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동네, 눈 같은 낭만 [고수리의 관계의 재발견]

  • 동아일보

고수리 에세이스트
고수리 에세이스트
오래된 동네에 살고 있다. 얽히고설킨 전깃줄마다 한낮에는 새들이, 한밤에는 노란 달이 온음표처럼 내걸리는 동네. 나이 든 주택가를 지키는 목련나무와 장미나무, 모과나무와 감나무가 계절마다 울긋불긋해지고 발그레한 홍시가 툭툭 떨어진 자리에 어느새 소복이 눈이 쌓였다. 동네에는 골목길에 쌓인 눈을 치우러 나왔다가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어 세워 두는 이웃들이 산다. 담과 담 사이 응달마다 정령처럼 귀여운 눈사람들이 숨어 있는 동네에서 열두 번째 겨울을 나고 있다.

나는 날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맞은편 벽돌색 빌라 아래로 그늘진 담벼락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두 아이가 어렸을 땐, 매일 그 담벼락에 유치원 버스가 정차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담벼락을 내려다보며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침에만 반짝 볕이 들었다가 빌라 그늘에 가려 뒤늦게 눈이 사라지는 추운 자리. 그러나 ‘잘 다녀와’ ‘잘 다녀왔어’ 매일의 인사와 포옹을 나누었기에 따스했던 자리. 담벼락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애틋한 마음이 스몄다. 버스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눈밭에 총총 남기던 발자국처럼, 함께 보낸 시간의 흔적이 그려지기에.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침이었다. 습관처럼 창밖을 보았다가 메시지를 발견했다. ‘MERRY CHRISTMAS!’ 눈 쌓인 담벼락 낮은 처마에 누군가 적어 둔 손글씨였다. 그날 이후로, 눈이 내리면 담벼락에 메시지가 남았다. 새해에는 ‘HAPPY NEW YEAR!’. 어떤 날에는 ‘LOVE’, 또 어떤 날에는 크고 작은 손바닥들을 나란히 찍어 두거나, 양손바닥을 겹쳐 찍어서 손바닥 하트를 남겨 두거나. 눈이 내리면 누군가 산타처럼 몰래 메시지를 남겼고, 그걸 발견한 우리는 조용히 기뻐했다.

누굴까. 금방 사라질 걸 알면서도 차가운 눈 위에 손글씨를 남겨 두는 사람은. 아이들 키보다 높은 처마이기에 동네에 사는 어른이 남겨 둔 걸까 짐작해 볼 뿐이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간 한글로 남겨둔 메시지는 없었다. 그러니 꼭 한국이 국적인 이웃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동네에는 다문화 가족도 많이 사니까.

수수께끼 같은 세 번의 겨울이 지나가고 메시지는 사라졌다. 기억하는 마지막 메시지는 한자로 쓴 단어 ‘浪漫’(낭만)이었다. “낭만. 그러게, 낭만이다.” 중얼거리는 나에게 아이들이 물었다. 낭만이 뭐냐고. 어째선지 나도 낭만적인 대답을 해주고 싶었다. “잠깐 반짝였다가 사라진대도 오래오래 기억될 예쁨.” 그러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낭만은 눈 같은 거네”라면서.

얼마 전, 우리 동네에 눈이 내렸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담벼락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불러 창밖을 내다보았다. 언젠가 모든 건 사라지고 말 테지만 좋은 기억들로 남기를 바라며 나는 담벼락에 웃는 얼굴을 그려 두었다. 사라지는 누군가는 좋은 것을 남기고, 기억하는 누군가는 좋은 것을 이어 간다. 추운 겨울날 오래된 동네에서 따뜻해지려던 우리의 모든 시도를, 그건 낭만이었노라고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천천히 눈이 녹아가던 며칠 동안 그늘진 담벼락에는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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