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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위기론마저 인플레, 국민만 불안하다6·1지방선거가 끝나자 새 정부 내에서 ‘경제 위기’ 경고가 쏟아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지금 집에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거 못 느끼느냐”며 “경제 위기를 비롯한 태풍 권역에 우리 마당이 들어와 있다”고 했다. 선거 승리에 도취될 때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나온 얘기라지만, 민생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경제 위기’를 입에 담을 일은 아니다. 관료들은 한술 더 뜬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복합위기가 시작됐다”며 위기를 기정사실화하더니 ‘경제 전쟁의 대장정’과 같은 정치적 수사까지 동원했다. 방기선 기재부 제1차관은 “위기와 재난이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는 ‘블랙 타이드(검은 파도)’ 시대”라고 거들었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마저 “미증유의 ‘퍼펙트 스톰’이 밀려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정도면 위기론마저 인플레다. ‘경제가 살얼음판’이라던 윤 대통령은 글로벌 경기침체나 고금리 문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대처할 방도가 없다” “근본 해법을 내기 어렵다”고 인정했다. 엄중한 위기 인식에 비해 맥이 탁 풀린다. 위기 징후를 경고하는 건 지도자들의 당연한 책무이지만 대책 없이 위기론만 남발하면 국민들은 동요하고 경제는 더 불안해진다. 과도한 위기감이 더 큰 위기를 부르는 ‘자기실현적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데 위기 앞에서 냉철한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부발 위기론’이 허망한 건 자기반성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상반기 물가상승률이 2%를 넘었는데도 하반기엔 안정될 것으로 낙관했다.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돈 풀기 정책도 멈추지 않았다. 고물가에 우크라이나 전쟁 탓을 하지만 대선 후보들은 올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도 수백조 원의 돈 풀기 공약을 거두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직전 6·25전쟁 이후 처음으로 ‘1월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했고,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 2차 추경을 단행했다. 이러고도 고물가가 잡히길 바라는 건 이율배반이다. 위기가 온다면서 막상 대비는 부실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국 경제는 가계부채와 가용 외환보유액 부족을 물고 늘어지는 외신 공격에 시달렸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당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대응을 지휘했다. 그런 수모를 겪고도 가계부채는 빠르게 늘어났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104.3%)은 국제금융협회 조사 대상 36개국 중 가장 높다. 4월 기준 예금은행 가계대출 잔액 중 77.3%가 금리 인상에 취약한 변동금리 대출이다. 빚내서 집 사게 만든 것도 모자라 금리 인상에 취약한 대출구조마저 방치해놓고 ‘위기 타령’을 한다. 위기 앞에서 남 탓하는 고질도 여전하다. 집값 급등과 고물가의 씨앗을 뿌린 더불어민주당은 “경제 앞에서만 작아지는 대통령”이라며 100일도 안 된 새 정부를 때린다. “국민은 숨이 넘어간다”는데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는 개점휴업이다. 잔칫상을 차려준 정부가 돌변해 ‘파티가 끝났다’며 방만한 공공부문 개혁을 외치고, ‘이자 장사’를 하는 은행을 때리고, 기름값을 크게 내리지 않는 정유회사를 압박한다. 민간에 책임을 전가하고 매품팔이를 찾는 건 위기마다 반복된 일이다. 23일 별세한 조순 전 부총리는 2016년 본보 인터뷰에서 “우리 정치는 책임을 안 지는 제도를 갖고 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고 한탄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면피성 위기 경고 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6-29 03:00
[오늘과 내일/박용]가스공사만 ‘횡재 흑자’, 공정한가위기에도 돈을 버는 기업은 있다. 한국가스공사는 올해 1분기(1∼3월) 9126억 원의 역대급 영업이익을 냈다. 한국전력이 7조7869억 원의 최악의 적자를 낸 것과 대조적이다. 증권사들은 가스공사에 대해 ‘사상 최대 실적이 보인다’ ‘내년까지 불어올 순풍’ 등의 자극적 제목을 단 매수 추천 보고서를 쏟아내며 목표 주가를 20% 넘게 올려놓았다. 가스공사 매출의 94%는 액화천연가스(LNG)를 수입해 도시가스용과 발전용으로 판매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익은 정부가 승인한 마진(적정투자보수)에 좌우된다. 공사가 기대 이상의 실적을 냈다면 좋은 일이지만 정부 도움으로 ‘횡재’를 얻은 게 아닌지도 따져봐야 한다. 가스공사는 지난해 12월 천연가스공급규정을 바꿨다. 겨울철 증가한 수요를 대느라 장기계약 대신 현물시장에서 비싸게 도입한 LNG 비용을 발전사들이 책임지게 한 것이다. 당시 ‘발전용 연료비가 올라 한전 경영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정부는 제동을 걸지 않았다. 발전업계에서는 가스공사의 일방적 조치에 “선수가 심판까지 보면서 골을 넣는 격이 될 것”이라며 반발했다. 오히려 정부가 스페인 포르투갈처럼 가스 가격 상한을 설정하고, 2008년 국제유가가 크게 올랐을 때처럼 가스공사가 연료비 인상을 일시 유보했다가 나중에 회수하는 식으로 고통 분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스공사의 이 결정은 선거를 앞두고 민감한 도시가스 요금 인상 압력을 덜면서 발전사들에 연료비를 전가하는 ‘신의 한수’가 됐다. 올해 1분기 가스공사의 발전용 LNG 판매 단가는 전년 대비 116.9% 상승했다. 도시가스용 단가 상승률(21.1%)의 5배가 넘는다. ‘탈석탄 정책’으로 LNG 발전 비중은 2017년 22.8%에서 지난해 29.2%로 높아졌다. 한전이 전력을 사올 때 내는 전력 도매요금도 올해 4월 전년 대비 164.7% 급등했다. 이런 데도 정부가 전기 소매요금은 묶어두다 보니 한전은 세계 전력회사 중 최악의 적자를 낼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한전의 적자가 불어나자 이제는 전기 도매요금에 상한을 두겠다고 예고했다. 이런 추세라면 한전은 올해 23조 원이 넘는 역대 최대 적자를, 가스공사는 역대 최대 흑자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가스공사는 경영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두둑한 성과급을 받는 ‘횡재수’가 있겠지만, 한전은 고강도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공기업 한전이 적자를 감당하려고 막대한 회사채를 발행하면 다른 기업들은 금리 상승과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경쟁국들이 한전의 대규모 적자를 기업 보조금으로 간주하고 통상 마찰의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다. 시장 교란도 문제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묶어두니 도매요금은 올라도 전기 사용량이 오히려 더 늘고 있다. 전기를 많이 쓰는 부자나 대기업은 더 큰 혜택을 본다. 억대 전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연료비 부담을 덜지만, 서민들은 L당 2000원이 넘은 휘발유나 경유 가격 때문에 허리가 휜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리면 경제에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부작용은 이미 나타났다. ‘에너지 요금의 정치화’와 공기업 간 ‘요금 폭탄 돌리기’를 막으려면 영국 일본처럼 가스와 전력을 통합 규제하는 독립 감독기구인 전기·가스위원회 설치와 같은 구조개혁 방안을 검토할 때가 됐다. 경영평가에서 가스공사 실적이 정당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부총리가 직접 챙겨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6-08 03:00
[오늘과 내일/박용]택시 대란은 정부 실패다정부 실패는 그 자체로 치명적이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정부 개입이 정당화된다. 하지만 구원투수로 투입된 정부가 시장을 교란하고 위기의 불을 지르면 게임은 그걸로 끝난다. 정부 실패를 바로잡는 것도 어렵다. 권력은 웬만해선 실패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이 있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임기를 1년 남겨두고서야 “정부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다”고 물러섰다. 그 후유증은 컸다. 5년 전 집값이 전세금이 될 정도로 부풀어 오른 부동산 거품과 1900조 원에 육박하는 가계 부채의 뒤처리가 새 정부에 남겨졌다. 정부는 전지전능한 해결사처럼 굴지만 실패 사례는 차고 넘친다. 정부 개입 자체만으로도 시장 비효율이 커질 수도 있다. 최근 서울에서 전국으로 확산된 ‘택시대란’도 이런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당국은 코로나19 거리 두기 완화에 따른 수요 폭발이나 택시 기사들의 이직 때문에 택시 잡기가 어려워졌다는 핑계를 대고 싶겠지만, 택시 공급과 요금을 틀어쥐고 시장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 건 정부다. 택시가 미국 뉴욕 등에 등장한 건 한 세기 전이다. 택시 수요가 얼마나 되고 요금은 얼마나 받아야 할지 알 수 없던 때니 정부가 면허 제도를 도입하고 요금과 공급 대수를 결정했다. 택시(Taxi)도 세금이나 요금을 뜻하는 독일어 ‘탁세(Taxe)’에서 나왔다. 요즘은 정부보다 똑똑한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승객과 공급자를 실시간 연결하고 가격까지 탄력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시대다. 한데 정부는 100여 년 전처럼 시장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니 시장 왜곡이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가 진입장벽 규제를 치고 세금이나 보조금으로 시장을 장악하면 민간 투자와 혁신은 구축된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면 공급이 주는 건 부동산 시장에서도 목격했다. 택시 기사들이 벌이가 더 나은 배달 기사로 이직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정부가 택시요금을 묶어둔다고 해서 택시회사 등에 보조금을 준다면 시민들은 앞에서 벌고 뒤로 밑지게 되는 셈이다. 택시 대란과 같은 정부 실패는 어디나 있다. 뉴욕에서도 승차공유 서비스 ‘우버’가 등장한 이후 경쟁에서 밀린 택시 기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일어났다. 신기술의 도전과 전통산업의 몰락으로 묘사된 이 비극의 이면엔 시 당국이 말하지 않는 정부 실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게 당시 뉴욕타임스(NYT) 보도로 드러났다. 당국은 택시 공급을 통제하고 경매 방식을 도입해 면허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렸다. 이 바람에 빚을 내서 비싼 가격에 면허를 구입한 택시 기사들이 수익 악화와 빚 부담에 시달리며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런데도 정부는 입을 다물고 사회적 비난은 우버 등 새로운 도전자에 집중됐다. 정부 실패 해법은 정부가 손을 놓으면 보인다. 정부는 시민 안전과 시장 경쟁 확대 등에 집중하고 택시 공급과 요금은 더 똑똑한 시장 메커니즘을 활용해 택시 제도의 판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시민이 원하는 건 더 안전하고 편리하고 경제적인 이동수단이지 택시 그 자체는 아니다. 민간주도 성장을 들고나온 윤석열 정부는 부처 차관과 처·청장 41명 중 32명을 관료 출신으로 채웠다. 정부 실패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새 정부가 성공하려면 역대 정부 실패를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시장 개입의 유혹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택시 시장처럼 신발 속 돌멩이 같은 규제가 빠지지 않으면 돌멩이가 박힌 신발 자체를 바꿔 신을 각오도 필요하다. 관치 중독을 끊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5-18 03:00
[오늘과 내일/박용]반도체 전쟁, 기업인 ‘모래주머니’ 떼고 뛰게 해야요즘 세계 경제에서 가장 핫한 나라가 대만이다.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이 최근 페이스북에 “한국 경제가 코로나19 위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른 성장세를 지속하며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위상을 굳건히 했다”고 자랑했지만 대만의 압도적 성장세와 비교하면 초라하다. 대만은 2020년 한국이 ‘마이너스 성장(―0.9%)’했을 때도 3%대 성장을 했다. 지난해엔 2008년 마잉주 전 총통 때부터 꿈꾸던 6%대 성장을 달성하며 한국(4.0%)과 격차를 벌렸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9년 만에 한국을 앞지른다.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대기업과 반도체 등 정보기술(IT) 중심으로 재편하고 ‘회귀전략’을 통해 해외로 나간 기업을 불러들인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차이잉원 매직’이 미중 무역갈등과 코로나19 위기에서 결실을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해 11월 블룸버그 포럼에서 “반도체의 경우 모든 걸 미국 내에서 생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맹들과 협력해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가치를 공유하는 우방 국가들이 생산을 분담)을 하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와 국가 안보를 떼어내기 어려운 경제안보 시대에 맞게 우방끼리 공급망 ‘깐부 동맹’을 구축해 경제적 안보적 위험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한국이 자칫 실기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전략인 ‘프렌드쇼어링’ 과정에서 대만과의 격차를 더 키울 수 있다. 대만은 벌써 미국-일본으로 이어지는 반도체 3각 동맹을 가동하고 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대만의 TSMC는 이미 각각 120억 달러와 70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와 일본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TSMC와 소니가 일본에 짓는 반도체 공장 투자금의 절반은 일본 정부가 댄다. 지난해 미 백악관이 내놓은 공급망 전략보고서엔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이 50번 넘게 언급됐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반도체 공급망 회의를 열 때마다 삼성전자를 초대하고 있다. 미 정부가 삼성전자에 반도체 재고 등 공급망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한 것도 반도체 프렌드쇼어링을 위한 신뢰 구축 단계라는 해석이 나온다. 워싱턴 정가에 정통한 산업계 한 고위 인사는 “삼성이 앞으로도 계속 초대받을 것이다. 경제안보 측면에서 할 일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한 깐부 동맹이 반도체 공급망의 새판을 짜고 있고 미국의 초대장은 수시로 날아오는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8월 가석방된 뒤 취업 제한에 묶여 과감한 투자나 인수합병(M&A) 결정조차 쉽지 않다는 게 경제계의 걱정이다. 오죽하면 경제5단체가 뜻을 모아 문재인 정부에 이 부회장 등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복권 청원서까지 내고, 기업인들이 세계무대에서 당당하게 뛸 수 있게 발목을 잡고 있는 ‘모래주머니’부터 떼어 달라고 하소연하겠는가. 기업의 낙수효과가 예전만 못 해도 세계시장에서 통하는 글로벌 기업 없이 잘나가는 나라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과거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한민국의 현재는 역대 모든 정부의 노력이 쌓인 결과이며 정부만이 아니라 국민과 기업이 함께 이룬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새 정부와 국민, 기업이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뛸 수 있다면 경제계가 요청하는 사면 조치로 기업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래주머니’부터 떼어주는 노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4-27 03:00
[오늘과 내일/박용]아무나 흔들 수 없는 나라지난달 출간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문집 제목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다. 현실은 책 제목처럼 멋지진 않다. 중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지난해 요소수 사태마다 혼란이 있었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정신 승리’보단 강대국이 기침하면 우린 독감에 걸리는 현실을 직시하고 위험에 대비해야 위기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세계 최고 군사력과 기축통화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을 빼면 사실상 없다. 북한이 핵보유국이라고 거들먹거리고 한국이 주요 7개국(G7)을 능가하는 경제적 성과를 냈다고 뽐내도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로 쳐주진 않는다. 세계 제2의 군사대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가진 러시아 역시 미국과 서방이 금융과 에너지 제재로 흔들면 흔들리는 게 현실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관세 철폐와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세계화가 후퇴했다. 세계화 시대에 건설된 물류와 공급망 인프라, 에너지, 핵심 기술 등과 관련한 국가 간 상호의존성은 경제 인프라를 안보의 전략무기로 동원하는 경제안보 시대의 급소가 됐다. 중동산 원유를 실어 나르는 호르무즈 해협과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무역로인 수에즈 운하 등 급소지역(choke point)이 막히면 세계 물류동맥이 끊어지는 것처럼 반도체나 5세대(5G) 통신기술, 벨기에에 거점을 둔 국제금융결제망(SWIFT) 등은 시장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세계 경제의 급소 인프라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제안보의 현실적 목표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미국과 같은 나라보다는 핵심 기술, 기업, 인재 등의 급소 인프라를 지켜 ‘아무나 흔들 수 없는’ 고슴도치와 같은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수백, 수천 개 전략 품목을 일일이 관리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상대방의 핵심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급소기술이나 급소기업을 보유하고 있으면 상대가 만만하게 보지 못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이 자국의 핵심 이익이 걸려 있지 않으면 국가 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게 국제사회의 현실이다. 한국의 삼성전자, 대만의 TSMC와 같은 급소기업은 패권경쟁의 타깃이자 경제안보를 지키는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다. 경제안보의 핵심은 통상을 누가 맡느냐가 아니다. 외교 따로, 통상 따로, 산업 따로 노는 칸막이를 없애고 국가의 힘을 결집하는 컨트롤타워를 대통령이든 국무총리 밑에 두고 급소 인프라를 관리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지난해 요소수 사태에서 중국의 요소 수출 의무화 고시에 대한 늑장 대응의 원인은 사태 초기 현지 공관에서 이 문제를 차량용 요소가 아닌 농업용 ‘요소 비료’의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시장과 산업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경제안보의 조기 경보조차 불가능하다. 외교부나 산업통상자원부 밖에도 대안이 있다. 세계 기술과 투자 동향 등을 파악하고 산업의 급소와 위험을 조기에 감지할 수 있는 특허청의 특허정보 인프라 등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4년 5월 상하이 시찰에서 “과학기술창조혁신의 ‘급소’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3월 미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NSCAI)는 의회에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따라잡지 못하게 반도체 제조 기술의 ‘급소’를 조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강대국들은 서로의 급소를 노리며 한 방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통상을 붙였다 뗐다 하며 밥그릇 싸움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런 적전 분열이 되풀이되면 ‘아무나 흔들 수 있는 나라’로 전락한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4-06 03:00
[오늘과 내일/박용]첫 평준화세대 대통령에게 거는 세 가지 기대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14일 첫 기자회견에서 지역균형 발전이 포함된 다섯 가지 국정 청사진 과제를 제시했다. 안 위원장은 “좋은 직장이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 지방 청년들이 떠나면서 지역은 저출생 고령화가 심화하고 수도권은 직장 부족과 높은 집값으로 결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지역균형 발전 실패가 저출생의 근본 원인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 참신하지만 해법은 간단치 않다. 미국 도시들의 아마존 본사 유치 경쟁에서 보듯이 대기업을 지역에 유치하는 건 쉽지 않고 세금도 많이 든다. 정부가 혁신도시를 만들고 억지로 공공기관과 공기업을 끌어다 놔도 인재 유출은 계속된다.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20년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나간 순이동 인구가 10년 전에 비해 10대는 46.4%, 20대는 51.7% 늘었다. 30대는 순유출로 전환됐다. 좋은 직장이 필요하지만 이걸론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일자리 문제에 시선이 고정돼 정작 간과하고 있는 건 지역 인구 유출이 취업 적령기 전보다 훨씬 빠른 10대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지역에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고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하는 시기에 인재가 빠져나간다. 예전엔 지역 명문고와 짱짱한 지방 국립대가 젊은 인재를 붙잡아두는 ‘자석’ 역할을 했지만 1974년 시작된 고교 평준화 이후 명문고는 사라지고 국립대는 명성을 잃고 있다. 인재가 사라진 지역엔 기업들의 관심도 끊긴다. 비수도권 기업의 절반이 ‘인력 확보’를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역 정치인들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교육 인프라를 놔두고 기업과 일자리만 외칠 때 균형발전 실패는 되풀이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국민통합은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서 국민을 제대로 모시고, 각 지역이 균형발전을 할 수 있도록 지역발전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실력이 인재 발탁의 원칙이며 지역 인재 할당은 공정하지 않다는 윤석열식 ‘능력주의’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하향 평준화의 길을 걷고 있는 지방 교육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고 능력주의 원칙만 강조하면 이 역시 또 다른 차별과 불공정 논란을 낳는다. 1979년 서울 충암고를 졸업한 윤 당선인은 헌정 사상 첫 ‘평준화 세대’ 대통령이다. 학생들의 입시 부담을 덜어주고 명문고 중심 학력주의 폐단을 없앤 고교 평준화의 장점과 학생 선택권 제약과 같은 단점을 모를 리 없다. 평준화의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보완하는 ‘평준화 2.0’ 대책이 있어야 윤석열식 능력주의도, 안철수식 지역 균형발전도 산다. 무엇보다 지역 특성화고 취업률을 다시 끌어올리고, 학생들이 재능을 살려 공부할 수 있는 다양한 고교를 만들고, 중고생보다 낮은 대학생 1인당 교육비를 높여 STEM(과학·기술·공학·수학)에 특화된 지방 명문대부터 키워야 한다. 이렇게 길러낸 지역 인재가 경기도에서 멈춘 대기업 ‘남방한계선’을 무너뜨리고 기업을 끌어오는 자석이 된다. 지방 소멸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 서부 변방이었던 실리콘밸리가 세계 혁신기업의 수도가 된 것은 스탠퍼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정부가 제일 먼저 추구해야 할 세 가지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겁니다. 교육입니다. 교육이지요, 교육이라고요”라고 말했다. 평준화 세대 첫 대통령에게도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제일 먼저 추구해야 할 세 가지를 묻고 싶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3-16 03:00
[오늘과 내일/박용]누가 돼도 ‘계란 대통령’높은 물가는 소비자를 가난하게 만든다. 커피 한 잔 값이 400원 오르면 매일 한 잔을 마실 때 연간 14만6000원을 더 내야 한다. 정부가 15만 원을 나눠줘도 오른 커피값으로 거의 다 사라지는 셈이다. 심각한 인플레는 서민의 적이다. 3%대 물가 상승세가 이어지자 박수현 대통령국민소통수석비서관은 13일 페이스북에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물가 관리 중”이라는 글을 올렸다. 물가 걱정을 달래려는 소통일 텐데 안일한 물가 인식도 드러냈다. 박 수석은 ‘40년 만에 7.5% 뛴 미 물가’ 신문 기사를 거론하며 “주부들이 이런 뉴스까지 접하고 나면 걱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언론 탓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작년에 연간 2.5% 물가 상승을 기록해 다른 나라(미국 4.7%, 캐나다 3.4%, 독일 3.1%, 스페인 3.1%)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부들이 체감하는 ‘밥상물가’(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물가)는 지난해 5.9% 뛰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물론이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2%)보다 훨씬 높다. 장을 보며 늘 물가를 확인하는 ‘물가 9단’ 주부들에게 다른 나라보다 물가가 낮다고 하면 구중궁궐에 파묻혀 산단 말을 듣는다. 그는 ‘1월 소비자물가는 3.6% 상승했지만, 작년 12월 대비 0.1%포인트 하락한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역대 최고 규모인 20만4000t의 성수품을 풀어 물가 상승률을 0.1%포인트 떨어뜨린 게 동네방네 자랑할 일은 못 된다. 물가 상승률은 10년 만에 넉 달 연속 3%대이고 기획재정부는 “2월 물가도 어렵다”고 본다. 박 수석은 “작년 6월부터 금년 1월 말까지 대통령은 참모회의에서 무려 11회의 소비자물가 관련 지시를 쏟아냈다”고 했다. 이어 “매일 아침 열리는 참모회의에서 내가 경제수석을 부르는 말이 있는데, ‘계란 수석’이 그것”이라며 “그만큼 관련 물가가 대통령 앞에서 많이 보고되고 지시가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지시를 쏟아내도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는 건 문제가 간단치 않다는 뜻이다. 세계적 공급망 혼란과 국제유가 급등과 같은 외부요인 탓을 하고 기업 담합 핑계를 댈 수 있겠으나 그게 다는 아니다. 정부가 막대한 돈을 풀어서 생긴 ‘관제 인플레’를 빼놓고 물가 단속만 하면 ‘유체이탈’ 대책이다. 당정이 선거를 앞두고 6·25전쟁 이후 71년 만에 처음으로 ‘1월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추진했을 때 등 떠밀려 추경안을 들고나온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추경 규모가 더 늘면 물가에 대한 우려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걱정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부가 돈을 아낌없이 풀어야 한다고 믿는 현대통화이론 지지자들도 물가가 급등하면 돈 풀기 약발이 다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우린 역주행이다. 다음 달 결정될 차기 대통령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세계 경제의 변곡점을 목격할 가능성이 크다. 우크라이나 위기와 원자재 가격 급등, 악화하는 무역수지, 불어나는 재정적자, 대선 뒤로 밀어놓은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 요구와 같은 난제에도 직면할 것이다. 물가 불안에 지친 서민의 분노는 정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계란 수석’이지만 그땐 ‘계란 대통령’이란 말이 나올 것이다. 당선의 꿈에 취해 200조, 300조 원 선거 공약을 남발하며 풍선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2-23 03:00
[오늘과 내일/박용]순직소방관 기억할 ‘길’이 없다6일 경기 평택시 청북읍 냉동창고 신축공사 현장에서 불이 나 진화 작업에 투입된 소방관 3명이 숨졌다. “건물 안에 작업자 3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 투입된 이형석 소방경(51), 박수동 소방장(32), 조우찬 소방교(26)는 현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거침없이 화재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영웅들은 화마에 스러져 끝내 가족과 동료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 사람이 있다”는 한마디에 소방관들은 불구덩이로 몸을 던진다. 2001년 3월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 다가구주택 화재 사건에서 순직한 6명의 소방관들도 그랬다. 당시 “1층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주민들의 말을 듣고 뛰어 들어간 소방관들은 30년도 더 된 낡은 벽돌 건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순직했다. 당시 취재 중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소방관은 순직한 동료가 남긴 작은 수첩의 한 페이지를 보여줬다. 거기엔 “친구가 보고 싶다”는 노랫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날 밤 소방관들은 불과의 사투를 끝내고 가족, 친구들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동료를 그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또 기울였다. 한국에선 순직한 영웅들을 만나려면 현충원이나 기념관에 가야 하지만 미국 아이들은 동네 길이나 건물 이름에 얽힌 유래를 조사하는 학교 숙제를 하며 그들의 영웅을 만나고 배운다. 문자가 없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산 강 바위 등 지형지물에 조상들의 무용담을 붙여 입에서 입으로 역사를 전했듯이 미국인들은 도로, 다리, 건물 등에 영웅의 이름을 남기고 공동체의 역사를 기억한다. 도로에 순직한 고속도로 순찰대원의 이름을 붙이거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군인의 이름을 딴 다리를 만드는 식이다. 동두천의 캠프 케이시나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 등 주한미군 기지들도 6·25전쟁이나 작전 중 순직한 미군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미 뉴욕 유엔본부 근처엔 북한을 방문했다가 체포돼 혼수상태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숨진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이름을 딴 길도 있다. 뉴욕시가 북한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 앞길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미국식 기억법이다. 소방청에 따르면 한국에선 최근 10년간 연평균 4.9명의 소방관이 순직하고 567.2명이 공상을 당했다. 그런데도 전국에 순직 소방관의 이름을 딴 길은 경기 평택시가 지난해 12월 평택국제여객터미널 인근 도로 750m 구간을 ‘소방관이병곤길’이라고 지정한 게 처음이라고 한다. 전국에 K팝 스타, 영화배우, 트로트 가수 등의 이름을 딴 도로가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순직 소방관의 이름을 딴 명예도로가 여태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예산 지출을 줄여서라도 국민들과 자영업자들을 위하여 수십조 원의 재난지원금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그렇지만 정작 세비 삭감 같은 공동체를 위한 작은 기여조차 실천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에겐 무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경제는 노동, 자본, 원자재 등으로만 성장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재난과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고 맨 마지막에 빠져나오는 제복 입은 영웅들이 없다면 공동체는 버티지 못한다. 이들의 희생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문화와 같은 탄탄한 사회적 자본이 받쳐줘야 공동체도, 경제도 더 건강하게 성장한다. 이젠 우리만의 ‘영웅 기억법’이 필요하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2-01-12 03:00
[오늘과 내일/박용]베네수엘라 기자 A가 한국 대선판 본다면10여 년 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열린 2주간의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온 기자 A를 처음 만났다. 10여 개국에서 온 기자들은 일과를 끝내고 학교 주변 맥줏집에서 친분을 쌓고 각 나라 정보를 교환했다. 술값은 갹출했는데, 그때마다 A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중에야 정부가 외환을 통제해 달러를 넉넉히 들고 나올 수 없었다는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주최 측이 제공한 체재비 외에 맨해튼 하루 호텔비도 안 되는 100달러 용돈으로 2주를 지내야 하는 그에겐 맥주 한 잔도 사치였다. 사정을 알게 된 다른 나라 기자들은 십시일반 A의 몫을 분담했다. 귀국 전날 밤 A는 동료 기자들에게 베네수엘라 관광엽서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감사편지를 돌렸다. 그의 손 편지를 읽으며 정치가 실패했을 때 국민들은 어떤 설움을 겪는지 절감했다. 한때 미 플로리다 관광지의 명품 매장에서 “한 개 더”를 외치는 산유국 베네수엘라 관광객들이 넘쳐날 때가 있었다.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뒤엔 사정이 달라졌다. 차베스는 부패한 경제 관료와 부자들을 비판하고 소외된 서민들의 분노를 파고드는 전략으로 1998년 선거에서 이겼지만 집권 후엔 서민들에게 경제난과 살인적 인플레를 안겨줬다.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도 없애고 정적과 언론인을 탄압하며 20여 년 좌파 집권 시대를 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위해 은행 석유 식품 기업을 국유화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공공부문 인건비 증가 등으로 재정 부담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 수입원인 원유 가격 하락과 수출 감소, 미국의 제재 등이 겹치자 경제는 무너졌다. 통화 가치는 하락했고 인플레가 찾아왔다. 베네수엘라는 지금도 살인적 인플레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미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책에서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탈냉전 이후 선출직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례로 꼽았다. 냉전 땐 총칼과 탱크를 앞세운 군사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했지만 요즘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티 안 나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총칼이 아닌 투표함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위기는 어디서든 일어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재임 중인 2018년 이 책이 나오자 “트럼프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에선 올해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며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동시에 과거 군사정권에 저항하던 세력이 이제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쥐고 포퓰리스트로 변질되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정치 지도자들이 자영업자를 두텁게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으로 막대한 돈을 뿌리더니 선거를 앞두고 뒤늦게 자영업자를 걱정한다. 국민을 부자와 빈자로 편을 가르고 ‘세금 폭탄’을 던지다가 선거와 공시가 발표를 앞두고 보유세 현실화를 미루겠다고 속삭인다. 내년 국가부채가 1000조 원을 넘는데도 대선 후보들은 50조, 100조 원의 공약을 던진다. 말을 듣지 않는 관료들에겐 ‘선출 권력에 복종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패는 견제와 균형이다. 기성 정당은 소속 정치인들이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견제하고 유권자들의 투표지에 차악이 아닌 최선의 후보들을 올려놓을 책임이 있다. 나머지는 유권자의 몫이다. A가 요즘 한국 대선판을 본다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충고할 듯싶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12-22 03:00
‘낙하산 근절’ 청년공약부터 걸라[오늘과 내일/박용]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싫어하는 경제용어가 ‘펀더멘털(기초체력)’이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정부 고위관료들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괜찮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당시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 종합정책과의 30대 서기관이던 고 위원장은 이후 ‘펀더멘털’을 입에 담길 꺼린다. ‘외환위기 2030세대’는 경제가 무너지면 어떤 고통을 겪는지 절감했다. 하지만 24년이 흘렀는데도 청년 취업난은 미완의 과제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막대한 세금을 쓰고도 해결하지 못한 건 ‘펀더멘털 관료들’처럼 위기 원인을 외면하고 진통제 처방을 남발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일자리가 사라진 건 세계화로 공장이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자동화로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냥 놔두면 중산층 일자리인 제조업과 서비스업 일자리는 남아나기 어렵다. 그나마 남은 일자리는 불공정 경쟁으로 힘 있는 이들이 독식한다는 게 청년들의 불만이다. 이 세 가지 난제에 해답을 내놓지 못한 청년공약은 시간과 세금 낭비일 뿐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중산층 일자리를 빼앗아간 주범으로 세계화와 세계화주의자(Globalist)를 지목하고 무역장벽을 세워 흐름을 되돌리려다가 동맹국 반발까지 샀다. 후임 조 바이든 대통령은 동맹 복원과 국제기구 복귀 등을 약속했지만 다른 나라 공장을 미국으로 끌어오는 데도 적극적이다. 글로벌 법인세 공조로 세금을 깎아 일자리를 뺏어간 나라를 견제한다. 글로벌 분업체계가 무너진 탈세계화 시대엔 이런 식의 국가 간 일자리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한국 대선 후보들은 어떻게 기업을 유치하고 지킬 건지, 국가 간 일자리 경쟁엔 무엇으로 대응할지 별말이 없다. 과거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 취업난이 해결될 거라고 했는데, 그 자리는 젊은이가 아닌 자동화된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미국은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교육을 강화해 일자리를 만들고 지킨다는데, 미국보다 대학 진학률이 높은 한국은 취업자 절반이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는데도 교육 개혁에 손을 놓고 있다. 수요가 급증한 반도체 인력을 육성한다며 다른 학과 정원이 줄면 그 정원으로 돌려 막으라는 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컴퓨터공학과 정원은 미 스탠퍼드대가 2008년 141명에서 지난해 745명으로 늘었다. 서울대는 55명에서 70명으로 늘리는 시늉만 했다. 한전공대와 같은 지역 공대를 하나라도 더 세우려고 해도 중복 투자라고 난리다. 세계화와 자동화 해법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대선 후보들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조차 손을 놓고 있다. 청년들이 분노하는 일자리 불공정 게임의 규칙을 바로잡으려면 그들의 솔선수범이 필요하다. 대선 후보들이 당선 이후 캠프에 모여든 어중이떠중이 낙하산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공정하게 쓰겠다는 약속부터 하면 어떤가. 프랑스 청년들은 요즘 자신들을 “희생당한 세대(G´en´eration sacrifi´ee)” “취업 불안, 경기 악화 등으로 사회 전체의 부채를 짊어져야 하는 세대”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판 ‘희생당한 세대’를 만들지 않으려면 지난 20여 년간 청년들의 젊음을 갈아 넣어 만든 득표용 청년공약부터 걷어내야 한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12-01 03:00
[오늘과 내일/박용]거꾸로 선 한국경제, 대선주자들 해법 있나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법대를 나온 법조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후보는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로 일하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지만 변호사로 산 기간이 더 길다. 윤 후보는 27년을 검사로 지냈다. 변호사나 검사는 과거나 현재에 벌어진 허물을 따질지언정 할리우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수사관들처럼 미래를 판단하진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틀 안에서 살아오며 의정 경험이 없고 청년층의 지지도 약하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후보의 아킬레스건 역시 청년들에게 가슴 뛰는 미래를 제시하는 비전 역량일 것이다. 그 점에서 그간 두 후보가 맛보기로 보여준 공약들은 낙제점에 가깝다. 무엇보다 청년들을 위한다는 두 후보가 청년세대에 큰 부담을 지우는 돈 풀기 공약부터 들고 나온 건 위선이다. 물가가 급등하면서 위기 대응을 위한 정부의 돈 풀기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으로 봐야 하는데도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는 건 현실감각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돈줄 조이기를 시작한 미국 등 세계 흐름과도 동떨어진 행보다. 정부가 위기 때엔 저소득층이나 자영업자 등의 피해자를 도와야 하지만 덮어놓고 돈을 푼다고 해서 경제가 더 살아나는 건 아니다. ‘성공한 국가의 10가지 법칙’의 저자인 루치르 샤르마 모건스탠리 수석글로벌전략가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지난해 각국의 경기부양책 효과를 분석한 결과 경기 부양 규모와 경기 회복 강도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히려 “팬데믹 기간 지출을 많이 늘리려고 했던 나라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장과 재정적자 및 부채와 같은 어려움을 더 겪게 될 수 있다”며 “이들 국가가 다음에 올 금융거품과 싸우는 데 필요한 실탄을 축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선 후보들이 청년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청년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말고 젊어서 일해야 할 땐 하릴없이 쉬어야 하고, 노년에 쉬어야 할 때는 소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거꾸로 선 한국경제부터 바로잡는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일하지도 않고 구직 활동도 안 하는 비경제활동 인구 가운데 향후 1년 내 일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역대 최대인 4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특히 20대 비경제활동 인구 중 절반(50.1%)이 1년 내 취업이나 창업을 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인의 노후는 고달프다. 어처구니없게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북한의 대외 선전매체조차 “미꾸라지국 먹고 용트림한다”며 ‘K 노인 빈곤’이라고 조롱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이 정책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잠재성장률이 2030년 이후 0%대로 추락한다고 경고했다. 성장 여력이 사라지면 청년들은 취업하기 더 어려워지고 노년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대선 후보들은 ‘전환적 공정성장’이니 ‘정의로운 나라’ 등 듣기에 좋은 구호보다 젊어선 열심히 일할 기회를, 노년엔 안정적인 소득을 어떻게 마련해줄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 청년들의 공정한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뒤떨어진 고등교육 제도와 기득권 사수를 위해 툭하면 거리로 나오는 전투적 노조, 정년과 국민연금 수급 기간에 발생하는 은퇴자 ‘소득절벽’과 고갈되는 연금 보전 방안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과제가 없다. 그 해법을 내놓는 게 시대가 원하는 대선 후보의 실력이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11-10 03:00
[오늘과 내일/박용]빚 권하는 세상, 서민만 아프다금융당국이 대출을 갑자기 조인다고 난리인데, 올해만 그런 건 아니다. 가을마다 연례행사처럼 관제 ‘대출 보릿고개’가 닥친다. 연말 관리목표에 쫓긴 금융당국이 밀린 숙제하듯 대출 수도꼭지를 잠그기 때문이다. 은행을 찾은 서민들은 막막해지고, 단수 전 욕조에 물을 받아두듯 ‘막차 대출 수요’도 한꺼번에 몰린다. 대출은 다시 급증한다. 관리목표도 물 건너간다. 1800조 원 넘는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 금융의 부끄러운 현실이다. 대출 규제로 촉발된 지난해 11월 가계대출 증가세는 최악이었다. 전년 11월의 갑절에 가까운 13조6000억 원이 한 달 만에 불어났다.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규모였다. 빚을 내 집을 사거나 주식 투자를 하려는 수요가 몰린 상황에서 당국이 대출 규제를 예고하자 ‘막차 수요’가 분출한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결국 한국 민간부채 위험 수준을 10년여 만에 가장 높은 ‘경보’ 단계로 올렸다. 올해도 ‘집값 급등-대출 증가-대출 규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달라진 건 사나워진 민심에 대통령이 나섰다는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6일 “가계부채 관리는 불가피하지만 실수요자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했고, 금융당국은 14일 전세대출은 대출 총량 관리에서 제외하겠다며 물러섰다. 이를 두고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민주연구원에서 여론조사도 하고 긴급 토론회도 하면서 강하게 서민들 목소리를 전달한 결과이기에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고 공치사했다. 그러더니 “집 없는 설움도 모르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모피아들의 탁상행정”이라며 관료 탓도 했다. 부동산 실정부터 반성할 일을 공치사로 돌리고, 책임질 일을 전가하는 게 올바른 정치는 아니다. 관제 ‘대출 보릿고개’는 한국 금융이 후진적이라는 증거지만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제도나 시장에 ‘기저질환’이 없는지 따져보는 게 정석이다. 한국경제학회가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8일까지 소속 경제학자 2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89%는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에 대해 ‘주택담보대출 등 주거비 자금 수요에서 비롯했다’고 답했다. 가계부채의 기저질환이 집값 급등이라는 건데, 대출만 조이면 대통령이 언급한 실수요자의 고통으로 전가된다. 문제는 집값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의 9억 원 초과 아파트 비중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6월 15.7%에서 올해 6월 56.8%로 늘었다. 소득은 그만큼 늘지 않았으니 집값의 상당 부분은 누군가가 이자를 물고 마련한 빚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집값이 급등하면 전세금도 따라 오른다. 전세대출 수요도 는다. 전세금과 집값 격차가 줄면 전세 안고 집을 사는 ‘갭 투자’가 고개를 든다. 집값은 다시 오르고 가계대출은 또 불어난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춤을 춰야 하는 ‘빚 권하는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 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계 이자 부담은 12조5000억 원 증가한다. 대출을 잠시 풀어주는 건 진통제를 놔주고 골치 아픈 문제를 카펫 밑으로 밀어 넣어 감추는 것이다. 집값이 뛰면 내년에도 ‘대출 보릿고개’는 되풀이될 것이다. 서민에게 절실한 건 기존 주택이든 신규 주택이든 주택 공급을 늘려 집값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무주택 서민들에게 큰 빚을 내지 않고 열심히 일해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돌려줄 때 ‘대출 난민’도, 대출 보릿고개도 사라질 것이다. 빚 권하고 공치사할 때가 아니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10-20 03:00
[오늘과 내일/박용]총리의 소시지와 눈물 젖은 빵한국에선 자동차 대기업이 소시지를 만들어 구내식당에 공급한다면 골목상권 침해니 일감 몰아주기니 해서 혼쭐이 난다. 독일에선 얘기가 다르다.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은 자동차 생산량보다 더 많은 연간 약 700만 개의 ‘커리부어스트’ 소시지를 만들어 6곳의 공장 구내식당에 제공하고 공장 밖 슈퍼에서도 판매한다. 이 회사가 1973년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소시지 생산을 시작한 건 공장 직원들 때문이다. 독일 노동자에게 국민음식 소시지는 영양 만점 점심 메뉴였다. 독일에서 9월 총선을 앞두고 이 ‘폭스바겐 소시지’가 논란이 됐다. 탄소중립 경영을 선포한 폭스바겐이 직원들의 채식 수요와 환경 보호를 이유로 소시지 생산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시지 재료인 소와 돼지를 기르고 도축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다는 것인데, 이 소시지를 즐기던 노동자와 서민들에겐 날벼락 같은 결정이었다. 과거 폭스바겐 이사회에 참여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77)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입장문을 내고 “커리부어스트는 생산라인에서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에너지 바와도 같은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 등의 담론이 휩쓸고 있는 선거 국면에서 원로 정치인의 소신 발언은 독일사회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슈뢰더 전 총리의 부인인 김소연 독일 NRW글로벌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대표의 인스타그램엔 볼프스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하노버 등 독일 전역에서 “총리님께 안부를!” “총리님을 위하여 건배” 등의 인사말과 함께 커리부어스트를 먹는 인증샷이 속속 올라왔다. 김 대표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번 논란을 전하며 괴테의 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떠올렸다. 슈뢰더 전 총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니고 대학 때는 공사장에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던 고학 청년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에게 커리부어스트는 공사판의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열량보충제였을 것”이라며 “막일을 직접 뛰어본 사람만이 근육을 뻐근하게 소진시키는 노동 후의 소시지 한 조각과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주는 의미를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편은) 환경 보호와 동물 애호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안 슈뢰더 전 총리는 2000년대 초 실업과 저성장에 시달리며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 경제의 체질을 바꾼 개혁 리더였다. 사회민주당(사민당) 소속의 그는 최대 지지 기반인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방만한 복지 지출을 줄이는 한편 일자리 창출과 실업자의 취업을 장려하는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일 정도로 강골이었다. 노조 등에 밉보인 그는 권력을 잃었지만, 독일은 ‘유럽의 리더’로 복귀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선거철마다 정치권이나 금융시장에서 엘리트들이 탄소중립, 탈원전 등 멋진 신세계의 비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서민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충분한 설득과 공감 없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설익은 비전과 어설픈 개혁 과제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슈뢰더 전 총리가 ‘폭스바겐 소시지’ 논란에 그토록 발끈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9-29 03:00
[오늘과 내일/박용]‘뉴딜 낙하산’도 ‘개취’라는 청와대‘대한민국 100년을 설계한다’는 20조 원 규모 뉴딜펀드를 금융투자 경험이 일천한 비전문가가 굴리겠다고 나선다면 말려야 정상 아닌가. 청와대에선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뉴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성장금융의 투자운용2본부장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있을 때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을 지낸 인사가 내정됐다. 금융권에선 “금융투자 경험도, 자격증도 일천한 부적격 인사”라고 난린데, 정작 청와대는 “청와대가 관여하는 인사가 아니다”라며 강 건너 불구경이다. 한술 더 떠 “전직 청와대 직원이 개인적으로 취업을 한 사안에 대해 일부 언론에서 낙하산,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유감”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개취(개인적 취업)의 문제인가. 뉴딜펀드를 뜬금없이 국민들 앞에 띄운 건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금융과 민간 자금이 참여하는 ‘뉴딜펀드’ 조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두 달 뒤 정부는 문 대통령이 주재하는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에서 ‘국민참여형 뉴딜펀드’ 조성 방안을 보고했다. 청와대가 관여하는 인사가 아니라고 해서 방관할 자리가 아니다. 뉴딜펀드에 국민을 끌어들인 것도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막대한 유동자금이 한국판 뉴딜사업으로 모이고 수익을 함께 향유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정부는 일반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모재간접공모펀드를 만들고 국민참여펀드 조성도 추진하고 있다. 국민을 이해관계자로 끌어들였으니 누가 펀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상세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당에서도 오래 일을 해서 전혀 (금융) 흐름을 모르는 분은 아니다”라고 논란의 당사자를 감쌌다. 당에서 오래 일하고 흐름을 이해한다고 해서 국내 최고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할 투자운용 업무를 맡길 수 있나. 김 총리는 “투자운용본부장이 1본부장, 2본부장이 있는데 그중 한 파트를 맡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원래 한국성장금융에 투자운용본부장은 1명이었다. 지난달 이 자리를 둘로 쪼개고 2본부장을 만들더니 16개 모(母)펀드 중 가장 덩치가 큰 뉴딜펀드 운용 업무를 갖다 놓고 공모 절차도 없이 본부장을 내정했다는 게 ‘위인설관 낙하산 인사’ 논란의 발단이다. 권력을 쥔 여당, 청와대 출신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승자독식 세계관은 실력을 쌓기 위해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일을 하고 자격증을 따느라 청춘을 보낸 전문가들의 땀과 노력을 배신하는 일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할 한국의 실력주의(Meritocracy)가 뿌리부터 흔들린다. 한국성장금융이 투자하는 자(子)펀드는 200개가 넘고 투자 기업만 약 3000곳이다. 뉴딜펀드 투자운용 책임자는 7조 원의 정책자금이 투입된 모펀드를 굴리며 자펀드나 투자 기업에 막대한 영향을 발휘할 수 있다. 감시가 허술하면 옵티머스·라임과 같은 사모펀드 사태나 총리와 측근이 국영투자사를 통해 45억 달러를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말레이시아 ‘1MDB’ 사건과 같은 ‘약탈정치(Kleptocracy)’ 창구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러니 투자운용 책임자는 공개 채용을 원칙으로 하고 주요 의사결정에 대한 감시는 강화해야 한다. 이 중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전직 직원의 개취’라고 한 청와대의 ‘불공정 불감증’이야말로 유감천만이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9-08 03:00
‘부동산 싱크홀’에 빠진 ‘박 과장’ 구하기 [오늘과 내일/박용]때론 영화가 현실의 아픈 지점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난주 개봉해 6일 만에 100만 관객을 모은 재난코미디 영화 ‘싱크홀’(지반 환경에 변화가 생겨 갑자기 땅이 꺼지는 현상)은 어렵게 장만한 집이 500m 깊은 땅속으로 꺼진다는 ‘웃픈’ 상상력으로 눈길을 끈다. 영화는 고생 끝에 서울 마포에 신축 빌라를 장만한 ‘박 과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대한민국에 이런 무주택자 캐릭터는 너무 흔하다. 수도권의 자가 보유율이 53%이니 거리에서 만난 가장 둘 중 하나는 무주택자다. 박 과장이 11년 만에 서울에 집을 마련한다는 설정도 현실과 부합한다. 치솟는 집값으로 수도권의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PIR) 배수는 2016년 6.7배에서 지난해 8.0배로 높아졌다. 박 과장이 수도권에 집을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8년을 모아야 한다는 얘긴데, 월 소득의 18.6%가 매월 임차료로 들어가는 수도권의 평범한 샐러리맨들에겐 ‘재난’ 같은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과장의 선택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이다. 집을 얻는 대신 빚쟁이가 되는 또 다른 ‘재난’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도 그렇다. 지난달 말 현재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040조2000억 원으로 한 달 만에 9조7000억 원 늘었다. 주택담보대출이 가계대출의 73%를 차지한다. 상품시장에선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고 공급은 늘어난다. 하지만 과시적 소비 욕구를 자극하는 명품이나 부동산처럼 공급이 제한된 시장에선 가격이 오르면 공급이 더 줄 것으로 보고 추가 수요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집값이 치솟는데도, ‘내 집이 꼭 필요하다’고 응답한 국민이 2019년 84.1%에서 지난해 87.7%로 높아졌다. 공급 제한과 집값 상승 신호가 깜빡거리면 언제라도 시장에 뛰어들 준비가 된 ‘부동산시장의 예비군’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명품 브랜드들이 생산량이 제한된 한정판을 만들거나 가격 인상설을 흘리고 무례하게 고객을 줄 세우는 상술을 부리는 건 이런 시장에서 공급을 통제하면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집값이 하염없이 오른 뒤에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공급의 어려움을 뒤늦게 실토한 정부에 집값 급등의 근본 책임이 있다. 정부가 만든 부동산 싱크홀에 빠져 음악이 흘러나오면 시장의 힘에 떠밀려 무대에서 춤을 출 수밖에 없는 무주택자에게 정부 당국자가 집값 고점 운운하며 겁을 주는 건 병 주고 약 주는 격이다. 해법 역시 시장에 있다. 시장의 힘을 역이용해 시장이 원하는 곳에 공공이든 민간이든 주택 공급을 충분히 늘린다는 일관된 신호를 줘야 무주택자들의 불안감이 누그러질 것이다. 집 때문에 생긴 박 과장의 재난은 이제 시작이다. 영화에선 그 귀한 집이 집들이 날 장대비 속에서 생긴 싱크홀 때문에 땅속으로 추락한다. 집값 급락이야말로 영끌 투자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동산시장의 싱크홀이다. 3월 말 현재 가계 및 기업에 대한 부동산금융 익스포저는 2343조 원으로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11.2% 증가했다. 부동산시장에선 가격이 떨어지면 수요가 줄면서 가격이 더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 곧 금리가 오르면 부동산 대출 부실이 커질 가능성도 있는데, 집값을 잡고 시장도 연착륙시킬 수 있을까. 정부가 ‘부동산 싱크홀’에 빠진 박 과장들을 협박하고 훈계할 처지가 아니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8-18 03:00
[오늘과 내일/박용]공정도, 경제도 놓친 35조 K추경4472만 명에게 25만 원씩 나눠주기로 한 5차 재난지원금(국민지원금)의 발화점은 문재인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2월 간담회였다. 대통령은 이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서 벗어날 상황이 되면 국민 위로 지원금, 국민 사기 진작용 지원금 지급을 검토할 수 있다”고 운을 뗐다. 다섯 달 뒤인 23일 국회는 국민지원금이 포함된 34조9000억 원의 역대 최대 규모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통과시켰다. 한쪽에선 ‘4차 대유행’을 잡기 위해 방역을 강화해놓고 다른 쪽에선 소비 진작에 방점이 찍힌 국민지원금을 뿌리겠다는 거다. 코로나19 진정을 전제로 국민지원금을 거론한 대통령의 2월 발언과도 거리가 멀다. 이번 추경은 묘하다.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후하고 피해자들에겐 상대적으로 박하다. 국민 88%에게 국민지원금을 나눠주는 데 11조 원, 거리 두기 격상으로 피해를 본 자영업자 178만 명에겐 절반도 안 되는 5조3000억 원을 배정했다. 피해 유무와 상관없이 뿌리는 ‘상생 국민지원금’은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억울한 ‘공돈’으로 변질됐다. 공정성 논란을 자초했다. 11조 원은 그렇게 뿌릴 돈이 아니다. 한 해 국방비(52조8000억 원)의 약 5분의 1이며 백신도 접종하지 못하고 파병을 나간 청해부대가 소속된 해군과 공군의 1년 예산을 모두 합한 금액(10조6300억 원)보다도 많다. 이 돈을 보태면 대학들의 연구개발비(2019년 기준 5조278억 원)를 세 배로 늘려 세계 일류 대학과 경쟁시킬 수 있고, 지난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130만 명에게 준 생계급여(5조5962억 원)를 올해 세 배로 늘려줄 수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등으로 직장을 잃은 실업자 170만3000명에게 준 구직급여(11조8556억 원)를 감당할 수 있는 큰돈이다. 그런 목돈을 4472만 명에게 뿌리면 푼돈처럼 효과가 줄어든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전 국민에게 나눠준 1차 재난지원금은 사용 가능 업종에서 전체 투입예산 대비 26.2∼36.1%의 매출 증대 효과를 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원래 쓰려던 돈은 저축이나 투자를 하고 정부 돈을 쓰다 보니 소비 효과가 제한적이다. 현금 뿌리기보다 피해를 본 자영업자를 선별해 직접 지원하는 것이 가성비가 좋다는 뜻이다. 방역에 동참한 자영업자들은 빚을 내 근근이 버티고 있다. 3월 말 현재 자영업자 대출은 832조 원으로, 1년 전보다 132조 원(18.8%) 불었다. 연내 금리 인상도 예상된다. 당장은 정부 조치로 대출 원리금 상환이 연기됐지만, 언젠가는 갚아야 할 빚이다. 밀린 청구서들이 날아오는 코로나19 이후가 더 두렵다.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 간사가 얼마 전 내년도 최저임금을 5.1% 인상한 것과 관련해 “코로나19가 끝난 후의 ‘정상 상태’를 가정해 결정했다”고 말했을 때 자영업자들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24.6%로 독일(9.6%), 미국(6.1%)은 물론이고 일본(10.0%)보다 훨씬 높다.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건 한국 경제를 살리는 일이다. 국민 4472만 명에게 뿌릴 국민지원금 11조 원을 보태서 피해를 본 178만 명의 소상공인에게 나눠준다면 현재(1인당 평균 297만 원)의 약 3배인 평균 915만 원을 줄 수도 있다. 거리 두기 단계를 격상하더라도 덜 미안하고, 그들이 밀린 빚을 갚고 재기하게 거들 수 있다. 그런데도 선거에 정신이 팔린 정치권과 피해자를 선별할 능력이 모자란 정부가 현금 뿌리는 ‘헬리콥터 추경’을 반복하며 아까운 재원을 허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7-28 03:00
전기요금 고지서엔 ‘자유’가 없다[오늘과 내일/박용]한국전력에 걸려오는 전기요금 민원의 상당수는 전기와 관련이 없는 TV 수신료에 대한 불만이다. KBS가 TV 보유 가정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1994년부터 전기요금 고지서에 수신료를 함께 청구하는 통합징수 제도가 시작됐다. 모든 사람이 시청자라고 가정하고 수신료를 일방적으로 청구한 다음에 TV가 없다는 걸 입증한 사람만 면제하는 ‘옵트아웃(배제선택)’ 방식이다. “TV가 없다”는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한 구닥다리 방식이어서 민원이 발생한다. 진학이나 취업을 위해 독립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TV가 없는데도 수신료를 내라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한전에 항의한다. 지난해 역대 최다인 3만6273가구가 수신료를 환불받은 건 1인 가구 증가 등 인구구조 변화와 디지털 매체 증가, 시대 변화에 뒤처진 징수 방식 등과 관련이 있다. 이런데도 KBS 이사회가 수신료를 월 2500원에서 3800원으로 52% 올려야겠다고 의결한 건 패착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힘겨워하는 국민들에게 33조 원의 추가경정예산(추경)까지 편성해 지원금 등을 주는 마당에 한 달에 1300원씩, 연간 수천억 원이 넘는 돈을 수신료로 더 걷겠다는 건가. 이달부터는 월 200kWh 이하 전력을 사용하는 625만 가구의 주택용 전기요금 필수사용공제 할인액이 월 4000원에서 2000원으로 줄어든다. 2000원이 오르는 셈이다. 여기에다 국회가 KBS가 요구한 수신료 인상안(1300원)까지 덜컥 통과시켜 주면 이들은 한 달에 3300원을 더 내야 한다. 소비자물가가 치솟아 전기요금마저 2개 분기 연속 동결됐는데 같은 고지서의 수신료만 이렇게 파격적으로 올릴 수 있는가. 수신료와 전기요금의 불편한 동거는 관련이 없는 두 요금을 한 틀에서 움직이게 만든다. KBS가 수신료를 올리려면 직접 소비자 선택을 받는 게 정석이다. 두 요금을 한 번에 떼어내기 어렵다면 전기요금 고지서로 받는 수신료는 최대한 내리고, 나머지는 KBS가 직접 소비자들을 설득해 걷게 할 수도 있다.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함께 내는 게 편한 사람만 전기요금 고지서로 청구하게 선택권을 주는 ‘옵트인(승인선택)’ 방식으로 바꾸면 불만이 줄어들 것이다. 전기요금 고지서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숨은 요금이 또 있다. 탈원전과 신재생에너지 사용으로 늘어난 신재생에너지 의무이행 비용이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 비용, 석탄발전 감축 비용 등의 기후환경 요금이다. 가정에서 내는 전기요금의 약 4.9%를 차지한다. 전력 생산비가 저렴한 원전을 줄이고 비싼 신재생에너지를 더 쓰면 비용이 늘어난다. 탈원전과 탄소제로를 서둘러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각성한 ‘친환경 엘리트’들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좀더 부담할 수 있게 ‘녹색 프리미엄’ 선택권을 확대하는 건 어떤가. 통신요금은 다양한 요금제가 있는데, 가정용 전기요금만 요금제 선택권이 없다. 전력 공급과 수요에 따라 요금제를 다양하게 만들고 이용자들이 생활 방식에 맞게 선택하게 해주면 어떨까. 전력 수요도 분산되고 소비자 부담도 덜어줄 수 있다.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커진 제주는 육지와 달리 낮에 전기요금이 싸다. 제주는 9월부터 시간대에 따라 요금을 달리하는 선택요금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제주도처럼 스마트 계량기를 보급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소비자 선택권을 박탈한 공급자 중심의 행정편의 전기요금 고지서를 뜯어고칠 때가 됐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7-07 03:00
[오늘과 내일/박용]영국이 골목사장님 MBA 보내는 이유미국 뉴욕 맨해튼 소호엔 2010년 창업한 온라인 안경점 ‘와비파커’ 뉴욕 본사가 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고 시력과 얼굴에 맞는 맞춤형 안경을 집으로 보내주는 ‘D2C(생산자 직접판매)’ 모델을 내놓아 성공한 혁신기업이다. 창업자들은 명문 경영학석사(MBA) 과정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경영대학원 재학생들이었다. 여행 중 안경을 잃어버렸다가 비싼 안경값 때문에 한 학기를 안경 없이 보낸 고통이 창업의 동기였다. 젊은 MBA 학생들의 도전이 독점기업이 장악한 미 안경시장을 바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정부가 사회적 타협제도인 ‘한걸음 모델’을 통해 온라인에서 도수 있는 안경을 살 수 있게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규제가 풀리면 소비자는 편해지고 시장은 더 커질 수 있으나 기존 안경점들은 와비파커 창업자들처럼 최신 기술과 MBA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도전자들과 경쟁해야 한다. 기존 사업자의 변화 의지와 혁신 역량이 없다면 규제 완화는 갈등을 부르고 한국 사회는 또 주저앉게 된다. 이런 점에서 골목사장님들을 ‘디지털 혁신 전사’로 키우려는 영국의 파격적 실험에 눈길이 간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은 서비스업종 상·하위 10% 격차가 독일 프랑스 미국에 비해 80% 이상 크다. 영세 서비스업종의 낮은 생산성이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억 파운드(약 3154억 원)를 투입해 3월부터 골목사장님들을 위한 12주짜리 미니 MBA 과정인 ‘성장을 위한 지원(Help to Grow)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경영역량이 높아지면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게 영국 정부의 분석이다. 미니 MBA 과정은 사업으로 바쁜 사장님들의 일정을 고려해 마케팅과 재무 등에 대한 2시간짜리 온라인 강의 8개와 강의실에서 배우는 MBA식 ‘케이스 스터디’ 4개 세션으로 구성된다. 여기에다 1 대 1 사업계획 멘토링, 동료 및 졸업생 교류 프로그램 등을 지원한다. 1년 이상 사업을 하고 있는 고용원 5∼249명의 중소사업장 경영자가 지원할 수 있는데,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등록금의 90%만 국가가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의 침체된 지역과 지방대학에도 기회다. 35개 영국 경영대학원들이 참여할 계획이다. 이미 10개 프로그램이 학생 모집을 시작했고 4곳은 정원을 채웠다. 영국 정부는 올가을부터 골목사장님들이 사업을 디지털로 전환할 수 있도록 온라인 무료 상담을 해주고 소프트웨어 구매비의 절반을 지원하는 사업도 시작한다. 영국의 파격 실험이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자영업 비중이 24.6%로 미국(6.1%), 일본(10.0%), 독일(9.6%)보다 훨씬 높고 영세 자영업자의 낮은 생산성, 지역과 지방대학의 침체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이 배울 점이 있다. 한국 자영업자들은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어렵다. 과거와 같은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는데 최저임금만 올리면 골목사장님들은 직원을 줄이거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고 다른 나라에서도 하지 않는 기본소득이나 전 국민 재난지원금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니 경영난을 겪는 자영업자들을 집중 지원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해법을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게 생산적이다. 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물고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당장은 필요해도 중장기적으로는 변화에 적응하고 도전에 응전하는 생존기술인 ‘물고기 잡는 법’을 전수해 주는 게 근본적인 해법이다. 영국은 그 길로 이미 들어섰다.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6-16 03:00
[오늘과 내일/박용]‘경제안보시대’, 오원철 수석이라면 어땠을까요즘 한국 산업정책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가 키를 쥐고 끌고 가는 모양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회의를 열고 삼성전자까지 불렀다. 한국 기업들로부터 44조 원 규모의 투자 약속까지 받아내고 ‘생큐’를 연발했다. 수천억 원의 소송비가 들어간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분쟁을 중재한 것도 바이든 대통령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서 법정다툼을 벌이는 데도 정부 관리들은 ‘기업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외면했다”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기업 간 분쟁에 정부가 일일이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국가 전략산업과 주력기업이 연루된 일은 다르다. 미국은 일자리와 미래산업 경쟁력이 걸린 사안으로 보고 대통령까지 팔을 걷고 나선 게 달랐다. 저쪽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나섰는데 우린 산업통상자원부 실장 주재 반도체 대책회의를 반복할 만큼 산업정책의 감도 떨어진다. 용인 반도체 공장에 산업용수를 대는 것도 개별 기업이 할 일이라고 뒷짐 지다가 뒤늦게 K반도체 전략에 끼워 넣었다. 반도체 인력도 향후 10년간 3만6000명 육성한다면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난감한 대학 내 정원 조정과 임시방편의 계약학과 신설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 산업정책이 잘 돌아갔다면 기업 투자가 쇄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2020년 국내 제조업의 해외직접투자(ODI)는 연평균 12조4000억 원,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는 4조9000억 원에 그쳤다. 한국 기업은 떠나고, 외국 기업은 이보다 덜 투자하니 매년 4만9000여 개, 10년간 총 49만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셈이고 지난해 실업률을 4.0%에서 3.7%로 낮출 기회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대한민국은 1960, 70년대 한정된 자원으로도 정부 주도 중장기 산업정책을 통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시장을 중시하고 국가 간 경계가 희미해진 세계화 시대엔 빛을 잃었지만 최근 경제와 안보를 연계한 자국 우선주의가 득세하는 ‘경제안보 시대’엔 정부 역할이 다시 중요해지고 있다. 산업부 전신인 상공부 출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끈 고(故) 오원철 대통령 제2경제수석이 기업 분쟁이나 전략산업 투자를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뭉개는 후배들을 봤다면 죽비를 쳤을 것이다. 5년 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산업을 시장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건 정부에서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말”이라며 “공업을 발전시킬 책임은 기본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1960년대 상공부 공업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를 거쳐 1970년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맡아 한국 중화학기업의 초석을 놓았다. 전략 산업을 위한 예산을 따로 마련하는 ‘목돈 전략’과 거점 지역에 기업들을 집중시키는 ‘클러스터 전략’으로 한국 산업을 일으켰다. 서울대 공대 출신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인 그는 산업부 후배 공무원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고 했다. 강연에 참석한 산업부 공무원 30여 명 중 이공계 출신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한 명에 불과했다. 그는 “전부 행정만 하는 사람들만 뽑아놓고 기술을 모르니까 나 같은 사람을 불러놓고 강의시키는 게 아니냐”고 화를 버럭 냈다고 한다. 경제안보 시대라는 지금은 산업과 기술을 아는 관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30일은 오 수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요즘 같으면 그의 통찰과 열정이 그리울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5-26 03:00
[오늘과 내일/박용]대한민국엔 ‘화이자’가 없다미국의 힘을 짧은 시간에 느끼려면 뉴욕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42번가를 따라 걸어 보라고 한다. 18세기 옥수수 밭이던 동쪽 끝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축인 유엔 본부가 들어섰다. 서쪽으로 더 가면 20세기 초 미국 자동차산업의 성장과 마천루 시대를 상징하는 크라이슬러 빌딩, 세계 최대의 철도역 그랜드센트럴터미널, 지식강국의 저력이 녹아 있는 뉴욕공공도서관, 뮤지컬 등 문화산업 거점 타임스스퀘어와 극장지구로 이어진다. 서쪽 끝 허드슨강변엔 미 국방력의 상징인 항공모함과 전투기, 우주기술의 결정체인 우주왕복선이 전시된 해양항공우주박물관(46번가)이 있다. 길 하나에서 세계를 수호하는 유엔, 지식을 지키는 도서관, 미국을 보호하는 항공모함,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우주왕복선을 모두 만날 수 있는 곳이 뉴욕 42번가다.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미국의 대표 제약사 화이자 본사도 이 길에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자 백신 개발에 착수한 지 9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접종까지 성공한 그 회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4월 한국파스퇴르연구소를 방문해 “치료제, 백신 개발만큼은 끝을 보라”고 당부하고, 우리 정부가 지원을 위한 범정부위원회까지 만들어도 안 된 일을 그들은 해냈다. 어떻게 했을까. 알베르트 부를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최근호에서 비결을 소개했다. 화이자는 지난해 3월 ‘메신저RNA(mRNA)’ 기술을 보유한 독일의 바이오엔테크와 손을 잡았다. 바이러스의 유전자 코드를 합성하는 백신 신기술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개발 기간을 단축한 것이다. 또 백신 후보 물질을 차례차례 테스트하는 기존 방식을 버리고 여러 후보를 동시에 연구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돈은 훨씬 더 들어도 시간은 아낄 수 있었다. 수조 원의 개발비가 들어가는 일인데도 미국과 독일 정부의 지원은 거절했다. 부를라 CEO는 “과학자들이 재무적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줬고 과도한 관료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했다. 정부 돈을 받지 않아 보고나 설명을 하느라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미 정부는 대신 최대 3년이 걸리는 임상 2상과 최대 4년이 걸리는 3상을 동시에 진행하게 해달라는 화이자의 요청을 들어줬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돈 때문만은 아니다. 부를라 CEO는 “민간 부문은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다. 사회 문제 해결을 정부와 공공 부문에 의존하는 우리에겐 생소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가 1962년 ‘대기업과 국가적 책임’ 논문에서 “대기업이 기술 혁신이나 사업 방식의 혁신에 더해 국가 정책의 혁신을 이끄는 역할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최근엔 경영전략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가 민간 기업의 창의적 혁신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도 성장하는 ‘공유가치 창출(CSV)’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에겐 당장 접종할 백신이 모자란 것도 문제지만 대대적인 투자와 혁신으로 사회 문제를 앞장서 해결하는 화이자와 같은 대기업을 키우고 존중하는 문화가 부족하다는 게 더 아쉽다. 민간의 창의성과 혁신을 국가 경영에 접목하고 그들을 국가 리더십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인식 전환과 사회적 합의 없이 미래 경쟁력은커녕 시민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시대다. ‘42번가의 기적’을 만든 화이자가 그 길을 보여준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2021-05-0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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