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국립중앙박물관에 간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은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이 자리한 경복궁 안에 있었다. 40년도 더 된 오래전 일이지만, 그 첫인상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특히 어두운 전시장 안에서 진지하게 유물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한 가지 의문점은 이때 본 유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함께 간 친구, 전시장 분위기, 주변의 관람객들만 뇌리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때 박물관이 지금도 자랑하는 국보급 유물을 분명 봤을 텐데, 왜 이런 위대한 작품들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최근 박물관 이론 하나를 접하면서 나름의 변명거리를 찾게 됐다.
‘MX(Museum Experience·박물관 경험) 이론’이 그것이다. 박물관의 무게중심을 유물에서 관람객의 다양한 경험으로 확장하자는 접근법이다. 이에 따르면 박물관은 더 이상 공부나 전시 감상만 하는 곳이 아니라, 관람객이 다양한 정서적·사회적 관계를 맺는 열린 장이다. 크게 보면 행동경제학이나 디자인계에서 주목하는 사용자 경험(UX·User Experience)을 박물관학에 응용한 이론이다.
유물 아니라 ‘경험’을 기억하다
MX 이론에 근거해 보면, 내가 처음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유물보다 관람객의 관람 태도나 전시장의 분위기에 더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아주 좋은 박물관 체험에 해당한다. 또 이런 느낌이 좋아 박물관을 다시 찾게 되는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의사결정일 수 있다.
무엇보다 MX 이론은 올 한 해 국내에 불고 있는 뜨거운 박물관 열기도 잘 설명해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8월 이미 2023년에 기록한 연간 최다 관람객 수(418만285명)를 넘어선 뒤 12월 11일 마침내 600만 명을 달성했다. 이 추세라면 연내 관람객 수는 6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케데헌’ 속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까치 호랑이 배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제공이렇게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 중에는 전시 관람뿐만 아니라 기념품 가게에 문화상품을 사러 오거나, ‘국중박 분장대회’ 같은 행사에 참석하거나, 식당이나 카페를 이용하기 위해 방문한 이도 많을 것이다. 특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한국 문화재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인상적으로 소개되면서, 영화 속 캐릭터와 연결된 문화상품을 사기 위한 ‘오픈런’ 현상까지 벌어졌다.
뮤즈의 대표 상품이 된 ‘힙한 피겨’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제공유물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문화상품을 사러 박물관에 온다니 주객이 전도된 듯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MX 이론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권장할 만한 바람직한 현상이다. 혼자 ‘뮤즈’(박물관 굿즈)를 사러 오기 심심해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오고, 이왕 박물관에 온 김에 전시장까지 둘러본다면 박물관을 새롭게 경험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박물관 경험을 만드는 것, 정서
2023년 뮤즈 정기공모에서 당선돼 출시된 ‘취객선비 변색 잔’.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제공사실 나는 박물관에 차나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상하게도 박물관 카페는 혼자 가도 감성적으로 좋고, 누구와 함께 가도 이야기가 잘 풀리는 공간이다. 그저 박물관이 주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MX 이론을 참고하면 이 점도 비교적 잘 설명된다.
사람들의 박물관 경험에서 정서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는 박물관학 연구가 있다. 이에 따르면 박물관은 학습이나 교육보다는 경외감, 공감, 향수, 호기심이 강하게 느껴지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박물관은 일상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고급스러운 정서가 흐르는 장소이기에, 그 안에 자리한 카페를 이용할 때 만족도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최근 유럽이나 북미의 대형 박물관을 보면 카페나 식당이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 일종의 사교 공간으로 고급화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시도는 박물관 재정에도 도움이 되지만, 나아가 박물관 경험을 한층 다채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최근 박물관학의 흐름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불붙는 국중박 유료화 논쟁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기증품 국외 순회전에 함께 공개된 ‘인왕제색도’ 활용 한지 조명.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제공올 한 해 국립중앙박물관은 관람객의 다양한 관심사가 총체적으로 모이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전국의 박물관도 전례 없는 국민적 관심을 누리고 있는 만큼, 2025년을 박물관 대중화의 원년으로 불러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런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 무료 입장을 폐지하고, 2027년부터 유료화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1월 2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유료화 시점과 방식은 여러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며 “내년 상반기 예약제 도입을 시작으로 유료화 준비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12월 9일에는 한국박물관협회 주최로 세미나가 열리는 등 유료화 도입을 위한 형식적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08년 5월 이후 17년간 무료 정책을 유지해 왔다. 관람객 수 600만 명이라는 외형적 성장은 무료 입장을 통한 ‘열린 박물관’ 정책이 큰 역할을 했다. 어렵게 형성한 붐을 더 지속시킬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에, 유료화와 예약제를 서둘러 도입하려는 이유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사용자(관람객) 부담 원칙’에 비춰 보면 유료화에도 일정한 논리는 있다. 적은 금액이라도 입장료를 받아 그 재원으로 전시 기획을 충실히 하고, 소장품을 확충하며, 직원 복지에 기여하자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현행 법체계에서는 국립박물관의 입장료 수입이 국고로 환수돼 박물관에 재투자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관련 법 개정을 주장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정부 거버넌스를 손보는 큰 사안이라 현실성이 낮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국립박물관의 법인화 전환이 거론된다. 입장료 논의에서 법인화까지 언급하는 것이 과도하게 들릴 수 있지만, 국립문화기관의 법인형 전환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다. 국립박물관이 법인으로 전환되면 경영과 재정을 보다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고, 입장료 수입을 박물관에 재투자할 길도 열린다. 관장의 임기 역시 일정 기간 보장돼 보다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다만 가장 큰 걸림돌은 구성원의 신분이 국가공무원에서 법인 소속으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내부 갈등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2009년부터 특수법인 전환을 시도했으나, 2018년 결국 백지화됐다. 유료화의 극단적 두 시나리오
정리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상설전 유료화는 두 가지 시나리오로 내다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실패 모델이다. 유료화 이후 관람객이 급감해 입장료 수입마저 미미한 경우다. 특히 입장료 수입이 발권과 예약 시스템 구축·운영 비용에 그친다면, 박물관을 향한 국민적 시선은 급격히 식을 수 있다. 이후 무료화로 되돌리거나 무료 관람권을 남발하는 상황도 예상되는데, 어느 쪽이든 모양새는 좋지 않다.
두 번째는 성공 모델이다. 관람객 수를 거의 유지한 채 입장료 수입이 크게 늘어나는 경우다. 실제로 토론회에서는 관람료를 5000∼1만 원으로 책정할 경우 연간 수익이 350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래가 마냥 밝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익을 박물관에 재투자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면서 법인화 논의가 다시 힘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0년간 겪은 소모적 과정이 반복될 수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두 시나리오를 제시한 이유는, 이미 시작된 유료화 논쟁이 끝내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늘날 박물관은 MX 이론이 말하듯 관람객의 다양한 눈높이를 포용하는 열린 공간이다. 박물관은 공부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경외감과 공감, 향수와 호기심을 만끽하는 고급스러운 정서의 장이다. 이런 박물관의 세계가 국민들에게 더 격의 없이, 더 편안하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관계자들의 지혜로운 선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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