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5월 30일 17시 51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원경(圓鏡·63). 환갑을 넘긴 연배에도 장대한 기골에 여유로운 풍모, 산사의 스스럼없는 대화 속에 슬쩍슬쩍 스치는 우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박헌영의 인간적 면모와 자신의 스산했던 지난날을 얘기하는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지난달 ‘이정 박헌영 일대기’(역사비평사)를 출간한 데 이어 7월 9권짜리 전집까지 펴낼 예정이니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으로서 심정이 간단할 리 없었다.
○영화 ‘박헌영’도 제작 준비중
“그저 부처님께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 품이 아니었으면 이 한 몸 어디 휩싸였을지 알 수 없는데 이렇게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으니…. 그러나 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습니까. 이쪽에선 ‘골수 공산주의자’요, 저쪽에선 ‘미제의 간첩’에 ‘종파분자’라니….”
그로선 이 ‘일대기’와 ‘전집’이 1983년부터 자료와 사람을 모으고 자금을 염출하는 등 동분서주해 온 결과물이니 ‘20년 공사’에 해당한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부친의 제삿날(7월 19일)까지 찾았으니 ‘후련하다’거나 ‘이제는 선친에게서 해방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전집의 편집을 끝낸 뒤 발굴한 자료가 벌써 책 한 권 분량이 넘어요. 1933년 상하이에서의 체포에 대한 코민테른 보고서, 1956년 김일성 방소 때 스탈린과의 ‘박헌영 망명’ 합의 기록 등 자료가 다시 쌓이고 있습니다. 증보판을 내야지요.”
원경 스님의 어조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처님께 죄송하다’던 조금 전의 겸사(謙辭)도 잊은 듯했다.
그가 이미 진행 중인 후속 작업만도 상당하다. 10월엔 ‘박헌영과 그 시대’라는 심포지엄이 열리고, 그 무렵 한 계간지에 ‘박헌영 평전’(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이 연재되기 시작하며, 영화 ‘박헌영’ 제작을 위해 현재 시나리오 작업(소설가 송기원)도 진행 중이라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발굴 코민테른 문서철에서 부친의 ‘결정적인 족적’을 찾아내는 등 안정적인 연구를 위해 부친의 호를 딴 ‘이정 기념사업회’ 설립 작업을 하느라 여간 바쁜 게 아니다.
○“이현상이 ‘가짜 김일성론’ 폈다”
여기서 원경 스님은 부친의 호 ‘이정(而丁)’이 ‘써레와 망치’ 모양으로서 농민과 노동자를 뜻하는 동시에 스스로 ‘이 놈’이라고 호칭하던 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내용은 일제강점기 말 경성콤그룹 시절 이래 부친의 동지이자 1968년까지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하다 홀연히 사라진 한산(寒山) 스님에게서 들은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한산 스님이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자료를 찾아 묶어 놓으라며 해 준 얘기들 중엔 아직도 실증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요.”
원경 스님이 “아직 실증되지 않았으나 사실임이 분명하다”며 소개하는 얘기 몇 토막.
“이현상이 군사훈련을 위해 1947년 소련으로 떠나기 전 평양의 회식 자리에서 ‘가짜 김일성’론을 폈다는 거예요. 그의 항일무장투쟁 전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고 최소한 보천보사건(1937년)의 김일성만은 당시 북의 김일성이 아니라는 얘기였어요. 선친이 나서서 무마하고 함구령을 내린 뒤 이현상을 지리산으로 들여보냈다더군요.”
“꼭 찾아야 할 자료가 1945년과 47년 두 차례 선친이 스탈린에게 직접 보냈다는 ‘정책입안보고서’입니다. 패전국 일본을 미국 소련이 ‘독일 방식’으로 분할하지 않으면 결국 문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지요. 동북아 정세를 보는 선친의 시각이 담긴 주요 문건입니다.”
○“책 낸다고 그분 설땅 있겠어요?”
원경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런 식으로 해방 전후의 좌익운동사에 관한 한 ‘무불통지(無不通知)’다. 얼마나 사무쳤으면 그렇게 ‘통하였을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말이 정수리에 박힌다.
“제가 이렇게 하고 책 몇 권 낸다고 그분의 ‘설 땅’이 생기겠어요. 남북이 나뉘다 보니 각자 자기네 정치상황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아마 지금 승속(僧俗)을 넘나드는 원경 스님이야말로 장차 남북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넉넉한 통일의 날을 누구보다도 고대하는 인물일 듯했다.
평택=김창희기자 insight@donga.com
원경 스님은…
△1941년 박헌영(朴憲永)과 두 번째 부인 정순년(鄭順年) 사이의 아들로 청주에서 출생. 본명 박병삼(朴秉三).
△해방 때까지 경기도 과천에서 할머니 와 이순금(김삼룡의 부인)의 손에 양 육. 그 뒤 6·25 직전까지 큰아버지 와 서울 장충동에서 생활.
△1945년 8월∼1946년 9월 사이 여섯 차례 부자 상봉.
△1950년 3월 김삼룡, 이주하의 체포 뒤 한산 스님과 함께 과천, 구례, 동 해, 단양, 담양, 무주 등을 전전. 덕 유산에서 ‘이현상 부대’와 만나 1952년 말까지 지리산에서 ‘산사람’들과 2년 여 생활.
△그 뒤 다시 전국의 사찰을 전전하다 1960년 인천 용화사에서 송담(松潭) 스님을 은사로 출가. 여주 서래암, 안성 청룡사, 여주 신륵사 주지 역임.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중 심인물로 참여.
△1991년 모스크바에서 누나 박비비 안나 상봉
△1995년 이후 평택의 만기사 주지.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