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역전세대책, ‘갭투자 면죄부’는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20일 23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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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대출 확대, 갭투자 떠받칠 수도
‘무위험 갭투자’ 도덕적 해이 막아야

박용 부국장
박용 부국장
맷 필립스 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는 2014년 미국 경제 계간지 ‘밀컨인스티튜트리뷰’에 ‘전세 따라잡기(Keeping up with Jeonse)’라는 제목으로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와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는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지 마라. 아파트를 빌리려면 평균적으로 30만 달러에 상당하는 돈(전세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가계부채가 많지만, 한국인들은 그들과 달리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리지 않는다. 집을 빌리기 위해 돈을 빌린다”고 꼬집었다. 지금 들어도 따끔한 충고다.

전세는 원래 은행 문턱이 높던 때 집주인이 부족한 자금을 세입자 보증금으로 충당하는 사적금융 형태로 출발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확대하고, 정부가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풀면서 세입자가 돈을 빌려 다시 집주인에게 빌려주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비정상적인 전세시장이 형성됐다.

정부가 푼 전세대출은 전세금을 밀어 올렸다. 전셋값이 올라 투자 비용이 줄면 ‘갭(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 투자’ 유인이 커진다. 집값이 다시 상승하고 전세금과 전세대출이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2020년 계약갱신요구권, 전월세상한제 등이 담긴 ‘임대차 3법’을 도입한 뒤 전세금이 단기 급등하며 2022년 7월 정점을 찍기 전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이렇게 불어난 전세보증금이 지난해 말 기준 1000조 원을 넘어선 걸로 추정된다.

문제는 돈을 빌리는 사람(세입자)과 이 돈을 가져다가 투자하는 사람(집주인)이 서로 달라 도덕적 해이와 정보 불균형에 따른 전세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2002년 신용카드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마다 집값과 전세금이 떨어지면 다음 세입자를 받아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나 집값이 전세금보다 더 떨어지는 ‘깡통전세’, 전세 사기 등이 반복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최근 역전세 문제를 연일 거론하는 건 오래된 한국 전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비상벨을 울리는 격이다.

정부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집주인들이 대출을 더 받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는 집주인들이 책임져야 할 전세금 상환을 정부가 대출로 지원해 주는 셈이다. 정부가 전세대출을 풀어 전세금을 밀어 올리고 갭투자에 일조하더니, 이제는 갭투자를 한 집주인의 위험까지 줄여줘 ‘무위험 갭투자’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미 집을 팔거나 다른 자산으로 모자란 보증금을 채워 돌려준 집주인과도 형평성에서 어긋난다. 자칫 보증금 상환 대출이 또 다른 갭투자의 종잣돈으로 쓰이거나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의 보증금 상환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세입자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금 상환 대출 한도를 늘려주더라도 먼저 집주인의 보증금 상환 능력을 엄격히 심사하고 지원 대상과 지원 기간을 제한해야 한다. 부동산 호황기에 전세금을 올려 받아 자본 수익과 소득 수익을 올리다가 집값이 떨어질 때 그 손실을 세입자와 사회에 전가하는 갭투자 집주인들에겐 응분의 대가도 요구해야 “전세 끼고 집 사도 문제없다”는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

근본적으로 돈을 빌려 집을 빌리는 형태의 비정상적 전세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 전세대출에도 대출 한도 규제를 적용하고 전세금 비율이 높은 주택은 전세대출을 제한해 전세대출을 이용한 ‘무위험 갭투자’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 전세대책을 주거 지원에서 부채 관리 관점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외신에 ‘역전세(Yeok-Jeonse)’라는 한국어가 자주 등장할 날도 머지않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한국#특유의 전세 제도#문제점#역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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