의이혼을 요구했고 김씨가 이를 거절하자 법원에 소송을 낸 것.

재판을 맡은 홍석범(洪碩範)판사는 남편 김씨가 낸 이혼청구를 기각했다. “남편 김씨는 아내와 자식을 버려둔 채 집을 나간 뒤 다른 여자와 동거해 가정파탄의 주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이혼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판결 이유. 홍판사는 “여자쪽의 요구로 황혼 이혼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김 할머니의 사례는 보기드문 일”이라며 “법정에 선 할머니는 참 순진해보였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의 ‘순정’이 이어질 수 있는 것은 법원 판례가 재판상 이혼에서 ‘혼인파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이혼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유책주의(有責主義)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 법원은 혼인이 사실상 파탄상태에 이른 경우 누구의 책임인지를 안따지고 이혼을 허용해주는 서구의 파탄주의(破綻主義)를 아직 채택하지 않고 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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