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전당대회]재선출 이회창총재 문답

  • 입력 2000년 5월 31일 19시 48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총재경선 결과 발표 후 기자회견을 갖고 “당 운영과정에서 비주류에 대한 차별이나 불균형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총재와의 일문일답.

―오늘 득표에 만족하나.

“대의원 동지들이 적절하게 지지해줬다. 앞으로 당 운영을 잘 하라는 격려의 의미가 포함된 것 같다.”

―경선과정에서 불공정 논란이 일었는데….

“비주류인사 문제가 경선과정에서 유별나게 표출된 것일 뿐이다. 한정된 당직에 참여하지 못한다 해서 비주류가 차별받거나 소외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총재경선에서 낙선한 후보들을 지명직 부총재에 임명할 계획은….

“본인 의사가 중요하다. 여러가지 화합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대여관계에서 달라지는 것이 있나.

“여야 영수회담에서 상호대화와 협력을 한다는 데 합의했고 우리 당은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여당은 공조복원을 계기로 5일 국회 개원 후 ‘수의 힘’으로 정치를 풀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일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아무 조건 없이 정상회담을 개최한다고 정부는 말하고 있으나 회담준비나 합의과정 등을 보면 북측 의도에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윤영찬기자>yyc11@donga.com

▼李會昌의 과거와 미래▼

한나라당 총재로 재선출된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정치활동 기간으로만 보면 아직도 초년병이라 할 만하다. 15대 총선을 앞둔 96년초 신한국당 선대위의장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만큼 정치 경력은 불과 4년여 남짓할 뿐이다.

이총재는 그러나 짧은 기간에 누구 못지 않게 다양한 정치 역정을 겪었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빠른 ‘학습능력’을 보였다. ‘97년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승리, 97년12월 대통령선거 패배, 98년8월 총재 복귀, 2000년 5월 총재 재당선’의 역정이 말해주듯 지난 4년여 동안 그는 영광과 좌절을 함께 맛보았다.

이총재는 대선 패배로 정권을 야당에 내준 뒤 불과 2년여만에 책임공방에서 벗어나는 저력을 보였다. 특히 ‘4·13’총선에서는 김윤환(金潤煥) 이기택(李基澤)씨 등 당내 경쟁 계파 보스들을 내쫓고도 여당에 18석이나 앞서는 승리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민국당 바람’을 제압함으로써 자신의 숙제이기도 했던 ‘YS의 그림자’를 떨쳐낸 것도 큰 수확.

이 모든 것이 ‘총풍(銃風)’ ‘세풍(稅風)’ 등 정치 생명이 걸린 위기의 파고(波高)를 타넘은 결과라는 점에서는 ‘3김(金)’에 버금갈 만한 생명력이라 할 만하다.

이총재는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과의 조우가 없었다면 법관의 길을 계속 갔을지도 모른다. 93년초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으로 기용됐고 이어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긴 뒤 김전대통령과의 마찰 끝에 총리직 사표를 낸 것이 정치인으로서 대중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런 단기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포용력과 리더십 부족’ ‘3김의 아류(亞流)’라는 등의 비판과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는 도덕성 시비는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는 지적이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특히 그의 정치적 성취가 상당부분 검증된 정치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반(反)DJ정서’에 힘입은 것이라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그는 새천년 벽두에 ‘상생(相生)의 정치’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정쟁(政爭)에 지쳐 있는 국민에게 신선감을 주었다. 이제 ‘상생의 정치’를 어떻게 펴나가느냐가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서 그에게 핵심과제가 되고 있다.

<송인수기자>i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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