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임수]반년 새 5조 원 이탈, 무용지물 된 청약통장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0일 21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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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봄 시중은행엔 ‘청약 헬프 데스크’라는 별도의 상담 창구가 마련됐다. 새 주택청약종합저축 출시를 앞두고 빗발치는 고객 문의를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사전 예약으로 가입을 신청한 사람만 200만여 명. 청약예금·부금·저축으로 나뉘어 있던 청약통장의 기능을 모두 더한 데다 누구나 조건 없이 가입할 수 있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자율 또한 연 4.5%로 높아 자녀 이름으로 통장을 만드는 이들이 많았다. 기존 청약통장 3인방과 새 통장은 2015년 9월 통합됐고 이듬해 가입자 2000만 명을 돌파했다.

▷아파트 청약통장은 신상품이 나오거나 집값이 급등할 때면 가입자가 눈에 띄게 몰렸다. 청약 당첨만으로 수억 원대 시세차익을 누릴 수 있을 때는 특히나 그랬다. ‘로또 아파트’ 원조로 꼽히는 2006년 판교신도시 3330채 동시분양에서는 청약통장 46만여 개가 쓰였다. 지난 정부에선 청약제도가 20차례나 바뀌어 전문가조차 헷갈릴 정도였지만 청약통장 가입자는 역대 최대인 2800만 명을 넘겼다. 치솟는 집값을 잡겠다며 분양가 상한제를 확대한 탓에 시세의 반값도 안 되는 ‘로또 청약’ 단지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정점을 찍었던 청약통장 가입자는 줄곧 내리막을 걷고 있다. 7개월 새 86만 명이 줄었다. 작년 초만 해도 통장을 해지하는 사람이 월간 25만 명 정도였지만 연말로 갈수록 갑절로 불었다. 새로 들어오는 이는 없고, 통장을 깨는 사람만 있으니 청약통장 예치금도 반년 만에 5조 원 넘게 빠졌다. 전체 예치금은 조만간 100조 원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동산 침체로 청약시장에도 한파가 몰아닥친 여파다. 집값이 떨어지고 미분양 아파트가 급증하면서 청약통장이 내 집 마련의 필수조건이라는 인식이 사라진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11월 청약통장 금리를 1.8%에서 2.1%로 높였지만 일반 예·적금에 비해 쥐꼬리 수준인 것도 해지를 부추기고 있다. 고금리, 고물가에 경기 침체까지 겹치자 무용지물이 된 청약통장을 깨서 빚부터 갚거나 급전을 마련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청약에 당첨되려면 통장을 오래 갖고 있는 게 중요하지만 이 같은 충고도 이탈 행렬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에 힘입어 최근 아파트 거래가 반짝 살아나긴 했지만 청약 지표들은 집값 추가 하락에 힘을 싣고 있어서다. 지난달 청약에 나선 아파트 대부분이 미달됐고, 수도권 대단지에서도 분양가보다 낮은 마이너스 프리미엄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집값은 여전히 비싼 수준이다. 로또 사는 심정으로 청약통장에 가입하는 시절을 이제 끝낼 때가 됐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
#청약통장#5조 원 이탈#무용지물#로또 청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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