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이라는 이름의 자기 검열[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 동아일보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겸손은 미덕입니다. 사회는 나를 내세우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나를 높이는 교만함을 경계합니다. 그러니 자신을 과대평가하기보다 차라리 과소평가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넘치는 자신감은 위험 신호입니다.

겸손의 미덕에 사로잡혀 시달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능히 해낼 수 있는 일 앞에서도 “저는 아직 부족해요”라며 물러섭니다. 들여다보면 막고 있는 것은 능력 부족이 아니라 스스로를 허락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글에서는 겸손이라는 오래된 통념을 한번 뒤집어 보려 합니다.

분석 시간에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못 해요.” 분석이 깊어질수록 진실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실은 할 수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하지 않으려 할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 자체가 막아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나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더 깊게 말하면,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결함이 있을 것을 무서워합니다. 부족해도 거듭하면 점점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기를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주저앉습니다. 시도하지 않았으니 실패는 아니라고 자위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함을 선택했음을 강조하지만, 시도하지 않은 것도 일종의 실패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얻은 성과조차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었어요”, “우연히 그렇게 됐어요”. 성취의 순간마다 이런 말들로 자신의 몫을 깎아내리기에 바쁩니다.

그 배후에는 멈추지 않는 내면의 비판자가 있습니다. “너는 절대 못 해”, “그건 너무 위험해”, “어차피 실패할 텐데 지금이라도 멈추는 게 안전해”. 이런 목소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옵니다. 우리는 늘 자신을 평가하고, 그 평가에 한 표씩 던집니다. 그렇게 쌓인 표의 합이 결국 ‘내가 생각하는 나’를 만듭니다. 내면의 비판자가 힘이 세면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속마음에 겹겹이 포개집니다.

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이를 따르는 무력감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분석가는 끝까지 분석적 거리를 잘 지키면서 느끼고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피분석자의 저항은 거칠고 셉니다. 자신이 지닌 잠재력과 가능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는 해석과 “저는 할 수 없어요”라는 믿음이 충돌하는 순간, 관계는 흔들립니다. 피분석자에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집채만 한 파도처럼 닥쳐옵니다. 기나긴 세월에 걸쳐 굳고 단단하게 쌓아 온 방어벽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은 공포에 떱니다. 그러니 맞서 방어하고 저항합니다.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자신감 결여, 두려움, 마비, 무력감, 결여된 자신감의 재확인으로 이어지는 거듭된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뿌리는 흔히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부모의 사랑이 조건부로 허용되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적어도 완벽하게 부모의 마음에 들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꼈습니다. 그 순간에도 너무 들뜨면 안 되고, 겸손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이런 성장 환경에서는 기준에 조금만 못 미쳐도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덫에 빠지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면 깊은 곳에 하나의 규칙처럼 남습니다.

자기 정체성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먹고 자랍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믿는 어린아이의 자신감처럼, 약간의 과대평가는 ‘성장 호르몬’이 되어 우리를 키웁니다. 너무 일찍 겸손을 강요당하면 자신감은 성장을 멈춥니다.

다른 이유로 내면의 비판자가 너무 힘이 세거나 융통성이 부족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본래는 나를 지키기 위한 목소리이나, 지나치면 오히려 우월 의식을 스스로 억누르고 자신이 지닌 현실적 능력을 객관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내 안이 아니라 밖에,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자신감 결여의 또 다른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나를 남과 비교하는 습관은 약이 아니라 독입니다.

겸손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겸손은 한계, 잠재력, 가능성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포기가 안전하다!”며 속삭이는 내면의 소리는 보호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가두는 말일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지금, 내면의 비판자를 무조건 따르면서 자신을 스스로 묶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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