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아버지를 극복하고 세상의 빛이 되기까지를 그린 영화 ‘마이클’. 유니버설픽처스 제공
이승재 영화평론가·동아이지에듀 상무 [1] 마이클 잭슨이 어린 시절 가족 그룹 ‘잭슨파이브’로 출발해 아버지의 강압과 반대를 무릅쓰고 솔로로 우뚝 서기까지의 성장기를 담은 영화 ‘마이클’(13일 개봉)을 보고 놀랐어요. ‘트레이닝 데이’ ‘더 이퀄라이저’처럼 딱 떨어지는 액션물을 만들어온 앤트완 퓨콰 감독의 이 신작은 마이클 잭슨의 트라우마 극복기를 깊숙이 파고들지도 못했고, 그가 스스로를 피터팬에 투영하면서 영구한 자유를 꿈꿔 가는 과정, 그리고 그런 심리에서 파생되는 아이와 순수와 반려동물에 대한 도착에 가까운 집착을 무척 식상하게 그려내니까요.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건,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 먹어 눈물을 질질 흘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어떤 영화는 때론 그저 보는 자체로 행복해요. 영화가 개떡처럼 설명해도 관객이 찰떡처럼 알아듣는 놀라운 순간을 경험하죠. “우리가 이해하는 것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다”라는 레프 톨스토이의 말이 떠올라요.
마이클의 아버지는 어린 마이클과 형들을 “너희는 인디애나주의 가난한 흑인일 뿐이야. 내가 물려줄 것도 없으니 쟁취해야 해. 승자가 아니면 패자일 뿐. 아버지처럼 평생 제철소에서 일하다 죽을 거냐”면서 자식들을 가수로 만들기 위해 학대에 가깝게 조련해요. 보컬 실력이 탁월한 막내 마이클에겐 더더욱 가혹하죠. 툭하면 바지 혁대를 풀어 채찍질하듯 때립니다.
[2] 부모의 광기는 자식을 소유물로 확신하면서 핵분열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근원적으론, 힘들여 키운 내 것(아들)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홀딱 빠져 그녀와 섹스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기 싫어서일지 몰라요. 히치콕 영화 속 뒤틀린 성적 욕망에다 계급갈등이란 리얼리티를 변수로 넣어 프랑스적으로 해석해내는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닭초절임’(1985년)이 이런 미친 엄마를 다루고 있죠.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년)가 퍼뜩 떠오르는 이 영화엔 휠체어 생활을 하는 어머니 ‘퀴노’ 부인과 외아들 ‘루이’가 나와요. 젊은 여자와 바람난 남편과 피 튀기게 다투다가 남편이 계단에서 밀어버리는 바람에 퀴노 부인은 하반신 마비가 되었죠. 부인은 아들 루이를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남편의 대체재로 삼으면서 집착해요. 아들이 딴 여자에게 관심을 두려고 할 때마다 “넌 암캐에게 넘어가는 거야”라며 신경증적인 반응을 보이죠. 아들이 다른 여성과 섹스하는 순간은, 아들이 엄마라는 유일해야 하는 여자를 버리고 남성으로 독립하는 진저리칠 만큼 두려운 순간이니까요. 우편집배원으로 일하는 아들이 가져온 이웃의 서신들을 아들과 함께 훔쳐보는 행동을 통해 어머니는 아들을 공범의식 속에 결박해 두려고까지 하죠. 하지만 루이는 우체국 동료 연상녀와의 성관계에 탐닉해요. 급기야 동정(童貞)에 대한 맹세 의식과도 같은 어머니와의 식사 자리를 거부한 채 루이는 연상녀를 만나기 위해 똥강아지처럼 집을 뛰쳐나가죠.
클라이맥스는 ‘마더’만큼이나 충격적이에요. 어머니는 자기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수십 년 살아온 집(변함없이 남편을 기다리는 자신)에다 불을 싸질러 버려요. 아들이 되돌아오도록 만들려고요. 잿더미로 변해 가는 집으로 황급히 돌아온 아들이 발견한 것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 휠체어에서 일어나 멀쩡히 걸어 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어요. 아들을 곁에 묶어두기 위해 걷지 못하는 척 지금껏 꾸며 왔던 거죠. 소∼름!
[3] 도착과 사랑은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둘 다 일종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니까요. 소설을 영화로 옮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초기작 ‘롤리타’(1962년)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파격이에요. 어린 여성 롤리타의 각질 하나 없는 야들야들한 왼발이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되고, 중년 남성이 롤리타의 발톱 하나하나에 매니큐어를 칠하며 발가락 사이사이에 솜을 끼워넣지요. 성적 기호인 여성의 발가락을 자신이 의지대로 색칠하는 나이든 남자를 통해 어린 여성을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롤리타 콤플렉스의 본질을 드러내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이 절묘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치켜 내민 여성의 발이 어디까지나 남성의 머리 위에 위치한다는 점이죠. 남자는 여자를 지배한다고 확신하지만, 심리적으론 이미 그녀의 노예이자 숭배자로 전락했음을 나타내죠.
[4] 영화 ‘마이클’에서 아버지가 마이클을 때리는 이유는 아들의 몸에 착착 감기는 가죽벨트의 손맛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아버진 ‘내가 한 모든 일은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자기최면을 걸지만, 사실은 누가 너의 주인인지를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죠. 마이클은 지배자 아버지를 벗어나 피터팬 같은 자유를 꿈꿔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한 건 ‘성공한 흑인’이 되는 일이었지만, 마이클이 되길 원한 건 인류를 비추는 발광체였으니까요. 마이클은 노트에 이런 문구를 눌러쓰며 다짐해요.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유롭게 창작하라.’ 자식에 대한 열등감을 이겨내는 것도 부모의 훌륭한 사랑 아닐까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