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향하는 사람들[내가 만난 명문장/김준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19일 22시 57분


“당사자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온화한 중재자인 척할 수 없고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 관찰자일 수 없다. 당사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무언가를 걸게 만드는 것.”

―이장욱 ‘영혼의 물질적인 밤’ 중


김준현 소설가·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김준현 소설가·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끔 ‘몇만 명이 죽었다’ 같은 단문 앞에서 아연해질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낱개의 수로 셀 수 있다는 게 무서울 때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무한에 가까운 우주가 문장으로 다뤄질 때 얼마나 쉽고 가벼워지는지 몸서리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한때는 읽고 쓰는 일을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비정한 세계와 대면하는 일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페이지를 사락사락 가볍게 넘기며 소설 속 인물이 겪는 삶의 희로애락을 관람하는 일이라고. 울고 전율하고 심호흡을 하더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죽음을 지근거리에 둔 이의 마음에 빙의해 시를 쓰고 나서도 언제든 안온한 나의 책상으로 빠져나오면 그만이라고.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내게 정말로 일어났을 때도 그러할까.

근래 남의 일의 아니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한파 속에서 아기 띠를 동여매고 광장으로 나서 구호를 외치는 것도, 작년 연말 공항에서 일어난 마음 아픈 참사로 전국 스무 곳 넘게 설치된 분향소에 시민들이 바쁜 일 제쳐두고 발걸음하는 것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순간 앞에서 침묵을 이겨내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쓰는 데 진심인 사람은 남과 나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든 허물어보려는 마음에 기댄다. 그 마음에 감응하면서 읽는 사람들이 있다. 읽고 쓰는 사람에게 한 글자 한 글자는 한 걸음 한 걸음이다. 삶과 문학의 경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영혼이 물성으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의 무언가를 걸게 만드는 일이다.

#이장욱#영혼의 물질적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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