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타인의 관심을 전혀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삶의 허무함을 넘어 존재가 흔들리는 고통입니다. 수많은 노래의 주제가 사랑을 넘어, 헤어진 사람에 대한 원망에 비중을 두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연결될 수만 있다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비난이나 분노의 대상이 되는 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면 나쁜 사람이라도 되어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리는 정신분석이라고 하는 오래 유지된 관계의 종결을 앞두고도 나타납니다. 분석이 끝나려고 하는 기간에 피분석자는 다양한 반응을 분석가에게 보입니다. 분석이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를 표하고 이제는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굳은 마음을 먹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지…”라고 말하며 분석의 쓸모 없음과 분석가의 능력 부족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난은 눈앞에 닥쳐오는 관계의 단절을 받아들이기 힘든 마음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비난을 통해서라도 분석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잊히지 않으려는 안타까운 시도입니다.
정신분석은 본질적으로 헤어짐을 전제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감히 드러낼 수 없는 개인사, 숨겨야 할 이야기도 솔직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간 매주 3회 이상 깊은 내면을 공유해 온 관계를 끝내는 일은 분석가와 피분석자 모두에게 복잡한 심리적 파동을 일으킵니다. 피분석자에게 종결은 ‘자신이 잊히는 것’을 의미하기에 성장 과정과 대인관계에서 주로 비난을 통해 관계를 유지해 온 사람이라면 그 방식을 되풀이합니다. 이때 분석가가 버럭 화를 내거나 따지면서 비난하는 식으로 맞대응하면 피분석자는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분석가의 부정적인 반응을 통해서라도 그 마음속에 각인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석가는 화를 내며 행동화하기보다는 피분석자가 잊히지 않으려고 얼마나 처절하게 애쓰고 있는지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감춰진 의미를 말로 풀어서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사회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관심보다는 나쁜 관심이라도 끌어내야 자신의 가치를 느끼는 사람은 상대에게 종속되어 피해를 보기 쉽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스톡홀름 증후군’입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인질극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범죄자들과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들을 도우려고 한 현상을 말합니다. 폭행을 당하면서도 가해자 곁을 떠나지 못하는 심리와 맥락을 같이합니다.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가 때때로 보여 주는 다정함이 성장 과정에서 결핍되었던 친밀감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쁜 관심’일지라도 그것이 단절이 아닌 연결의 형태를 띠고 있기에 자신의 의지로 끊어내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존감을 회복해야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구속력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긍정적인 관심을 받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이들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나 비난받을 짓을 해서라도 존재를 확인받으려고 온 힘을 다합니다. 고통을 통해서라도 세상과 연결되려는 애타는 몸부림입니다.
‘관계 사슬’에서 풀려나려면 우선 상대의 달콤한 말이 가리고 있는 비언어적 메시지를 잘 읽어야 합니다. 무의식은 말보다 몸짓, 표정, 자세,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상대가 내 시선을 피한다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냉담함으로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면 나를 굴종시키려는 의도가,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자주 끄덕인다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따분함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시계를 자주 보는 것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소망을, 몸을 뒤로 젖히는 것은 심리적 거리 두기를 의미합니다. 빤히 쳐다보며 짓는 미소조차 때로는 호감이 아닌 공격성을 품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분석이든 일상적 관계이든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힘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신호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상대와의 거리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작은 것이라도 관계를 스스로 관리한다면 자존감 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타인의 인정과 따뜻한 말에 매달리는 상황을 뒤집으면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 자신을 나의 안전하고 든든한 조력자로 만들어 낼 때 위험하고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가치를 내가 인정하는 연습을 어려워도 지속해서 ‘마음의 돼지 저금통’을 꾸준히 키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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