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100프랑짜리 1000점 그려야 먹고살 텐데…” ‘무명’ 고흐의 한탄[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8일 23시 06분


고흐로 보는 화가의 밥벌이
천문학적 액수에 작품 거래되는… 반 고흐 무명 시절 ‘밥벌이’ 못해
동생이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 600통 편지로 ‘작업일지’ 알려
평생 비용 추정해 작업량 산출도… 사후 가치 급등해 투자자가 성공

빈센트 반 고흐 ‘꽃피는 아몬드 나무’(1890년). 사진 출처 반 고흐 미술관 홈페이지

《지금과 꼭 같은 계절, 2월에 빈센트 반 고흐는 꽃 그림 한 점을 그렸다. 그가 머물던 프랑스 남부에서 가장 먼저 피는 아몬드꽃이 잔뜩 들어간 그림이다. 잎 하나 없이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탐스럽게 맺힌 꽃망울들이 따사로운 봄기운을 전하는 듯하다.》


고흐는 평생 자신을 금전적으로 지원해 준 동생 테오 반 고흐가 아들을 낳자 이를 축복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같은 해 4월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 그림을 완성했다는 소식과 함께 물감과 붓 같은 재료를 사 보내 달라는 내용으로 구구절절 편지를 써 보냈다. 알려진 대로 고흐는 화가로서 돈을 전혀 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최소한의 생활비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고흐는 화가로 활동하는 10년간 동생 테오로부터 총 1만7500프랑을 지원받았다. 당시 프랑스 하급 노동자의 일당이 10프랑이었고, 빈곤층의 연 소득이 대략 1200프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프랑의 가치는 오늘날 우리에게 1만 원 정도로 환산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우리 돈으로 매달 약 150만 원씩 10년간 지원받으면서 이 돈을 쪼개 월세와 식비를 내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한 셈이다.

당시 테오는 파리에서 성공한 아트딜러로서 억대 연봉자로 알려졌지만 형에게 돈을 매달 보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지원을 꾸준히 이어갔던 것은 끈끈한 형제애와 함께 화가로서의 형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고흐도 ‘더치페이’의 국가 네덜란드 출신답게 그간 자신이 진 빚의 총량을 잘 계산해 놨다. 1888년 10월 24일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평생 1000점의 작품을 그려 작품당 100프랑에 팔면 10만 프랑을 벌게 된다고 적는다. 이렇게 되면 한 인간으로서 경제적 대차대조표를 맞출 수 있는데, 화가로는 그게 쉽지 않으니 고통스럽다고 썼다.

“돈 문제와 관련해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50년을 살면서 1년에 2000프랑을 쓴 사람이라면 평생 10만 프랑을 쓴 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10만 프랑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화가로서 평생 100프랑짜리 1000점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오늘날 고흐의 작품은 천문학적 액수에 거래되고 있지만 당시 고흐는 자신의 그림의 가치를 100프랑, 대략 100만 원 정도로 생각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경제적으로 자기 밥벌이를 하려면 1000점을 그린 뒤 그것을 모두 팔아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고흐는 동생으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대신 작업이 마무리될 때마다 완성작을 파리에 있는 동생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렇게 해서 그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600통에 달한다. 어떻게 보면 이 편지는 동생에게 보내는 일종의 작업일지였다. 실제로 편지엔 자신이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는 글과 함께,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내용이 강조돼 적혀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붉은 포도밭’(1888년). 사진 출처 푸시킨 박물관 홈페이지
동생 테오는 형의 작품을 팔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당시엔 무명작가였던 고흐의 작품을 선뜻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고흐가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판매한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다.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의 현대 작가전’에 출품된 작품으로, 이 전시를 기획했던 외젠 보흐의 누이 아나 보흐가 400프랑이라는 꽤 큰 금액으로 구매했다.

그토록 작품이 팔리기를 원했던 고흐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그는 이때 이미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 작품이 팔린 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는 자살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흐의 비극적인 삶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작품을 구입한 아나 보흐의 투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1907년에 이 작품을 1만 프랑에 파리의 한 갤러리에 판매했다. 고흐의 작품을 17년간 소장하여 25배의 수익을 남긴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투자의 승자는 이 작품을 매입한 갤러리다. 이 갤러리는 1910년 러시아의 사업가 이반 모로조프에게 3만 프랑에 작품을 넘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혁명이 벌어진 이듬해인 1918년 국유화돼 현재는 푸시킨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아나 보흐가 이 작품을 되팔던 1907년 무렵에는 고흐의 명성이 알려지며 그에 대한 신화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바로 이때 독일계 네덜란드 기업가 집안의 헬레네 뮐러와 안톤 크뢸러 부부도 고흐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 부부는 평생 고흐의 작품을 90점 가까이 수집한 뒤 이를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한다. 이렇게 해서 크뢸러―뮐러 미술관이 만들어졌는데, 이 미술관이 소장한 고흐의 작품 가운데 39점이 현재 한국에 와 있다.

고흐는 남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대충 그렸다고 평가할 때면 ‘그건 사람들이 작품을 대충 봤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성공에 목마른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을 한껏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이 전시를 적극 추천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빈센트 반 고흐#아를의 붉은 포도밭#꽃피는 아몬드 나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