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상대와 얼굴 붉히지 않고 버튼 하나로 판결문 받는 세상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7일 22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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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가지 않고도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해 버튼 하나로 판사로부터 결정문을 받을 수 있다면? 이혼 상대방과 대면해 얼굴을 붉히지 않고도 모바일 메신저 대화로 상황을 조정하고 법률 용어를 몰라도 복잡한 건물 임대차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떨까?

"분쟁을 겪는 평범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하고, 소송으로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분쟁 해결 온라인 플랫폼 '레크트바이저(Rechtwijzer)'를 개발한 진호 베르돈스코트(Jin Ho Verdonschot) 네덜란드 헤이그연구소 사법기술 설계국장(39)이 입을 열었다. 대법원이 18일 주최하는 '4차 산업혁명의 도전과 응전: 사법의 미래' 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한 그는 이용자들이 좀 더 손쉽게 사법절차에 접근할 수 있도록 고민하다 플랫폼을 고안했다고 설명했다.

네덜란드어로 '이정표(signpost)'와 '정의(justice)' 두 단어를 합성해 탄생한 레크트바이저는 이용자가 플랫폼에 접속해 개인정보를 입력하고 상대방과 대화를 통해 분쟁해결에 필요한 내용을 정하면 법률전문가의 검토는 물론 법적구속력이 있는 결정과 판결까지 받을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이혼 한건을 해결하는 데 1000유로(약 125만 원) 미만이 들고 3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1년 전 개발된 레크트바이저는 네덜란드 외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와 영국에도 진출해 있다. 현재까지 플랫폼을 통해 이혼한 커플이 600쌍에 달하며 3000명이 이혼소송을 진행 중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살 때 네덜란드로 입양된 그는 사법제도의 장벽을 마주한 경험을 밝혔다. 20살에 창업을 시도했다가 복잡한 절차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 방글라데시, 말리 등 개발도상국에서 현지인들과 일하면서 복잡한 사법절차로 절망하는 사례들을 목격했던 기억들이 지금의 레크트바이저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사법제도는 변화에 무딥니다. 너무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죠." 베르돈스코트 국장은 "법이 판사나 변호사들을 위해 설계돼 있고, 일반 시민들에게 최적화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술이 이러한 장벽들을 해소하는 핵심이라고 봤다. 케냐에 갔을 때 계층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공과금 납부부터 농업 정보까지 얻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은 것. 베르돈스코트 국장은 "사법 절차에 IT기술이 접목되면 사람들의 사법 경험이 늘어나고 투명성 제고에도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1분 만에 이혼을 결정해주는 사법 절차가 아니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소통의 기반을 제공해주는 겁니다." 자칫 손쉬운 이용방법 때문에 레크트바이저로 인해 이혼율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에 베르돈스코트 국장은 "단시간 내에 이혼사건을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가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은 충분히 들이되 분쟁을 원만하고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줄 뿐이라는 이야기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법조계의 반발은 없을까. 그는 "자동화가 일자리 상실을 야기한다는 명제는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인공지능이 판사와 변호사를 전부 대체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다. "택시 예약 앱이 생겼다고 해서 택시 기사들이 사라졌나? 인공지능이 언젠가는 간단한 판결이나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판사들은 판결을 내리는 기계가 아니라 더 많은 영역을 판단한다. 기술이 모든 일자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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