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40여 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배우다. 말하고 웃을 때 시원시원하게 표현하는 동작과 표정을 보며 배우는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법률 전문가였지만 대학로에선 친한 연극인들과 인사 주고받느라 몇 m 걷기도 힘들 정도였어요.”
불긋한 단풍나무가 우거진 서울시립미술관 앞 광장에서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57)를 만났다. 가르마를 타 정갈하게 빗어 넘긴 흰 머리가 돋보였다. 그의 직업은 교수이며 배우다. 교수가 되기 전에는 변호사이자 배우였다. 어떤 직함으로 불러야 할지 물으니 “배우사(배우+변호사)로 부르라”며 웃었다.
그는 지난달 ‘배우사’로 살며 바라본 세상을 엮은 책 ‘어느 여행자의 독백’을 출간했다. 독특한 이력답게 법정영화와 음악, 로스쿨 등 다양한 소재를 엮은 책이다. “내 인생이 꼭 여행길 같아 ‘여행자의 독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말하는 그의 인생 여행기가 궁금했다.
홍 교수는 지난해 개봉한 ‘연평해전’을 비롯해 ‘상의원’ ‘늑대소년’ ‘하류인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영화에서 열연했다. 대부분 작은 배역이었지만 그는 40여 년의 연기 경력을 가진 베테랑 배우다. 무대에 처음 오른 건 대구 계성초교를 다니던 6학년 때. 대구 MBC의 전신인 영남TV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출연자로 출연하면서부터다.
“연출자가 이창동 감독의 친형인 이필동 선생이었어요. 다른 대구 애들과 달리 제가 사투리를 거의 안 썼거든요. 그래서 발탁됐나 봐요. 당시엔 지역방송 연출가들이 연극도 함께 할 때라 중학생 때까지 연극 무대에도 많이 올랐죠.”
TV와 연극 무대에 자주 오르며 그는 대구의 ‘유명인’이 됐다. 거리를 다니면 사람들이 “공부를 잘하는데 연기도 하는 애”라며 알아봤다. 무대에 서는 게 즐거웠다.
“지방에서 연극하는 사람들을 보니 생활이 너무 궁핍하더라고요. 다음 날 연탄 걱정을 하고 자장면 하나 시키면 다른 동료가 먹고 싶어할까봐 연습실 구석에서 벽만 보고 후루룩 비우고. 다른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홍 교수는 변호사를 꿈꾸며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그는 어릴 적 겪었던 무대의 짜릿함을 떠올렸다. 마침 이석기 감독의 영화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배우 모집 공고가 눈에 띄었다. 그 영화에 출연하진 못했지만 오디션을 계기로 이 감독의 후속작인 ‘아주 특별한 변신’(1994년)에 캐스팅됐다. 연기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그 후 2, 3년에 한 편씩 영화랑 연극에 출연했어요. 2003년엔 연극 ‘아트’에서 90분 동안 대사를 하는 역을 맡기도 했습니다. 변호사를 할 때라 새벽 3시까지 연습하고 2시간 자고 다시 사무실로 출근할 때도 피곤한 줄 몰랐죠.”
‘연기가 왜 좋은지’ 물었더니 “어릴 때부터 계속 하던 거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 같다”고 답했다. 연극인들이 다른 예술인들에게 그를 소개하며 ‘우리 쪽 사람’이라고 부를 때 가장 기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배역을 맡지 않을 때 연극협회 등에서 법률 자문을 한다. 변호사 시절부터 지식재산권을 파고들어 법률 지식과 소송 경험을 쌓았던 그는 “로스쿨 학생이나 후배 변호사에게는 전공 영역을 확실히 개척한 법률가로 비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큰 배역을 맡으면 좋겠다는 기대도 하지만 단역을 맡아도 억울하진 않습니다. 연기는 인생의 윤활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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