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사태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경제적 손실만 30억달러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지만 피해를 돈으로만 따질 수 있겠는가. 문민정부가 하루 아침에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가버렸다는 국제여론의 조소 하나만으로도 참으로 비싼 대가를 치렀다.
일이 한번 어긋나면 처리과정도 꼬이는 법일까. 사태 수습과정에서 청와대와 워싱턴의 주미한국대사관이 최근 보인 행태는 민망하기 그지없다. 망신은 한번으로 족할텐데 연거푸 에러다.
미국 국무부는 23일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국회에서 재론키로 한데 대해 「고무적」이라는 비공식 논평을 냈다. 논평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용어로는 대(對)언론 설명문(Press Guidance)이다. 기자들이 물어보는 경우에 한해서만 미국정부의 입장을 읽어줄 뿐이다. 물어보지 않으면 그걸로 휴지가 되어버린다.
불행하게도 이날 워싱턴의 한국특파원들은 누구도 여야 영수회담과 김대통령의 재론 결정에 대해서 국무부의 입장을 물어보지 않았다. 다행히 사태가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됐으므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무부가 준비해둔 언론 설명문도 그냥 묻히게 돼 있었다. 실은 보도할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었지만.
그런데도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은 이런 설명문이 있다는 것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설명문을 구해 친절하게도 각 특파원들에게 일일이 팩시밀리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한술 더떴다. 한 밤중에 일부 특파원들의 집으로 비싼 국제전화를 해 『국무부에 무슨 좋은 논평이 있다는데 왜 보도를 안하느냐』고 귀띔까지 해주었다. 관례에도 없는 친절이고 배려였다.
물론 청와대나 대사관으로서는 金대통령의 재론 결정에 대해 미정부가 오랜만에 「고무적이다」는 긍정적인 논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작 특파원들이 질문을 안해주니까 속이 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국무부의 「고무적이다」는 논평 한마디가 그렇게도 간절했던 것일까. 망신은 한번으로 족한 것 아닌가.
李 載 昊<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