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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용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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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박용]돌아온 트럼프가 반도체 패권까지 쥘 때미국 반도체 회사 인텔이 ‘2030년 삼성을 제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위로 올라서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맛있는 밥을 지으려면 좋은 밥솥이 필요하듯이 첨단 2나노(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공정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려면 네덜란드 ASML이 만든 차세대 ‘하이 뉴메리컬애퍼처(High NA) 극자외선(EUV)’ 장비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이 장비가 연간 20대밖에 생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해 12월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ASML을 직접 방문하며 차세대 EUV 확보에 공을 들였건만 ASML은 미국을 선택했다. 업계 최초로 이 장비를 수중에 넣은 인텔은 연내에 1.8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양산하고 대만 TSMC와 한국의 삼성처럼 2027년 1.4나노 공정의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며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 선전포고를 했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아시아가 80%를 차지한 제조 비중을 서방 세계로 50% 가져와야 한다”며 “50년 동안 세계 정치는 석유가 어디서 나는지에 좌우됐다. 이제는 반도체가 주인공”이라며 강조한 건 반도체가 산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전쟁을 TSMC 삼성 인텔 등 기업 간 대결로 보고 반도체 지원을 “대기업 퍼주기”로 보는 미시적 시각으로는 미국이 법까지 만들어 반도체 투자 기업에 보조금을 퍼주고, 일본이 TSMC 공장 2곳에 10조 원을 지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때 제대로 된 보건 마스크조차 만들 공장이 없어 100여 년 전 스페인독감 때처럼 스카프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수모를 겪었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이 교란되자 신차 출고가 늦어지고 중고차 가격이 급등하는 걸 목격하며 세계 최강 미국의 아킬레스건이 어딘지를 절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1세기 편자’라는 반도체 산업 재건을 선언한 이면엔 제조업 붕괴에 대한 미국인들의 트라우마와 이를 극복하려는 강렬한 열망이 깔려 있다. 미국은 셰일가스 덕분에 2018년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은 2019년 중동에서 긴장이 고조되자 “우리가 왜 아무 보상도 없이 다른 나라들을 위해 해상 운송로를 보호해야 하는가”라며 “미국이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 됐기 때문에 그곳에 있을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중동 석유 의존도를 낮추는 ‘에너지 독립’을 선언하고 ‘신고립주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해 반도체 패권까지 쥔다면 더 거리낌 없이 미국 ‘우선주의’ 행보를 보일 수 있다. 대만에서는 반도체를 ‘실리콘 방패’로 부르고 세계 경제가 대만 반도체에 의존하는 한 중국의 무력 침공과 같은 양안 갈등을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미국도 대만에 친중 정권이 들어서는 걸 걱정한다. 하지만 미국이 반도체 독립에 성공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의 ‘대만 계산법’이 바뀌고 동아시아 안보지형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다. 미국 보수 성향 싱크탱크 헤리티지재단의 제임스 캐러파노 부회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미중 갈등은 ‘코끼리 싸움’ 성격이 강하다. 중간에 낀 작은 나라가 ‘잔디’처럼 밟혀 죽지 않으려면 잔디가 아닌 나무가 돼야 한다. 한국은 더 큰 나무가 돼야 한다”고 했다. 칩워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아무나 밟을 수 있는 잔디가 돼선 안 된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더 키우고 한미일 반도체 동맹도 더 단단하게 다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더 큰 ‘반도체 나무’를 키우고 있는가.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4-02-27 23:48
[오늘과 내일/박용]은행대출, 기본소득이 초저출산 대책이라니서울에 사는 30대 박모 씨는 둘째 아이를 원하는 아내와 갈등을 겪고 있다. 박 씨가 둘째를 반기지 않는 건 4년 전 ‘영끌’로 장만한 아파트 때문이다. 한 달에 400만 원씩 빚을 갚고 있는데 맞벌이를 포기하며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다. 박 씨의 출산 포기는 국가적으로 손실이지만, 그에겐 가족을 지키고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폭등한 집값은 청년들의 영끌 투자로 이어졌고, 우리 사회는 청년들을 부채의 늪에 빠뜨린 대가를 치르고 있다. 국토연구원은 “첫째 자녀 출산은 주택 매매 가격과 전세 가격, 초등학교 사교육비의 영향을 크게 받으며 둘째 자녀 이상 출산은 주택 매매 가격, 전세 가격과 함께 고등학교 사교육비의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집값 불안은 망국병으로 불리는 저출산 위기를 부채질할 수 있다. 정부가 주거 안정을 저출산 해결의 핵심 방안으로 인식한 건 다행이지만 청년들이 가려운 데를 제대로 긁어 주지 못한다. “아이를 낳으면 돈 빌려 준다”는 식의 대출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출산 가구 주거 안정 예산 9조 원의 대부분이 주택 구입이나 전세 자금을 대출해 주는 데 들어간다. 청년들이 원하는 건 집이지 대출이 아니다. 집값이 크게 오르지 않았을 때는 정부의 저금리 대출이 큰 도움이 되지만 연 소득의 15배가 넘는 서울 집값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박 씨처럼 집이 있어도 은행 대출이 많으면 아이를 더 낳거나 정상적 소비 생활을 하기 어렵다. 지난해처럼 정책대출이 집값을 다시 밀어올리기라도 하면 청년들은 더 큰 빚을 내야 한다. 선의로 내놓은 대출 지원이 출산의 장애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주거 대책의 추를 대출 지원에서 장기임대주택 등의 공급 대책으로 옮겨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제안한 ‘출생기본소득’은 대선 공약인 기본소득을 ‘저출생’ 대책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세금으로 나눠주는 기본소득 역시 공짜는 아니다. 아이들이 커서 갚아야 할 나랏빚으로 쌓인다. 출생아가 늘어날수록 국가 재정 부담이 증가하는 구조여서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이 대표는 “재원이야 앞으로 마련해 나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덮어놓고 시작부터 하자는 건 그 빚을 갚아야 할 미래 세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초저출산(합계출산율 1.3명 이하)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 도시화율이 높은 아시아 유교문화권이 공통적으로 직면한 과제다. 경쟁적 문화에서 교육을 오래 받을수록 더 나은 보수를 받는다. 여성의 사회 진출도 늘고 있다. 결혼과 출산은 늦어진다. 일자리는 빠듯하고 집값은 껑충 뛰어 양육 비용은 불어나고 있는데 과거처럼 자녀에게 노부모 봉양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서울과 같은 대도시 청년들은 ‘출산 연기’나 ‘출산 포기’라는 나름의 합리적 선택을 한다.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정부의 저출산 대책이 시작되기 전인 2005년 0.932명으로 전국 평균(1.085명)보다는 약간 낮고 부산(0.887명)보다 높았다. 지난해엔 0.593명으로 전국 평균(0.778명)보다 한참 낮고 부산(0.723명)보다도 더 떨어졌다. 17년간 약 300조 원을 온 나라에 쏟아부었는데도 서울이 초저출산의 진앙이 됐다. 역대 서울시장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공급하고, 안정된 집값과 저렴한 장기임대주택을 제공하며, 합리적 비용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편리한 양육 인프라를 마련해 줬다면 지금과 같은 국가적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대출 진통제’와 ‘표지갈이 기본소득’으로 결혼과 출산을 망설이게 하는 ‘3대(일자리, 주거, 보육) 불안’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청년들이 이제 더 잘 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4-02-06 23:45
[오늘과 내일/박용]소방영웅 6명을 기억하는 데 걸린 23년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주변을 지날 때면 23년 전 취재 기억이 떠오른다. 2001년 3월 4일 새벽 서울엔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강풍과 영하의 날씨에 큰불이 여러 곳에서 났다. 강남구 세곡동 비닐하우스에선 잠을 자던 일가족 10명이 화재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날 새벽 홍제동에서는 방화로 일어난 화재를 진압하러 들어간 서부소방서 소속 6명의 소방관(김기석 김철홍 박동규 박상옥 박준우 장석찬)이 무너져 내린 낡은 건물 내부에서 순직했다. 단일 화재로 가장 많은 소방관이 순직한 사고였다. 이날 오후 9시 취재 지시를 받고 박동규 소방장과 김기석 소방교의 시신이 안치된 세란병원으로 달려갔다. 장례식장에서 “고인에 대한 예의”라며 기자에게 술잔을 권하던 한 젊은 소방관은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데도 어쩌지 못했다. 죽어야만 (소방관에게) 관심을 갖는 세태가 무섭다”고 서러워했다.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란 고인은 아이들을 무척 좋아했고 대학을 다니며 야학 활동을 했던 따뜻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날 동료를 잃은 소방관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슬픔을 밤새 토해냈다. 시간이 흘러도 살아남은 소방관과 유족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대형 화재가 나면 부상 소방관 지원이나 순직 소방관 예우가 거론되지만 그때뿐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힌다. 홍제동 소방영웅 6명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도 최근 일이다. 서대문구가 그들이 순직한 홍제동 통일로 주변 길을 ‘소방영웅의 길’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며서 잊힌 이름을 23년 만에 다시 듣게 됐다. 한국은 제복 입은 영웅들의 희생을 기리는 데 인색하지만, 미국 도시에는 시민을 위해 순직한 영웅의 이름을 딴 도로, 다리, 공공건물이 많다. 뉴욕에선 2001년 9·11테러로 세계무역센터에서 숨진 소방관 343명을 기리기 위해 소방관들이 뛰어 올라갔던 110층 계단을 따라 오르는 계단오르기 행사가 지금도 매년 열린다. 순직 소방관의 영결식은 지역 방송사가 생중계한다. 미국 사회에서 시민을 지키는 제복 입은 영웅은 존중과 예우의 문화 속에서 오랜 시간 양성된다. 영웅을 오래 기억하는 사회에선 재난 전쟁의 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 정신이 살아 숨쉰다. 2일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해상보안청 수송기와 충돌해 불이 붙은 여객기에서 18분 만에 379명이 모두 무사히 탈출했다. 이날 모든 승객과 승무원을 내보내고 마지막으로 기내를 빠져나온 이가 기장이었다. 대형 화재 현장을 본 사람들은 넘실거리는 화염과 열기, 뭔가 펑펑 터지는 큰 소리에 압도되고 만다. 23년 전 홍제동의 소방관들도 그랬을 텐데 “아들이 집에 남아 있다”는 집주인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화마 속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동료와 유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는데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데만 23년을 허비했다. 다른 한편에선 공직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장관이 취임 석 달 만에 총선 출마를 위해 물러나는 ‘속도 경쟁’이 벌어진다.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진 검사가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한다’는 검사 선서의 다짐이 무색하게 사표 한 장 던져 넣고 정치판으로 직행한다. 천금처럼 무거운 공직의 무게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여태 법을 만들고 지키는 최고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니 정작 시민 곁에서 마지막까지 소명을 다한 제복 입은 영웅들은 홀대를 받는다. ‘소방영웅의 길’ 위에서 우리가 다짐할 차례다. 한 사회를 지키는 제복 입은 영웅은 우연히 등장하지 않는다고.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4-01-16 23:48
[오늘과 내일/박용]결혼 증여 3억, ‘현대판 지참금’ 안 되려면지난해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사려면 연간 소득의 15배를 쏟아부어야 한다. 올해 서울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0억 원이 넘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층(15∼39세)의 연간 평균소득은 2781만 원인데, 이렇게 큰돈이 어디서 나오나. 집 장만할 생각하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일이 막막하다.그러니 청년들 사이에서 ‘결혼 파업’이니 ‘출산 파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해서 번 돈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뛴 집값을 대려면 은행 대출을 받거나 부모에게 손을 벌려야 한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매년 ‘청년 지원대책’으로 포장한 정책 대출을 쏟아내고 있다. 젊어서 낸 빚은 늙어가면서 갚아야 할 짐이다. 지난해 집이 있는 청년의 대출잔액(중앙값)은 1억4150만 원으로 중장년층(1억196만 원)과 노년층(5000만 원)보다 더 많다. 대출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정부가 요즘 눈독을 들이는 건 부모의 자산이다. 정부는 결혼이나 출산 전후 2년간 최대 1억 원까지 증여재산을 비과세해 주는 ‘결혼출산 증여재산 공제’ 제도를 내년부터 시행한다. 신랑과 신부가 각각 기존 자녀 증여공제 한도 5000만 원에 결혼 증여재산 공제 1억 원까지 더해 양가에서 최대 3억 원까지 비과세 증여를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다 정부가 푼 정책 대출까지 받아 무섭게 뛴 집값을 감당하라는 건데, 이러다 보면 청년들을 빚의 노예로 만들고 부모 세대의 노후자산까지 위협할 수 있다. 우리보다 앞서 2015년 혼인 육아 증여자금 공제를 도입한 일본은 가계자산의 63%가 금융자산이다. 부모 세대의 자산 이전이 우리보다 수월하다. 한국 가계는 금융자산 비중이 35.6%에 불과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40세 미혼자녀 1인을 둔 가구 중 결혼 증여공제 한도 1억5000만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가구는 전체의 27%에 그쳤다. 게다가 한국에선 결혼과 출산 전후 2년 이내에 증여를 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한국 ‘가시고기’ 부모들의 상당수는 주어진 기간에 증여세 공제를 받기 위해 집을 내놓거나 금융회사 대출이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결혼 증여재산 공제가 부모 세대의 노후까지 위협하는 ‘현대판 결혼 지참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더 정교해져야 한다. 증여 목적을 결혼 출산에서 일본처럼 육아까지 확대하고 ‘2년’이라는 증여 시점 제한도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부모들이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급하게 증여할 돈을 마련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일본은 18∼50세 자녀에게 결혼 출산 육아 자금을 비과세 증여할 수 있도록 자녀 나이를 제한한다. ‘출산 장려’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면 자녀의 소득 요건과 증여재산 사용처에 제한을 둬야 불필요한 ‘부자 감세’ 논란도 없어진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여론조사에서 혼인 증여공제 제도에 부정적인 응답자의 절반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은 정책과 무관하게 의사결정을 한다”고 답했다. 출산 인센티브가 안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은 자녀들이 은행 등에 결혼 육아자금 계좌를 개설하고 증여 자금을 신탁 방식으로 관리하게 한다. 자금을 인출하면 결혼 출산 육아 목적으로 썼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해야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자녀 연소득이 1000만 엔을 넘으면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한국의 증여세 최고세율(50%)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본(55%)에 이어 2번째로 높다. 자녀 증여공제 한도(5000만 원)는 5번째로 낮다. 세금으로 집값 잡으려다 누더기 부동산 세제를 만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출산 장려를 위한 일회성 세제 지원 대책 말고 이참에 경제 상황에 맞게 증여, 상속세에 대한 근본적 개혁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12-26 23:45
[오늘과 내일/박용]서민을 은행 종노릇 시킨 건 누구인가“이젠 땅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 가도 세금을 내라는 건가.” 서울시청 근처 은행나무에 붙은 정당의 ‘은행 횡재세’ 현수막을 본 한 시민이 농담처럼 말했다. 은행이 초과 이익을 거두면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자는 ‘은행 횡재세’ 개념은 그만큼 낯설다. 은행(銀行)을 은행(銀杏)으로 오해한 시민이 정치권의 ‘여의도 사투리’엔 조금 어두울지 몰라도 ‘횡재세(windfall tax)’ 개념은 훨씬 잘 이해하고 있다. ‘windfall(횡재)’은 바람에 떨어진 과실이라는 뜻이 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횡재세와 연결시킨 건 상식에 부합한다. 유럽의 횡재세 개념도 비슷하다. 원유가 콸콸 쏟아지는 유전을 소유한 정유회사가 갑자기 유가가 올라 큰돈을 벌면 우연히 횡재한 거니 추가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중동에서 원유를 사다가 정제해 석유제품을 판매하는 한국의 정유사들의 사정은 다르다. 금융당국이 대출과 사업 규제를 틀어쥔 한국 은행들의 이자 수익이 우연히 떨어진 낙과와 같은지 따져봐야 할 게 많다. 첫째, 은행 이자 장사의 책임 소재다. 이자 수익의 근원은 대출이고, 대출 규제는 당국이 쥐락펴락한다. 언젠가부터 서민과 청년 대책엔 정책 대출도 빠지지 않는다. 은행의 ‘횡재’가 문제라면 국내총생산(GDP)보다 많은 가계빚을 풀어 은행을 배불린 역대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대출 포퓰리즘’ 책임도 반드시 함께 물어야 한다. 둘째, 한국 은행이 이자 장사에 매달리게 한 규제 환경이다. 은행은 이자 외의 수수료 수입을 위해 주가연계증권(ELS) 등 투자 상품을 판매한다. 그러다가 투자자 손해가 생기면 불완전 판매 논란이 불거지고, 은행이 손실을 떠안는 일이 되풀이된다. 이번에도 금융감독원은 고령자에게 ELS를 판매한 은행 탓부터 했다. 단지 고령자에게 판매한 게 문제라면 세계적 투자자인 93세의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에게 판매한 투자 상품도 불완전 판매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감독당국은 그간 뭐했나. 되풀이되는 불완전 판매 논란이 해소되지 않으면 은행의 ‘이자 장사 중독’은 횡재세로도 막지 못한다. 셋째, 은행 이자 수익은 ‘무위험 횡재’가 아니다. 당국이 연장해준 대출 만기가 언젠가 돌아오고 대출자가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 손실이 커질 텐데 어디까지를 초과수익으로 볼 건가. 지금은 횡재세를 걷고 그땐 세금으로 손실을 채워주겠다는 건가.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의 클라우디아 부흐 부총재는 지난달 “지금은 은행의 회복 탄력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전년 동기 대비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린 독일 은행들에 충당금을 더 쌓으라고 요구했다. 정치적 횡재세보다 금융적인 접근이다. 횡재세 대신 ‘대출 금리를 깎아주자’는 당국의 상생금융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은행이 이자 장사로 돈을 벌었다면 예금이자를 낮게 줬거나 대출이자를 너무 높게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대출금리를 자극할까 걱정해 은행들에 “지나친 수신 금리 경쟁을 자제하라”고 한쪽 편을 들었다. 예금자에게 줄 이자를 줄여 대출 이자를 낮춰주더니, 다시 은행이 번 수익을 빼서 대출자의 금리를 깎아주는 게 상생금융은 아니다. 고금리로 신음하는 서민을 위한 금융지원은 필요하지만 예금자 부담으로 대출자의 손실을 사회화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금리로 어려운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을 보며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서민이 은행 종노릇을 하는 일을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그간 방만하게 관리한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부터 줄여야 한다. 자영업자들이 은행 빚을 내지 않고 신나게 장사할 수 있게 괜찮은 일자리와 경제부터 살려야 한다. 새로 짜이는 윤석열 정부 ‘2기 경제팀’이 은행 탓만 해선 할 수 없는 일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12-05 23:48
[오늘과 내일/박용]대도시 경쟁력, 미국 텍사스처럼요즘 미국 텍사스가 잘나간다. 텍사스가 미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월드시리즈에서 창단 62년 만에 우승해서 하는 얘긴 아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내놓은 ‘2023년 사업하기 좋은 미국 도시’ 상위 10위의 절반이 휴스턴(1위) 플래노(3위) 어빙(4위) 댈러스(5위) 오스틴(7위) 등 텍사스 도시다. 20위권에 댈러스-포트워스 대도시권 5개 도시가 포진했다. 거점도시인 메가시티와 주변 도시가 분업체계를 갖추고 전 세계 기업 투자를 끌어오는 ‘텍사스판 메가시티리전(Megacity Region·초광역경제권)’의 힘이다. 텍사스 주도인 오스틴은 테슬라와 델, 삼성전자가 있는 남부의 ‘테크허브’이며 북쪽의 댈러스는 텍사스 경제를 굴러가게 하는 ‘금융허브’다. 댈러스에서 차로 3시간 남짓 떨어진 남쪽엔 포천 500대 기업 중 26곳을 보유한 휴스턴이 있다.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간판 기업인 HP가 지난해 이곳으로 이전한 건 이 도시가 왜 사업하기 가장 좋은 곳인지 보여준다. 남부 특유의 사투리와 석유, 카우보이의 고장쯤으로 알려진 텍사스는 어떻게 최고가 됐을까. FT에 따르면 텍사스는 자유방임적 기업 환경에 연방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 등의 보조금을 활용한 인센티브 패키지로 기업 투자를 빨아들이고 있다. 주 정부는 기업과 개인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생활 물가도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LA)와 같은 동·서부 대도시보다 훨씬 낮다. 덕분에 2000년 이후 텍사스 인구가 900만 명 이상 늘었다. 경제 규모는 3배로 커져 한국 이탈리아보다 큰 세계 8위권으로 성장했다. 남부의 텍사스가 공급망 재편기에 뜨고 있는 메가시티리전 모델이라면 서부의 캘리포니아는 자본 인재가 국경을 넘나들며 도시 단위로 경쟁했던 과거 세계화 시대의 성공 모델이다. 캘리포니아는 이번 조사에서 20위권 도시에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LA는 37위로 10계단 떨어졌다. 높은 집값과 생활비, 무거운 세금, 까다로운 기업 규제에 지친 기업들이 텍사스나 플로리다로 떠나고 미중 갈등으로 중국 등 외국인 투자마저 감소하면서 순위가 추락했다.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여야 정치인들이 외치는 ‘한국판 메가시티’ 비전은 뭔가. 서울 인구가 주는 건 높은 집값과 생활비에 지친 시민들이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김포가 서울에 편입돼 집값이 오른다면 누군가는 더 싼 집을 찾아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메가시티를 베드타운 확장이나 부동산 정책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 서울이 뉴욕보다 작다고 하는데 뉴욕은 자치구가 5개(맨해튼, 퀸스, 브롱크스,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다. 서울은 구청장 25명에 각각 구의회까지 두고 있다. 주민의 삶은 광역화하고 도시는 연담화하고 있는데 우리 지방 행정은 지나치게 분절적이고 기능적으로 단절돼 있다. 메가시티 근간은 거점도시와 주변 도시를 1시간 내로 연결하는 광역교통망이다. 서울 경기 인천의 단체장들이 대중교통 정기권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칸막이 행정’을 하고 ‘김포 지옥철’ 해법도 제대로 못 내놓으면서 ‘메가서울’은 무슨 수로 만드나. 민간 투자가 빠진 지방 메가시티 논의도 알맹이가 빠져 있다. 정부가 혁신도시를 건설하고 공공기관을 강제로 옮겨놨지만 지방소멸 위기는 가시지 않는다. 지역 거점도시는 쇠락하고 있다. 미 실리콘밸리나 애리조나 반도체벨트는 스탠퍼드대나 애리조나대와 같은 지역 명문대가 투자와 인재 유치의 구심점이다. 지방 명문 국립대조차 모멸적 대접을 받는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메가시티는 국가 경쟁력 재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주민의 삶과 행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기업 투자와 인재를 끌어올 수 있어야 성공한다. 텍사스는 그 길을 가고 있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11-14 23:45
[오늘과 내일/박용]쿠팡은 ‘아마존 위기’ 피할 수 있나소비자들이 제품이나 서비스를 싸게 이용할 수 있다면 네이버 카카오 쿠팡 배달의민족과 같은 디지털 플랫폼의 확장과 독점을 막을 명분이 있나. 섣불리 반독점 규제를 했다가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건 아닌가. 그간 빅테크(대형 기술기업)의 보호막이 되어 준 이 같은 ‘반독점의 역설’에 대한 대안을 찾으려면 미국 경쟁 당국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회사인 아마존 간 ‘세기의 소송’을 지켜봐야 한다.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는 리나 칸 위원장이 이끄는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지난달 말 마침내 아마존을 상대로 반(反)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예일대 로스쿨을 다니던 28세의 칸 위원장이 “현행법으로는 아마존의 교묘한 약탈적 가격 정책을 막을 수 없다”며 반독점법의 맹점을 지적한 ‘아마존 반독점 패러독스’ 논문을 발표한 지 6년 만이다. FTC는 이번 소송에서 아마존이 독점력을 불법적으로 이용해 자사 플랫폼에서 수십만 명의 판매자를 착취하고, 경쟁자를 방해하고, 소비자에게 과도한 비용을 부담시켰다고 주장했다. 아마존은 “사실과 다르다”며 맞서고 있다. 소송 결과에 따라 어느 한쪽은 치명타를 입는다. 법원이 아마존의 손을 들어주면 칸 위원장의 명성이 추락하고, 디지털 플랫폼과 빅테크에 대한 경쟁 당국의 규제 칼날은 크게 무뎌진다. FTC가 이기면 아마존은 최악의 경우 1980년대 AT&T처럼 기업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또 빅테크 독과점에 비교적 관대한 자유방임적 반독점법 기류가 바뀌고 디지털 경제의 판이 흔들릴 수 있다. 미 전문가들이 이번 소송을 두고 “세대적 변화(generational change)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한 이유다. 아마존은 사업 초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가격을 낮춰 소비자를 모으고 입점하는 판매자를 늘렸다. 규모가 커지고 효율성이 높아지면 고정비용이 낮아지고 가격은 떨어져 고객을 더 모을 수 있다. 이런 식의 ‘플라이휠(외부의 힘 없이 관성으로 회전력을 유지하는 자동차 부품) 전략’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6년간 벼르던 칸 위원장이 소송의 칼을 빼든 건 저렴한 가격으로 몸집을 불린 아마존이 이제는 지배력을 활용해 소비자와 판매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뜯어오는 ‘추출(extraction) 모드’로 들어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칸 위원장의 임기는 내년 9월에 끝난다.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애플 등과의 싸움에서 연거푸 진 그가 아마존이라는 거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기업을 공격하는 건 정치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부담도 크다. 아마존을 지켜주는 수호신은 결국 세계 최고의 로펌이나 변호사가 아니라 기업을 사랑하는 소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국내에선 아마존 플라이휠 전략을 따라 하며 몸집을 빠르게 불린 대표적 플랫폼이 쿠팡이다.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은 8월 역대 최고 2분기(4∼6월) 실적을 발표하면서 “플라이휠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쿠팡은 아마존처럼 물건을 사고파는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하며 판매자에게 물류 서비스도 제공한다. 아마존 프라임 서비스와 유사한 와우 멤버십 제도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쿠팡 플레이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이 늘어나자 지난해 멤버십 비용도 2900원에서 4990원으로 올렸다. 올해는 창업 이후 처음으로 연간 기준 흑자를 기대하고 있다. 보기에 따라 쿠팡도 ‘추출 모드’로 들어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쿠팡은 한국 유통업계의 판을 바꾸고 있다. 동시에 “미국 국적 창업자가 아마존을 따라 하며 한국에서 큰돈을 벌고 있다”는 눈총도 맞는다. 그런 쿠팡이 아마존과 같은 위기에 몰릴 때 수호신 역할을 할 소비자들은 얼마나 될까. ‘플랫폼은 돈이 벌리기 시작할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는 걸 창업자들이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봤으면 한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10-25 00:09
[오늘과 내일/박용]놀랍지도 않은 북의 ‘아시안게임 표변’중국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보인 북한 선수단의 행동은 201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남북 단일팀의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에겐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단일팀 유니폼을 입고 함께 땀을 흘렸던 그들이 5년 만에 딴사람이 됐다. 한 팀으로 뛰었던 북 여자농구 선수들은 우리 선수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사격에서 우리 선수에게 져 은메달에 머문 북 선수들은 시상대에서 함께 사진조차 찍길 꺼렸다. 북 선수단 관계자는 뜬금없이 기자들에게 정식 국호로 불러 달라고 몽니를 부렸다. 그러면서 북 주민들에게 틀어준 중계 영상에선 우리를 ‘괴뢰’라고 불렀다. 북한의 태세 전환은 의도적이니 우리끼리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 5년 전 북-미 협상 국면에서 열린 직전 대회의 ‘북한’ 이미지를 지우려는 ‘낯설게 하기’ 선동이며, 국제적 관심이 쏠리는 아시안게임에서 남과 북이 갈라섰다는 걸 강조하고 한반도 긴장 상황을 세계에 주지시키려는 선전 술책이다. 우리에게 ‘북측’이 아닌 정식 국호를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이젠 같은 민족이 아니라 ‘남남’으로 생각하라는 협박성 설정이다. 그들에게 피를 나눈 민족 개념은 김정은 정권이 지배하는 그들의 ‘조국’보다 낮은 하위 개념이며, 선전선동을 위해선 언제든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전술적 도구일 뿐이다.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데, 돌이켜보면 그들은 그랬다.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됐던 2017년 뉴욕 특파원에 부임한 뒤 만난 북한 외교관들은 우리 기자들의 간단한 질문에도 입을 열지 않던 얼음장 같은 이들이었다. 2018년 북-미 협상 국면에선 지령이라도 받은 듯이 달라졌다. 먼저 말을 걸고 귀임 날짜나 가족 관계와 같은 사적인 질문도 던졌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우리 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와인잔을 기울였다. 북-미 협상이 결렬되자 그들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 1년 만에 말도 섞기 싫은 원수처럼 대하다가 살가운 혈육을 만난 것처럼 돌변할 수 있는 게 그들이다. 북한의 변덕스러운 행동 뒤엔 변하지 않는 진심도 있다.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소속 김인철 서기관은 유엔총회장에서 “개는 짖어도 마차는 간다(The dog barks, but the caravan moves on)”며 “위협에 단호히 대응하고 해야 할 일을 계속하겠다”고 발언했다. 핵과 ICBM 개발을 멈추지 않겠다는 위협이었다. ‘개는 짖어도∼’ 표현은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관련한 북-미 협상장에서 북측 대표 강성주가 미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에게 썼던 말인데 핵실험과 ICBM 발사로 북-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인 2017년에도 등장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로켓맨”으로 지칭하며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유엔총회 연설을 위해 뉴욕에 온 리용호 북 외무상은 기자들 앞에 서서 “개들이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말이 있다. 개 짖는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하려 생각했다면 그야말로 개꿈”이라며 응수했다. 북한이 30년 넘게 ‘개가 짖어도 마차는 간다’며 마이웨이를 고수할 수 있게 시간을 벌어준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오락가락한 한미의 대북 정책이었다. 내년 11월 미 대선에서 한미 동맹을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따지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이 나오는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와 밀착하며 2017년 한반도 긴장 상태로 시곗바늘을 되돌리려는 건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가을이 오면 표범의 털이 아름답게 변해 ‘표변(豹變)’이라고 하는데, 필요하면 민족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북의 표변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10-03 23:45
[오늘과 내일/박용]국회의원, 주식-코인 거래할 때마다 공개해야‘코인 투자’ 논란으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남국 의원(무소속)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 징계는 없었다.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가 ‘제명’을 권고했지만, 지난달 말 윤리특위 무기명 표결에서 제명안이 부결됐다. 여야가 석 달 넘게 정치 공방을 벌이고도 시비를 명쾌하게 가리지 못해 국회가 국민만 피곤하게 만들었다. 국민의 눈높이에선 의원이 상임위원회나 본회의 도중 코인 거래를 수시로 한다는 건 용납하기 어려운 근무 태만이다. 거액의 코인을 보유하고도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발의하면 이해 상충을 의심하게 된다.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에 따르면 가상자산 보유 및 거래 내역을 신고한 여야 의원 11명 중 8명이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투자 액수로 1000만 원 이상, 거래 횟수로 100회가 넘어 이해충돌 소지가 있는 것으로 자문위가 판단한 의원들만 최소 5명이다. 김 의원 한 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선에서 어물쩍 끝날 일이 아니다. 공직자윤리법의 허점(loop-hole)과 의원 자기규제 문제(self-regulatory problem)를 보완하는 후속 조치가 없다면 ‘제2의 김남국 사태’가 어느 당에서나 재연될 수 있다. 의원과 고위 공직자 비리를 막으려면 사전 규제와 사후 처벌이 필요하다. 사후 처벌이 엄하면 사전 규제는 상대적으로 느슨해도 감시할 수 있다. 하지만 선례를 볼 때 국회에 엄정한 사후 처벌을 기대하긴 어렵다. 결국 사전 감시를 지금보다 훨씬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이해 상충을 감시하기 위해 국회의원이나 1급 이상 고위 공직자의 재산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제도가 30년째 운영 중이지만 1년에 한 번 재산 현황과 변동 내역을 사후 공개하는 식이다. 이렇게 해서는 상임위에서 수백 차례 코인을 거래하는 근무 태만이나 거래 시점에서 이해 상충이 있었는지를 제때 감시하기 어렵다. 우리와 달리 미국 의원들은 주식이나 코인을 거래하면 45일 이내에 홈페이지 등에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의원들이 떳떳하다면 미국처럼 주식이나 코인을 거래할 때마다 투명하게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행정편의적 재산 공개 방식도 이제는 수요자 눈높이에 맞게 고쳐야 한다. 지식의 단계는 데이터(data), 정보(information), 지식(knowledge)의 순으로 고도화된다. 가공 전의 날것 수치인 재산 데이터에 약간의 설명을 붙여 접근성이 떨어지는 관보나 공보에 PDF 문서로 올려놓는 식은 “마지못해 공개한다”는 인상을 준다. 또 행정부 공무원은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국회의원은 국회공직자윤리위원회, 법관은 대법원공직자윤리위원회 등으로 기관별로 공개해 찾아보기 불편하다. 국민이 정말로 원하는 건 한곳에서 편안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알기 쉽고 유의미하게 가공된 2차 데이터다. 이런 게 국민 눈높이에 맞는 ‘디지털 플랫폼 정부’ 서비스다. 더 나아가 주식이나 코인과 같은 직접투자 외에도 의원들의 펀드 등 간접투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때가 됐다. 미국에서는 인도와 무역협상 개시를 촉구하는 등 친인도 행보를 보인 스티브 데인스 상원의원(공화·몬태나)이 인도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에 10만 달러 이상을 투자한 게 알려지면서 의원들의 업종이나 국가에 특화된 펀드 투자도 감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국내에서도 방문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후보자가 2억 원 규모의 2차전지 벤처펀드를 보유한 것을 두고 야권에서 이해 상충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최근 금융감독원의 발표로 논란이 된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라임펀드 환매도 의원이 펀드 거래를 할 때마다 공개하게 했다면 4년이 지난 지금 뒤늦게 특혜 시비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9-12 23:48
가계부채, 이젠 전 정부 탓만 못 한다[오늘과 내일/박용]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1월 금융계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거시금융정책 책임자 4명이 ‘F4’를 이뤄 원팀 정신으로 위기 극복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금융(Finance)’ 정책을 담당하는 자신과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 4명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등장한 꽃미남 4총사 ‘F(Flower) 4’에 빗댄 조어인 듯한데,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한국 금융시장의 현실은 드라마처럼 풋풋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다른 나라들은 긴축 과정을 거치며 가계부채 규모를 줄이거나 유지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집값 폭등을 통제하지 못한 한국은 역주행을 했다. 작년 4분기(10∼12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105%로 주요 43개국 중 세 번째로 높다. 민심은 지난 대선에서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지게 만든 부동산 실정의 책임을 물었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증가세가 꺾였던 가계부채가 올 2분기(4∼6월) 증가세로 전환했다. 올 들어 7개월간 은행권에서 주택담보대출(전세자금대출 포함)이 약 22조 원 불어났다. 과거보다 금리가 높은 상황에서 늘어난 대출이어서 경제에 미칠 독성은 더 심각하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을 빼면 모두 금융 베테랑들인 F4답지 않은 실책이다. 정부 기관의 대출 보증은 원래 신용이 낮은 중소기업이 돈을 빌리기 쉽게 지원하는 정책금융 성격이 강했다. 요즘은 주택 시장을 떠받치는 지지대로 변질되고 있다. 부동산 대출 보증은 공적보증 잔액(869조 원)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주택담보대출 외에 전세보증금을 빌려주는 전세자금대출이 늘어나더니 전세금을 못 돌려주는 주인을 위한 역전세대출까지 만들어졌다. 집 한 채를 놓고 세입자와 집주인이 정부 보증을 낀 ‘대출 돌려막기’를 하게 만든 셈이다. 정부는 부동산과 대출 규제를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주택시장에 흥을 돋우는 ‘클럽 DJ’ 같은 역할을 했다. ‘부동산 시장 정상화’를 명분으로 1월 서울 강남 3구와 용산구를 제외한 부동산 투기 규제를 해제한 ‘1.3 대책’을 내놓고 9억 원 이하 주택에 대해 최대 5억 원까지 대출해주는 특례보금자리론을 풀었다. 검사 출신 금감원장은 은행 현장을 돌며 금리 인하까지 압박했다. 이렇게 풀린 대출이 서울 및 수도권 주택시장으로 흘러 들었다. 대출이 풀리고 집값이 다시 꿈틀거리면 소득으로 집값을 따라잡기 힘든 청년들이 동요할 수밖에 없다. 올해 상반기 전국 아파트 매매 건수의 31.3%가 30대 이하가 사들인 집이다.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금융이 가계대출 증가의 원인”이라는 비판에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그것도 안 하면 젊은 분들이 힘들어질 것”이라고 옹호했다. 거리에 나가 청년들에게 물어보라. 대출이 안 나와서 어려운 건지, 대출을 받지 않으면 사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뛴 집값 때문에 더 걱정인지. 집값과 전세금이 2배 오르면 조혼인율(1000명당 혼인 건수)이 각각 0.33건, 0.19건 하락한다거나 집값이 10% 오르면 합계출산율이 0.2명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다. 무리하게 빚으로 떠받친 집값은 소비 위축과 금융시장 불안을 키우고 한국 경제의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중국 경제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도 부동산 시장에 풀린 빚을 제때 통제하지 못한 후폭풍이다. 위기 땐 ‘원팀 정신’이 중요하지만 필요할 땐 목소리를 내야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지지 않는다. 고삐가 풀리고 있는 가계빚 증가세를 잡지 못하면 금융 F4는 거품이 터질 때 가계부채를 방치한 ‘F(Failure·실패) 4’로 기억될 것이다. 전임자를 탓할 시기는 한참 지났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8-23 00:00
[오늘과 내일/박용]‘진보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일들지난달 타계한 재즈의 거장 토니 베넷은 1963년 ‘아이 레프트 마이 하트 인 샌프란시스코(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로 올해의 레코드 상을 받았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베넷은 고독한 맨해튼보다 케이블카가 밤하늘의 별을 향하듯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서늘한 아침 안개가 가슴속에 스며드는 서부 해안의 샌프란시스코에 마음을 빼앗겼다. 말년에 알츠하이머로 투병했던 베넷은 그토록 사랑한 도시가 범죄와 마약의 온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미 실리콘밸리에서 살던 지인이 최근 한국을 다녀가면서 들려준 샌프란시스코 얘기는 듣고도 믿기 어려웠다. 해외 관광객이 늘고 있다지만, 도심 상점에선 좀도둑이 대낮에 보안요원이 보는 앞에서 물건을 훔쳐 당당하게 문을 나설 정도로 치안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는 “1000달러 미만 절도는 기소하지 않는 법이 생겨 좀도둑이 늘고 있다”며 “노숙자가 넘쳐나고 대놓고 마약을 거래하는 중독자들이 많아 가족과 함께 놀러 가기 겁난다”고 했다. 현지 언론의 지적도 다르지 않다. CNN은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약국 체인을 취재하는 30분간 3건의 절도를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매장은 상품을 진열한 선반에 자물쇠를 달고 음료수가 담긴 냉장고 문은 직원 도움 없이 열지 못하게 쇠사슬까지 묶어뒀다. 미국 대도시 중 필라델피아 다음으로 마약 관련 사망률도 높다. 공원에서 놀던 10개월 아이가 누군가 버린 펜타닐을 입에 넣었다가 생사를 오가는 비극이 벌어진다. 범죄와 경제는 상극이다. 미 서부의 금융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뉴욕, 일본 도쿄 다음으로 백만장자가 많다. 범죄가 무서워 상점과 백화점이 문을 닫고 부자와 중산층이 차례로 떠나면 도시엔 떠날 곳이 없는 가난한 이만 남는다. 부동산이 폭락하고 세수가 줄어 경찰 소방 등 도시 핵심 기능도 무너진다. 디트로이트와 뉴욕의 할렘 등 슬럼화된 도시들이 겪은 이 ‘파멸적 고리(doom loop)’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젊은이들이 찾는 슈퍼인 홀푸드마켓은 샌프란시스코 거점 매장을 닫았다. 중심가인 유니언스퀘어의 고급 백화점 노드스트롬도 30여 년 만에 문을 닫는다. 미국의 도시학자인 제인 제이컵스는 “가게 주인들은 거리 안전의 직접적 이해당사자이자 감시자이며 관리인”이라고 말했다. 상점이 사라지면 거리는 더 위험해진다. 샌프란시스코는 민주당이 시장을 독식해온 ‘진보 도시’다. 히피 문화의 발상지이자 소수인종, 동성애 등을 포용하는 진보와 관용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범죄와 마약에 대한 지나친 관용, 주택 공급 부족 등의 실책이 이어지면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등 진보적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던 체사 부딘 샌프란시스코 검사장은 좀도둑과 마약 등에 온정적인 정책을 펴다가 지난해 주민소환 투표에서 쫓겨났다. 2018년 미 첫 흑인 여성 시장이 된 민주당 소속 런던 브리드 시장은 범죄 문제가 심각해지자 뒤늦게 경찰 예산을 증액했다. 시의 세수가 줄어 막대한 재정적자가 예상되는데도 시 의회는 노예제와 인종차별 피해 보상금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구당 500만 달러를 지급하는 ‘흑인 보상(Black reparation)’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최근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취재하다가 마약중독자의 공격을 받은 영국 언론사 텔레그래프 취재팀은 “샌프란시스코의 고난은 다른 지역이 이 같은 급진적인 진보 정책을 선택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경고”라고 전했다.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야 한다’는 진보 정치의 이상도 치안, 주거 등 시민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생활 정치’에 실패하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샌프란시스코엔 대지진, 닷컴버블, 글로벌 금융위기 등 위기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80여만 명의 시민이 있다는 점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8-02 00:09
[오늘과 내일/박용]‘킬러 괴담’에 번번이 흔들리는 나라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계획과 관련해 “한국민들의 우려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일본 정부가 왜 원전 오염수를 태평양에 방류하려는지, 수산물은 안전한지 알지 못하니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인들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국제기구 수장도 잘 알고 있다. 시민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풀어주는 건 전문성을 갖춘 과학자와 정부, 국제사회의 몫이다. 일본 정부는 방류 절차의 안정성을 설명할 의무가 있고, 원자력 전문가들이 포진한 IAEA는 일본 정부의 계획을 검증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측면에서 내부 이견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검증 결과를 자신했지만, 2박 3일 방한 기간 IAEA 검증 결과나 공신력을 공격하는 이들까지 설득할 순 없었다. 국민 건강은 작은 위험만 있어도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럴 때 국제기준과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괴담’이 생겨난다. 괴담은 소문으로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건강에 대한 국민들의 합리적 의심을 악용해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공격하는 ‘킬러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8년 뉴욕타임스(NYT)는 1980년대 이후 구소련 당국 등이 유포한 수십 개의 허위 뉴스 사례를 분석하고 괴담에는 공통된 ‘각본(playbook)’이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괴담 공작의 첫 번째 단계는 건강, 성 정체성, 인종 등 사회적 갈등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민감한 이슈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거대한 거짓말(big bold lies)’을 꾸며낸다. 이 괴담을 ‘진실의 조각들’로 감싸 그럴듯하게 만들고 괴담을 대신 퍼뜨려줄 ‘유능한 바보(useful idiot)’를 찾아낸다. 구소련은 이런 식으로 ‘흑인과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미국 군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는 ‘AIDS 음모론’을 6년간 세계 80여 개국에 퍼뜨렸다. 이 보도를 기획한 애덤 엘릭 NYT 오피니언 동영상 책임 프로듀서를 5년 전 뉴욕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 광우병 사태가 ‘괴담 각본’에 포함된 ‘국민 건강’이라는 민감한 이슈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흥미로워했다. 2008년 광우병 시위, 2016년 사드 배치 논란의 출발점은 서로 달랐지만 ‘국민 건강이 위태롭다’는 극단적 시나리오의 종착역은 같았다. ‘광우병 소’ ‘전자파 참외’ 같은 먹거리 괴담은 공포를 실어 날랐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괴담은 결국 현실이라는 검증의 벽은 넘지 못했다. 미국산 쇠고기는 그때보다 더 많이 팔리고, 성주 참외는 올해 사상 최대 수출을 기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괴담 논란’이 되풀이되는 건 국제기준, 과학적 기술적 결론을 믿고 따르는 ‘신뢰자본’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괴담을 걸러낼 공신력 있는 전문가집단, 독립위원회 등 사회적 여과장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야당 정치인과 민간단체들이 일본까지 날아가 오염수 방류의 위험성을 제기하더라도 과학적 기술적 근거와 국제적 기준에 따라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팻말과 구호만으로는 ‘국내 정치용 괴담’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렵다. 반복되는 ‘괴담 논란’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애꿎은 자영업자, 농민, 어민들의 피해로 이어진다. 괴담으로 이득을 보려는 세력에게 ‘한국은 흔들면 흔들리는 만만한 나라’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원전 오염수 방류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만큼 허약한 신뢰자본을 되살리는 일도 중요해졌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7-11 23:33
[오늘과 내일/박용]역전세대책, ‘갭투자 면죄부’는 안 된다맷 필립스 전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는 2014년 미국 경제 계간지 ‘밀컨인스티튜트리뷰’에 ‘전세 따라잡기(Keeping up with Jeonse)’라는 제목으로 한국 특유의 전세 제도와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는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지 마라. 아파트를 빌리려면 평균적으로 30만 달러에 상당하는 돈(전세보증금)을 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도 가계부채가 많지만, 한국인들은 그들과 달리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빌리지 않는다. 집을 빌리기 위해 돈을 빌린다”고 꼬집었다. 지금 들어도 따끔한 충고다. 전세는 원래 은행 문턱이 높던 때 집주인이 부족한 자금을 세입자 보증금으로 충당하는 사적금융 형태로 출발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가계대출을 확대하고, 정부가 주거 안정을 명분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풀면서 세입자가 돈을 빌려 다시 집주인에게 빌려주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비정상적인 전세시장이 형성됐다. 정부가 푼 전세대출은 전세금을 밀어 올렸다. 전셋값이 올라 투자 비용이 줄면 ‘갭(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이) 투자’ 유인이 커진다. 집값이 다시 상승하고 전세금과 전세대출이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문재인 정부가 2020년 계약갱신요구권, 전월세상한제 등이 담긴 ‘임대차 3법’을 도입한 뒤 전세금이 단기 급등하며 2022년 7월 정점을 찍기 전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이렇게 불어난 전세보증금이 지난해 말 기준 1000조 원을 넘어선 걸로 추정된다. 문제는 돈을 빌리는 사람(세입자)과 이 돈을 가져다가 투자하는 사람(집주인)이 서로 달라 도덕적 해이와 정보 불균형에 따른 전세 사고를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2002년 신용카드 사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마다 집값과 전세금이 떨어지면 다음 세입자를 받아 기존 세입자의 보증금을 다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나 집값이 전세금보다 더 떨어지는 ‘깡통전세’, 전세 사기 등이 반복됐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최근 역전세 문제를 연일 거론하는 건 오래된 한국 전세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비상벨을 울리는 격이다. 정부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집주인들이 대출을 더 받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는 집주인들이 책임져야 할 전세금 상환을 정부가 대출로 지원해 주는 셈이다. 정부가 전세대출을 풀어 전세금을 밀어 올리고 갭투자에 일조하더니, 이제는 갭투자를 한 집주인의 위험까지 줄여줘 ‘무위험 갭투자’를 만들어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미 집을 팔거나 다른 자산으로 모자란 보증금을 채워 돌려준 집주인과도 형평성에서 어긋난다. 자칫 보증금 상환 대출이 또 다른 갭투자의 종잣돈으로 쓰이거나 다음에 들어올 세입자의 보증금 상환 가능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세입자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금 상환 대출 한도를 늘려주더라도 먼저 집주인의 보증금 상환 능력을 엄격히 심사하고 지원 대상과 지원 기간을 제한해야 한다. 부동산 호황기에 전세금을 올려 받아 자본 수익과 소득 수익을 올리다가 집값이 떨어질 때 그 손실을 세입자와 사회에 전가하는 갭투자 집주인들에겐 응분의 대가도 요구해야 “전세 끼고 집 사도 문제없다”는 도덕적 해이를 막는다. 근본적으로 돈을 빌려 집을 빌리는 형태의 비정상적 전세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 전세대출에도 대출 한도 규제를 적용하고 전세금 비율이 높은 주택은 전세대출을 제한해 전세대출을 이용한 ‘무위험 갭투자’를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다. 전세대책을 주거 지원에서 부채 관리 관점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외신에 ‘역전세(Yeok-Jeonse)’라는 한국어가 자주 등장할 날도 머지않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6-20 23:55
김남국이 미국 의원이었다면[오늘과 내일/박용]한국에 코인 투자 논란으로 탈당까지 한 김남국 의원이 있다면, 미국엔 코인 스캔들로 추락한 매디슨 코손 전 공화당 하원의원(노스캐롤라이나)이 있다. 김 의원은 1982년생, 코손 의원은 1995년생으로 둘 다 젊다. 거액의 코인을 보유한 ‘코인 고래’였고 실체가 불분명한 잡코인에 손을 댔다가 의회의 윤리 심판대에 오른 점도 닮았다. 미 하원 윤리위원회가 내놓은 81쪽짜리 보고서에 따르면 코손 의원은 2021년 12월 21일 15만 달러를 투자해 미국 최대 자동차 경주대회인 나스카(NASCAR) 우승자 브랜던 브라운 이름을 딴 밈코인(농담이나 유행어 등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코인)인 ‘LGB(Let’s go, Brandon)’ 1800억 개를 매입했다. 당시 ‘Let’s go, Brandon’이라는 표현이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는 ‘밈’으로 유행했다. 코손 의원은 자신이 투자한 코인을 동영상 등을 통해 홍보까지 했다. 코손 의원이 투자하고 9일 뒤 LGB코인 측은 “2022년 나스카 시즌에 브랜던 브라운을 후원한다”고 발표했고, 코인 가격은 치솟았다. 코손 의원은 다음 날 보유 중인 코인 일부를 매각해 현금을 회수했다. 나스카 측은 일주일도 안 돼 LGB코인의 후원 계획을 거부했다. 코인 가치는 급락해 결국 휴지 조각이 됐다. 윤리위는 이 과정에서 코손 의원이 금전적 이득을 얻어 이해충돌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보고서는 “코손 의원의 암호화폐 매입 조건이 일반인보다 더 관대했고 이는 부적절한 선물”이라며 선물의 가치에 해당하는 1만4000달러를 기부하게 했다. 1990년대생 최초로 하원에 입성한 코손 의원은 코인 스캔들과 의원답지 못한 언행을 일삼다가 지난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도 떨어졌다. 미국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무렵 의원들이 행정부 고위 관료들과 회의에 참석한 뒤 내부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했다는 의혹이 CBS 탐사보도로 드러났다. 이 결과 의원들의 주식 거래 내역을 45일 이내에 온라인에 공개하는 내용이 포함된 ‘스톡법(STOCK Act·Stop Trading on Congressional Knowledge Act)’이 2012년 통과됐다. 2018년엔 코인도 추가됐다. 코손 의원도 LGB코인 거래를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1000달러를 물어야 했다. 김남국 의원이 미 의원이었다면 2021년 1월 LG디스플레이 주식 9억8000만 원어치를 매각하고 45일 이내에 공개했어야 한다. 그 돈으로 코인을 매입해도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그가 그해 7월 가상자산 과세를 미뤄주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할 때 곧장 이해충돌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나중에 ‘입법 로비’ 의혹이 제기된 ‘P2E(Play to Earn·돈 버는 게임)’ 코인을 여러 차례 매입했을 때도 내부거래와 이해충돌 감시망에 포착됐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김남국 방지법’(국회법 개정안,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의원들이 보유한 가상화폐를 주식처럼 국회 윤리심사자문위원회에 등록하게 하자는 거다. 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의 핵심인 ‘사적이해관계 등록’ 조항(32조2)이 국회를 통과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주식 등을 등록하고 공개하는 구체적 절차를 담은 국회 규칙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그래 놓고 이번에 김남국 방지법이라며 코인을 하나 얹었다. 그러니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식의 면피 대책이라는 의심을 받는다. 여야 의원들이 자정 의지가 있다면 하루빨리 국회 규칙을 제정하고, 의원들이 주식이나 코인을 백지신탁하지 않는다면 미국처럼 거래 내역을 온라인에 그때그때 공개하게 하는 한국판 ‘스톡법’을 시행해야 한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5-30 21:30
삼성이 공장 짓고 전기까지 끌어와야 한다면[오늘과 내일/박용]대기업 임원 A 씨는 올해 하반기(7∼12월)로 예정된 유럽 국가의 프로젝트 입찰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탄소중립(온실가스 배출이 사실상 제로가 되는 상태)을 선언한 기업만 입찰할 수 있다’는 특별한 조건이 달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럽계 회사는 납품 조건으로 ‘RE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글로벌 캠페인) 참가를 요구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이 ‘시장의 룰’을 바꾸면서 탄소 배출이 많은 기업이 수출과 입찰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올해 10월 탄소 배출량이 많은 기업들에 부담을 지우는 ‘탄소국경조정제(CBAM)’를 시범 운영한다. 2026년 이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 한국 주력 수출품인 철강이 직격탄을 맞는다. 유럽이 측정하려는 탄소 배출량에는 생산 과정에서 쓰인 열과 전력에서 발생한 ‘간접 배출량’까지 포함된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의 경우 약 70∼75%가 간접 배출이다. 탄소무역 장벽이 확대되면 한국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와 같은 반도체 기업도 안심할 수 없다. 삼성전자가 경기 용인에 20년간 300조 원을 투자해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짓기로 했지만,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충남 당진 화력발전소 총발전량(6GW)을 끌어와도 부족한 판인데 EU의 간접 배출 기준과 RE100 목표를 달성하려면 해상풍력,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로 남부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멀리서 끌어와야 한다. 문제는 전기를 실어 나를 고압송전선로다. 한국전력은 8일 해상을 통해 호남 지역 등의 잉여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초고압직류송전(HVDC) 기간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는 바람에 지난해 32조 원의 적자를 내고 올해도 약 9조 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한전이 ‘전기 고속도로’에 투자할 여력은 별로 없다. 여차하면 기업이 반도체 공장도 짓고 전력을 끌어오기 위한 고압송전선로까지 깔아야 할 판이다. 미국 등 경쟁국가는 세금을 깎아주고 보조금을 주면서 기업을 유치하는데 한국에선 공장도 짓고 전기도 직접 끌어와야 한다면 투자할 기업이 거의 없다. ‘탈탄소’는 정부의 일방적 의지나 몇몇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무리하게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재생에너지 비중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묶어두고 인구와 공장이 밀집한 수도권과 해상풍력, 태양광 시설이 밀집한 남부 지역 간 전력 불균형을 방치하는 바람에 국가적 비효율을 키웠다. 수도권의 경우 전력 소비량이 발전량의 약 1.4배지만 그 밖의 지역은 발전량이 더 많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면 가격이 올라가야 하지만 수도권이나 지방이나 전기요금은 동일하니 전력 소비량이 큰 인터넷데이터센터(IDC)가 수도권에 몰리는 게 현실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원자력 발전 등 효율적인 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저렴한 산업용 전기를 공급해 수출 기업들을 키웠기 때문이다. ‘탄소중립 경제’ 시대의 과제는 청정에너지 인프라를 구축해 탄소 배출이 줄어도 성장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전기요금을 찔끔 올리거나 한전 자구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청정에너지 등 미래산업과 떼어내 접근하기도 어렵다. 미국이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만들어 에너지 안보와 청정에너지 산업 육성을 위한 10년간의 밑그림을 제시한 것처럼 미래산업과 일자리의 관점에서 ‘탄소중립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는 ‘한국형 IRA’를 고민해 볼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5-09 21:30
“일본은 20여 년을 흘려 보냈다” [오늘과 내일/박용]9일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일본은행 총재가 취임하면서 무제한 돈 풀기로 일본 경제를 장기 침체에서 구해내겠다는 ‘아베노믹스’의 주역들이 사실상 모두 퇴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경제 비전인 아베노믹스 10년의 공과에 대한 평가도 본격화하고 있다. 끝물 분위기인 ‘아베노믹스’는 10년 전엔 초유의 금융 실험이자 정치적 모험이었다. 2012년 12월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은 ‘물가 목표 달성을 위해 대담한 금융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승리했다. 경기 침체에 지친 민심을 등에 업은 아베 총리는 “윤전기를 쌩쌩 돌려 돈을 찍어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며 일본은행을 압박해 2013년 1월 ‘디플레이션 탈출과 지속적 경제 성장 실현을 위한 정책협력’이라는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치적 타협이었고, 아베노믹스의 서막이었다. 공동성명의 당사자였던 시라카와 마사아키(白川方明) 전 일본은행 총재는 올해 1월 일본 경제전문지 ‘동양경제’ 기고문에서 “10년 전 일본 사회는 ‘2% 물가목표’나 ‘과감한 금융완화 요구’가 휩쓸었다”며 “1980년대 후반 거품경제나 1990년대 초반 금융위기 전야 때처럼 다른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 분위기가 지배했다”고 전했다. 돈을 풀어 물가를 끌어올리고 경기를 살린다는 아베노믹스 처방에 매료된 정치와 여론은 세계화나 정보기술(IT) 발달, 임금 하락, 인구구조 변화 등 금융 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나 저출산 고령화 같은 근본 대책을 요구하는 주장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집단 사고와 정치적 타협은 후유증을 남긴다. 10년간 돈 풀기에도 일본 경제가 2% 이상 성장한 건 2번뿐이다. 물가도 최근 세계적 인플레와 다른 나라 금리 상승으로 엔화 가치가 하락하기 전까지는 기대만큼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 세대에 전가될 청구서는 두툼해졌다. 일반 정부부채 비율은 2012년 말 226%에서 2021년 말 262%로 뛰었다. 경제의 기초체력은 여전히 부실하다. 일본의 잠재 성장률은 0.7%에 그쳤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일본 경제의 당면 과제는 잠재성장률 저하를 막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일본은 이를 배우기 위해 20년 이상 꽤 오랜 시간을 썼다. 민주주의의 비용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너무 큰 비용”이라고 아쉬워했다. 경기 침체 위험에 직면한 한국 경제 앞에도 내년 4월 총선이라는 정치적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여야가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의 문턱을 낮추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완화에 합심하면서도 ‘돈 풀기’를 막는 보루인 재정준칙 법제화를 30개월째 미루고 있다는 건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다.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등 미래 세대가 쓸 돈을 가불해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의 ‘표퓰리즘’ 요구도 더 거세질 것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며 재정준칙 법제화를 뭉개고 있는 여야의 ‘포퓰리즘 협치’를 막아달라고 하소연했지만, 그 역시 내년 총선 출마가 점쳐진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근본 대책은 고통을 수반해 인기가 없는 데다 효과를 실감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려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금융완화가 선택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미래를 생각하면 사회가 장기적으로 금융완화에 의존하는 것을 방지하는 메커니즘 구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만의 고민은 아니다.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선거철 ‘민주주의 비용’을 최소화하려면 정말로 ‘여론의 기적’이 필요하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4-18 21:45
시민 밀어내는 ‘민폐 시위’ 바꿀 때 됐다 [오늘과 내일/박용]지난 주말 오후 서울시청 광장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외국인 단체 관광객을 우연히 만났다. 이날 주변 도로에서는 각종 시위로 차량들이 거북운행을 했다. 경찰이 교통을 통제했고, 횡단보도 빨간불도 한참 만에 바뀌었다. 한 외국인 관광객은 답답한 듯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이드는 “토요일(Every Saturday)마다 시위가 있다”며 “Every Saturday”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주말마다 시위가 되풀이되는 서울. 외국인이 느끼는 첫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토요일 서울 도심은 평범한 시민의 것이 아니다. 남대문부터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세종대로 주변은 ‘퇴진’ ‘구속’ 등과 같은 정치 구호가 적힌 현수막, 각종 단체의 깃발이 나부낀다. 그 단체가 그 단체들이다. 시민들은 인도를 이들에게 내주고 길가로 밀려난다. 특정인에 대한 비방과 음모론으로 가득찬 현수막을 지날 때는 아이들 눈을 가려야 한다. 시위는 자신들의 주장을 널리 알리는 일인데 시민들이 눈을 가려야 할 정도면 무슨 소용인가. 시위가 시작되면 ‘소음 경쟁’이 벌어진다. 집회 주최 측은 대형 공연장에서 봄 직한 전광판과 무대를 설치하고 크레인으로 대형 스피커를 공중으로 끌어올려 귀청이 찢어지도록 철 지난 운동권 노래나 군가를 틀어댄다. 광화문과 남대문 양쪽에서 서로 다른 단체가 시위를 하면 중간에 낀 시민들은 귀를 막고 걸어야 할 정도로 시끄럽다. 시위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널리 전하기 위한 것인데 시민들이 귀를 막고 걷는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시민들이 눈과 귀를 막게 하는 ‘민폐시위’ 문화를 바꾸려면 주최 측부터 시민 친화적 시위를 더 고민해야 한다. 2020년 6월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BLM’(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를 취재하면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울림을 갖는지 실감했다. 휴대용 확성기를 든 한 시민이 구호를 외치면 다른 시민들이 그의 마이크가 돼 한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폭력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대형 스피커가 없어도 거리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뉴욕에선 공공기관 비리를 비판하는 시위에 ‘부패’를 상징하는 쥐 모양의 대형 풍선 모형이 등장한다. 소음 대신 상징물을 통한 시각적 자극으로 주위를 환기하는 시위 방식이다. 당국은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되 소수가 거리를 독점하고 시민을 밀어내지 않도록 관리할 책임이 있다. 평균 소음을 측정해 단속하는 방식으로 소음시위를 근절하기 어렵다면 유럽처럼 실시간 소음측정기를 설치하고 소음이 기준치를 넘는 시간에 비례해 벌금을 내게 해 주최 측에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정치권도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럽다”는 말로 넘어가거나 민폐시위에 어물쩍 편승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가 역할을 다했다면 애초 각종 단체들이 거리로 나올 일도 없었다. 국회의원 수를 늘리거나 세비를 올리는 데 정신을 쏟을 게 아니라 의사당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특정 세력이 거리와 광장을 장악하고 제 목소리만 높이면 사회 구성원 간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자본은 약해진다. 영국 싱크탱크 레가툼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자본 수준은 조사대상 167개국 중 107위다. ‘사회적 자본 후진국’은 같은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도 선진국에 비해 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뉴욕 맨해튼대로는 시민 축제나 순직 경관 및 소방관 장례식 등 공동체를 위한 행사를 위해 차단된다. 특정 세력과 이익집단이 시민을 밀어내고 도심을 점거하는 일이 반복되진 않는다. 우리도 이젠 시민에게 ‘도심의 봄’을 돌려줄 때가 됐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3-28 21:30
‘민간 중심 경제’로 전환한다더니… [오늘과 내일/박용]금융회사 본부장급 간부 A 씨는 기획재정부(재정경제부) 출신 퇴직 관료들(김낙회 변양호 이석준 임종룡 최상목)이 2년 전 내놓은 책 ‘경제정책 어젠다 2022’를 찾아 읽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회사나 KT 등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언급한 뒤 주위에서 일독을 권했다. 저자 중 최상목 전 기재부 제1차관은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이석준 전 기재부 제2차관은 NH농협금융지주 회장에 취임했다.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얼마 전 우리금융 회장에 내정됐으니 무시하기 어려운 책이다. 내용 중엔 한국 경제의 ‘3대 과제’ 중 하나로 ‘공정한 경쟁 환경 조성―기업 지배구조 혁신을 위한 제도 개편 방안’까지 들어 있다. A 씨가 이 책을 집어 든 건 ‘관치 경제’에서 터득한 민간의 ‘생존 본능’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 연임 개입 논란과 관련해 “우린 비토(거부권)는 해도 추천은 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퇴짜만 놓아도 임원 인사, 신규 채용과 투자 등이 ‘올스톱’되고 불확실성이 커지는 게 기업 경영이다. ‘윤심’이니 ‘명심’이니 따지는 후진적 정당 지배구조로 지탄을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 기업 지배구조엔 ‘그들만의 리그’니 ‘이권 카르텔’이니 입바른 말을 하면 앞에서 굽신거려도 뒤돌아서 비웃는 게 저잣거리 민심이다. 퇴직 관료나 정치인이 기업이나 금융사 CEO로 가더라도 실력과 리더십이 있다면 출신을 따지는 건 촌스럽다. 하지만 중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관에서 민으로만 흐르는 일방통행식 인사라면 불공정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거리가 있다. 벤처기업인 출신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빼면 대부분의 장관이 정치인, 관료, 학자로 구성된 ‘정·관·학’ 출신이다. 한국의 엄격한 공직 기준을 통과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잘돼 있는 기업인이 별로 없다손 쳐도 전문성과 도덕성을 겸비한 민간 인재를 발탁할 시스템이나 의지가 있다면 못 할 일도 아니다. 미국은 민간기업이나 금융회사 CEO로 경험을 쌓고 재무장관이나 상무장관이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으로 일한 스티브 므누신은 골드만삭스, 상무장관으로 일한 윌버 로스는 로스차일드은행 출신 기업인이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일한 행크 폴슨, 민주당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로버트 루빈까지 골드만삭스 출신 재무장관만 3명이다. 오히려 너무 쏠려서 탈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도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최초 여성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을 재무장관에 발탁했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 최초 벤처캐피털 회사의 공동 창업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1년 전 대선 다음 날인 3월 10일 국회 대국민 인사에서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겠다”고 했지만, 요즘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나”라며 의심하는 이들이 꽤 있다. 정부가 해답을 갖고 있지 않은 기업 지배구조나 금리 등 시장 가격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입김을 세게 불어넣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부 눈치를 살피고 모든 일이 관을 통해야만 해결되는 ‘만사관통’ 사회에선 관은 상전이고 민간은 늘 뒷전이다. 윤 대통령이 약속한 민간이 끌고 정부가 미는 ‘민간 중심 경제’도 오지 않는다. 기업인이 정부보다 시장을 먼저 바라보고, 실력으로 민관 전문가가 물 흐르듯 교류할 수 있어야 ‘관치’니 ‘낙하산 인사’니 하는 말이 사라진다. 정부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도 비로소 평평해질 것이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3-07 21:30
‘은행 돈 잔치’, 은행 탓만 할 수 없다 [오늘과 내일/박용]윤석열 대통령이 13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은행의 돈 잔치’로 국민들이 위화감이 생기지 않도록 금융위는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은행이 번 돈을 성과급이나 배당으로만 쓰지 말고 소비자들의 금리 부담을 완화하고 금융시장 불안을 대비해 손실 흡수 능력을 확충하는 데 쓰라는 주문이다. 은행들이 “손쉬운 이자 장사로 막대한 돈을 번다”는 인식은 틀리지 않는다. 국내 은행의 이자수익 비중은 90%에 육박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국내 은행은 지난해 18조9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전년보다 2조 원 많다. 지난해 금리 급등기에 이자로 짭짤한 재미를 본 셈이다. 하지만 은행의 이자 장사를 위한 ‘게임의 규칙’을 정한 건 금융당국이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은 과점적 형태로, 여수신 차익 등 영업익을 얻는 것에 대해 특권적 지위를 주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인허가와 규제를 거머쥔 당국은 은행들엔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2021년 금융당국이 과열된 부동산 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은행 대출을 제한하자, 고금리를 약속하고 예금을 잔뜩 끌어모았던 신생 인터넷은행 토스뱅크는 이자 장사를 하지 못해 위기를 겪었다. 은행 이자이익이 급증한 건 한국은행이 지난해부터 올해 1월까지 기준금리를 8번 올렸기 때문이다. 기준금리가 연 1.0%에서 연 3.5%로 단기 급등하는 과정에서 예금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빨리 올라 은행들은 손쉽게 돈방석에 앉았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예대금리 차이는 지난해 1월 2.24%포인트에서 12월엔 2.55%포인트로 벌어졌다. 은행의 이자 장사가 걱정이라면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시차를 초래하는 금리 산정 체계의 구조적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10월 가산금리 산정 체계를 정비한다며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다. 대통령실은 은행 이자수익 확대에 대한 대책으로 지난해 7월 당국이 내놓은 예대금리 차 비교공시 제도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은행권 신규 예대금리 차가 2022년 1월 1.80%포인트에서 지난해 12월 1.34%포인트로 줄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비교공시 제도의 효과인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비교공시 제도가 경쟁자의 진입이 제한된 시장에선 합법적인 금리 담합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형마트의 최저가격 보상제가 치열한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가격 경쟁을 피하게 하는 경쟁 억제 장치로 작용하는 역설과 비슷하다. 군기 잡기는 그때뿐이다. 은행의 돈 잔치가 마뜩잖으면 금리 인상기에 큰돈을 벌지 못하도록 시장 환경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게 근본 해법이다. 은행이 예금금리를 더 높게 주고, 대출금리를 더 낮게 받으면 이자수익은 자연스럽게 준다. 시장 진입장벽을 낮춰 기존 은행의 특권적 지위를 낮추고 과점적 시장을 경쟁 체제로 바꾸면 은행들이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예금이자는 높아지고, 대출이자는 낮아질 것이다. 하지만 은행 진입장벽은 아직도 높다. 오히려 당국은 지난해 하반기에 ‘레고랜드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경색되자 은행들에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요청하는 역주행을 했다. 예금이자는 뚝 떨어졌고, 예금자의 불만은 고조됐다. 은행들은 덕분에 이자 장사를 할 기회를 또 얻었다. 정부에 정책이 있다면 시장엔 대책이 있다. 얼핏 시장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 보면 정부 실패가 원인일 때가 많다. 정부가 스스로에 관대하고 시장에 엄격하면 개혁에 대한 공감과 지지는 떨어진다. 시장에선 “은행 다음 차례는 또 다른 규제산업인 통신사”라는 말이 나온다. 언제까지 시장 탓만 할 건가.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2-15 03:00
[오늘과 내일/박용]‘집값 호러쇼’의 연출자들세계 곳곳에서 ‘집값 호러쇼(house-price horror show)’가 벌어지고 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가파르게 올리자 미국 뉴욕부터 대한민국 서울까지 집값이 추락하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집값 호러쇼에 따른 고통 강도가 최근 집값 상승 폭, 소득 대비 가계부채, 금리 인상 반영 속도 등 3가지에 달려 있다고 진단했다. 이 기준만 놓고 보면 한국은 혹독한 ‘집값 호러쇼’가 연출될 가능성이 있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서울의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이 “현재 18인데, 금융위기 직전(8배)보다 높다”고 우려했다. 그만큼 소득보다 집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는 106%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빠르게 집값이 오르는 동안 ‘빚으로 만든 집’이 수두룩하다. 미국은 주택담보대출이 30년 만기 고정금리가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변동금리 비중이 77.9%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대출 금리도 동반 상승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집주인들은 불어난 이자 부담에 밤잠을 설쳐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도 가계부채 관리에 다시 실패해 집값 호러쇼를 걱정해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전 정부 인사들은 자기 보호를 위한 ‘세력화’에 급급하고, 물가를 잡으려고 금리를 올리는 판에 야당은 또 돈을 풀어야 한다며 무책임한 정치 공세를 펼치고 있다. 권력을 넘겨받은 여당과 실상을 아는 관료집단은 빚으로 지탱하고 있는 주택시장이 임기 내 무너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규제를 풀고 또 ‘부동산 거품기’를 돌리고 있다. 둔촌주공 재건축 아파트(올림픽파크포레온) 미분양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중도금 대출 규제와 전매 제한 완화, 실거주 요건 폐지 등을 핵심으로 하는 ‘1·3 부동산 대책’을 급히 내놨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빚을 내서 집 사라는 게 아니다”라고 했지만 시장은 ‘당첨자들이 돈이 모자라면 은행 대출을 받아 중도금을 내고, 잔금은 세입자가 가져온 보증금으로 치르고, 그마저 부담이 되면 1년 있다가 집을 팔아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정부의 파격적 규제 완화에도 둔촌주공 당첨자의 약 30%가 계약을 포기한 건 분양가가 너무 비싸고 부동산 시장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실수요자가 적지 않다는 뜻이다. 규제 완화 기대감에 집주인들이 매물을 거두고,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밖에 없는 실수요자들은 집값이 더 떨어지길 기다리며 매수를 미루면 거래는 끊긴다. 공인중개사 수입도 사라지고, 이삿짐센터나 인테리어 가게는 할 일이 없어진다. 가구나 가전제품도 팔리지 않는다. 소비는 더 가라앉는다. 이자 부담이 커진 대출자를 지원하는 ‘핀셋 대책’과 급격한 집값 하락을 막는 연착륙 대책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규제를 성급하게 풀고 다주택자 투기 수요를 끌어들여 억지로 집값을 떠받치면 경착륙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경기 침체와 가계 부채의 늪을 더 깊게 만들 수도 있다. 금융위기 때는 집값 하락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뻔했다. 현재는 은행들의 건전성이 훨씬 나아졌다. 금융 안정이라는 나무만 보다가 경기 침체라는 숲을 보지 못하는 오류는 피해야 한다. 집값이 급락하면 부실 건설사나 금융사가 쓰러지는 고통이 따르지만 옥석 가리기가 끝나면 대기 중인 실수요가 유입돼 거래가 살아나고 시장이 단기 회복될 여지도 생긴다. ‘나 때는 안 돼’라며 부실 투자자들에 대한 구조조정을 또 미루고 규제를 풀어 억지로 집값만 떠받치려고 들다간 ‘집값 호러쇼’의 공동 연출자라는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2023-01-2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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