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일이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다. 대선 후보들이 TV토론이니 지역방문이니 하면서 온갖 언설로 국민들을 꾀는 장면에서 하수도 오물 뿜어 나오듯 또 터졌다. 김대중(金大中)후보가 6백억원이 넘는 검은 돈을 감추어뒀다고 한다.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수사기관의 수사를 촉구하며 폭탄선언하듯 터뜨린 말이다. 김후보측은 정치음해라고 공격하며 이회창(李會昌)후보의 경선자금 의혹과 YS대선자금도 밝히자고 맞받아쳤다. 검찰은밤새이 사건을 수사할 것인지를 두고 구수회의를 했다.
어찌될 것인가. 속고 속은 국민들은 안다. 공격하는 측이나 맞받아치는 측이나 모두 더러운 돈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나라 검찰이 정의의 칼을 휘두르는 기관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정치판에 나와 깨끗하고 정직하다는 사람치고 어느 한 사람 거짓말하지 않은 이가 없다. 후보들마다 온갖 표정지으며 정책이 어떻고 정견이 어떻고 하지만 정치꾼들이 득실거리는 정치판에 원리와 원칙이 사라진지는 오래다. 그저 치고 빠지고 뒤통수때리고 다리거는 것을 정치라고 생각하는 판에 비전과 책임감을 가진 참신한 지도자를 기대하는 것이 무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 「검은 돈」 政爭 언제까지 ▼
이번에도 문제는 역시 돈이다. 엄청난 금액의 돈이다. 정치판의 검은 돈 때문에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갇혀 있고, 현직 대통령의 아들도 갇혀 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깨끗한 정치는 국민의 여망이지만 정치꾼들이 이 말을 앞장서 쓰는 통에 말까지 더러워졌다. 정치와 돈과 부패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다.
정말 정치판의 돈과 부패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망국적 부패에 대한 국민의 각성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필요한 제도도 마련하여야 한다. 어떤 제도를 만들 것인지는 답이 나와 있다. 부패방지 돈세탁방지에 관한 입법을 하고, 정치자금제도에서 지정기탁금제도와 회사 단체의 정치자금기부를 폐지하고 돈이 오고가는 과정을 투명하게 하며 더러운 돈을 주고 받은 자를 처벌하면 된다. 현재 국회 정치특위는 이런 문제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꿈에도 지정기탁금제를 폐지할 생각이 없고 야당은 선관위를 통해 돈을 기부하게 하자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 더러운 돈 주고 받는 자를 처벌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모두들 보이지 않는데서 검은 돈을 받겠다는 것에는 한마음 한뜻이다.
▼ 국민 우습게 보지 말라 ▼
이번 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충격적이다. 금액의 액수도 놀랍거니와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사자는 더이상 대선의 후보로 나서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고 폭로한 측이 국민을 속이고 우롱한 것이라면 그 역시 대통령직을 넘보아서는 안된다. 이번 사건이 정치적 제스처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다. 이번 사건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지 못하면 이제는 사생결단으로 서로 상대를 헐뜯고 중상모략하며 추악함이 가득찬 폭로전으로 치달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같은 이런 상황에서는 지역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국민을 선동하려 할 것이고 사상논쟁과 빨갱이의 망령이 또 온 나라를 휩쓸 것이다. 판이 이렇게 되면 정책의 대결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온 나라가 편을 갈라 싸우게 되고 죄없는 국민들만 또 이리저리 찢겨 회복할 수 없는 상처만 안게 된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래서 이번 사건은 분명히 밝혀져야 하고 그에 따라 당사자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은 더이상 정치판의 싸움에 휘둘릴 수도 없고 그들의 싸움에 덩달아 놀아나는 사람들도 아니다. 국민을 우습게 보지 말기 바란다.
정종섭 (건국대 교수·법학·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